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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석 Apr 09. 2019

개념정의에 대하여

왜 개념이 명확해야 하는가?

2019-04-09_페북에 썼던 안내글

[개념 정의에 대하여]

지식은 꽤 있어도 그 지식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고력(思考力)이 부족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일상에서 쓰는 모호한 개념들을 스스로 정의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념을 정의하여 타인에게 설명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간명하게 기술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고등한 정신능력이 아닐까 싶다. 이것이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



문명(civilization)에 대하여


‘문명’(文明)이란 무엇인가? 이 우주와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인간의 사유 기능을 활용하여 개념화한 모든 지식과 정보의 총체를 말한다. 문명의 결과물인 건물, 의복, 도로, 항만, 수도, 전기, 자동차, 기차, 비행기 등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이것뿐이 아니다. 인간관계를 설명하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개념화 기술 또한 문명을 발전시킨다. 문명이 뒤떨어지면 달구지를 타고 다녀야 하고, 집단 간의 갈등이 생겨 전쟁을 겪어야 하는 비참한 삶이 기다린다. 그래서 인류는 문명의 발전을 위해, 즉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나 역시 문명의 발전에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성취예측모형》(Achievement Prediction Model, APM)을 만들어 새로운 개념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아무것도 없는 데서 만든 것은 아니고 이미 있던 것들을 새롭게 조합한 것뿐이긴 하지만, 어쨌든 새로운 것이긴 하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그렇다.


아무튼, 이러한 새로운 지식은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이성(理性, reason)의 기능에 의해 생성된다. 이성은 적어도 몇 가지 사유 능력을 발산한다. 합리적 사고, 비판적 사고, 추론적 사고가 그것이다. 인간은 이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이 세 가지 사유 능력을 동원하여 새로운 지식을 생산했고, 이것이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문화(culture)에 대하여


그러면 ‘문화(文化, culture)’란 무엇인가? 내 삶은 이 ‘문화’라는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 평생을 씨름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조직문화, 기업문화, 민족문화, 유교문화, 기독교문화 등과 같은 용어를 수없이 다루어왔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여러 정의를 참조하기도 했다. 때로는 이렇게 정의했다가 때로는 저렇게 정의하기도 했다. 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퇴 후, 남은 내 인생의 새로운 스테이지를 구상하면서 다시금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쭉 읽었다. 얼마만큼 읽다가 무릎을 쳤다. 문화는 문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 섬광처럼 머리를 스친 것이었다. 문명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다시 찾다가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읽으면서 문명에 대한 간명한 정의가 떠올랐다. 그 정의가 위에 적어놓은 바로 그것이다. 문명이란 “인간이 세계를 개념화한 지식의 총체”라는 것이다. 나의 문명에 대한 이해에 만족했다. 이렇게 해결되지 않는 어떤 것에 늘 몰입하다 보면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번뜩이는 영감을 얻곤 한다.     


그렇다면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는 “문명을 처리하는 집단적 태도”라고 간명히 정의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형성된 모든 지식의 총체를 이해하고 설명하고 처리하는 집단적 신념, 태도, 관습이 곧 그 집단의 문화인 셈이다. 나는 이런 정의가 너무 맘에 들어 혼자 흥분하기도 했다. 왜냐? 학문의 발전과 학자의 사명은 용어를 얼마나 잘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지도교수로부터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 젊은 시절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독일 학자들은, 내가 아는 한, 명확한 용어정의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명확하지 않은 것에 못 견뎌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     


조직이란 무엇인가


정말 그랬다. 내가 1980년대 독일에서 인사조직론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조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읽으면서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더 많은 성과를 내가 위해 노력하는 집단’ 정도로 정의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지도교수의 책에는 ‘조직’이란 “die präsituative Regelung der Aktionsfelder”(인간 행위영역의 선상황적 규정화, 先狀況的 規定化)라고 정의되어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독일어로 된 대학 교재들은 정말 불친절하다. 나에겐 이 개념정의의 의미와 그 유용성을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이 개념정의가 이해되자 그제야 '조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성취예측모형》의 여러 개념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내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성취예측모형》 워크숍은 일반인에게는 매우 생소한 개념이다. 우리나라에서 인사조직이론을 조금 공부했더라도 마찬가지다. 분석적 사고력(AT), 개념적 사고력(CT), 영재성(GIF), 창의성(CRE), 학습능력(LC), 미래지향성(FL), 대인영향력(IMP), 성취지향성(ACH), 정직성(ING) 등과 같은 개념들이 나온다. 이 용어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수없이 썼고 들어왔던 것들이다. 그래서 대부분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수준에서 개념들을 판단한다. 일상적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해 역량진단을 제대로 하려면, 나아가 남을 가르치는 컨설턴트나 학자가 되려면 일상적으로 대화할 때 쓰는 용어 수준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이런 분야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고민해왔던 사람들은 이 개념들의 깊이를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고민 없이 살아온 사람들에겐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가 인사조직론을 전공하면서도 ‘조직’의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말이다.      


늘 경험하는 것이지만, 성취예측모형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용어 하나하나의 개념정의를 제대로 이해시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나. 각자의 노력으로 이 과정을 넘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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