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나경원, 금태섭, 이낙연, 박영선, 김진표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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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성취한다는 것은 도구적 역량만으로는 안 된다. 그 역량을 어디다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아는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이런 타고난(선천적) 성향을 추상화 역량(abstraction competencies)이라 부른다.
▶ 추상화 역량은 어디서 나오는가?
여기서 추상화(abstraction)란 무슨 뜻인가? 이 세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수많은 변수들이 상호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책상 위에도 엄청난 양의 물건들이 즐비하게 놓여있다. PC, 모니터, 키보드, 프린터, 스피커, 빛을 보내주는 스탠드, 메모지, 역량사전, 휴대폰, 아이패드, 휴지, 책들, 필기구들, 마스크, 장갑, 모자, 돋보기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물건들이 있다.
우리는 이렇게 잡다한 것들 속에 살아간다. 이 중에서 내가 일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긴요한 것들을 취사선택(取捨選擇)하지 않으면 이 작업을 계속할 수 없다. 일단 버릴 것은 버리고 꼭 필요한 것만 골라잡는다. 이것을 추상(抽象)이라고 한다. 추상하는 능력이 없다면, 나는 이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끄집어내어 취사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추상하는 능력이다.
나는 딸과 아들을 낳아 키우면서 두 아이가 어찌 그렇게 다른 성향으로 자라나는지 신기해했다. 같은 부모,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는데도 그렇다. 취사선택하는 성향도 타고난다. 《성취예측모형》이 중시하는 추상화 역량은 자기 자신과 타인, 공동체 전체와 생활세계에 대한 인식능력을 말한다.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세계의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없다. 한정된 정보와 인식능력으로 한정된 요소들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성취예측모형》의 추상화 역량은 자기인식(self-awareness)이라는 핵심적인 키워드를 이해해야 한다. 자기인식이 없으면 타인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고, 나아가 이 세계도 제대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내가 누군지 모르면서 타인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 문명이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할 때, 그들이 강조했던 언명은 “너 자신을 알라”였다. 고대인들도 자기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2000년 전 예수의 가르침도 같았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가르침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다.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 사회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간다. 이것을 자기기만(self-deception)이라고 한다. 계층구조 속에서 명령과 통제,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사회일수록 자기기만 현상이 만연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자기를 속여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자기기만이란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것을 소망하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숨기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탐욕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우리는 이런 공직자들을 수없이 경험했다.
대표적으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의 경우를 보자. 과거로 흘러가버린 이 인물들은 자기인식이 결핍된 채 자신을 속이면서 살았다. 자기 자신을 속인다는 말은 자신의 행동과 결정이 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반성하거나 성찰하는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자기인식 곧 자기성찰이 있었다면, 인생이 그렇게 비참하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목전의 이익에 급급한 나머지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을까?
여기서 칸트의 인간관을 아주 쉽게 설명해보겠다. 나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독일경영학, 특히 인사조직론을 공부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이 나에게 철학적 배경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독일학생들만큼 강의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독일친구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해 상심했다.
지도교수와의 면담을 통해 얻은 내 결론은 독일의 철학적 전통을 이해하면 될 것 같다는 점이었다. 조금만 이해하면 되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안의 말을 덧붙여주었지만,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독일철학의 광대한 바다로 뛰어들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전공과목을 공부하기에도 벅찼다.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헤매다가, 역량진단 방법론 훈련을 받는 중 내가 나를 인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역량진단의 뿌리는 인간에 관한 칸트의 철학적 사유였다.
칸트는 인간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Was kann ich wissen? What can I know?
⚊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Was soll ich tun? What should I do?
⚊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 Was darf ich hoffen? What may I hope?
이 질문의 종합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귀결된다. 이런 질문의 결과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라는 칸트의 3대 비판서가 탄생했다. 인간은 진선미(眞善美)를 분별하여 종합·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선험적으로 갖추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옳음(眞)과 그름(僞), 선(善)과 악(惡), 아름다움(美)와 추함(醜)을 구분할 수 있다. 정말 그렇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거나 거짓말로 타인을 속이는 것이 옳지 않고, 착한 일이 아니며, 아름답지도 않다는 사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선험적으로) 안다.
그렇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사태를 판단할 때, 이전에 미리 경험하거나 교육받지 않았어도, 그 사태의 진선미(眞善美)을 가려낼 수 있다. 어떨 때?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할 때조차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백지로 태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이성의 선험적(先驗的) 기능이라고 한다. 이것이 칸트의 인간관이다.
이렇게 자기인식을 가능케 하는 이성의 선험적 기능이 곧 타고난 내적 특성(underlying characteristics)인데, 이것은 잘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이 선험적 기능이 발현되는 다양한 내적 특성을 역량(competency)이라고 부른다. 그중에서도 추상화 역량(abstraction competencies)은 자기인식의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 추상화 역량의 자기인식 기능을 철학적 사유로 밝혀냈다는 점에서 나는 칸트의 철학이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칸트에서 출발하여 키에르케고르, 헤겔, 하이데거, 사르트르, 야스퍼스, 가다머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철학적 사유가 어떻게 경영학, 특히 인사조직론의 근거가 되는지 알게 된 이후, 나는 인간과 조직, 그리고 세계를 보는 눈이 열리는 경험을 했다. 나는 이때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 학문인지 알았다. 내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아마 사도바울도 이랬을 것이다. (사도행전 9장 18절 참조)
이렇게 철학에 튼튼한 기반을 둔 《성취예측모형》은 귀국 후 한국은행 임직원들에게, 컨설팅과 자문을 의뢰한 기업의 임직원들에게,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은퇴 후에는 일반대중을 상대로 여러 차례 가르쳤다.
《성취예측모형》에 관한 책을 지금 출판사에서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편집 중이므로 늦어도 상반기 중에는 출간될 것이다. 코로나 상황에서 출판기념 강의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온라인으로라도 철학적 심리학적 개념들이 어떻게 《성취예측모형》의 정초가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
▶ 인간은 자기를 스스로 인식하는 자율적 존재다
이렇게 철학자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들여다보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이란 ‘독립된 자율적 주체’라는 것이다.
‘독립된’은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서있다는 의미다. 인간은 홀로 설 수 있을 때 자유롭기 때문이다. ‘자율적’은 누구로부터 지시·명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자기 스스로 헌법(보편적 입법)을 만들고 그 헌법(보편적 입법)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복종시키는 것을 말한다. ‘주체’는 인간으로서 양도할 수 없는 주권을 보유하고 있는 생명체를 의미한다.
여기서 자율성은 개인의 도덕적 양심과 사회적 윤리에 부합하게 행동하도록 하며, 독립성은 그런 자율성을 보장하는 환경조건, 즉 사회구조와 시스템을 갖추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고는 자율성을 발휘할 수 없다. 즉, 자율성을 발휘하려면 반드시 독립성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자율성과 독립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러므로 인간은 태생적으로 이성(理性)의 기능이라는 자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엄한 존재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율성으로부터 나온다. 자율성이 없는 인간은 존엄성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 타율적 강제가 동원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칸트의 사유세계는 인류에게 많은 영감과 더불어 인간은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오늘날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는 사람들은, 아니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칸트의 세례를 받고 살아가는 셈이다.
칸트는 다음과 같은 그 유명한 정언명령을 제안했다.
“너의 행위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
이 말은 2000년 전 예수의 가르침과 같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 7장12절)
예수와 칸트의 가르침은 결국 개인의 내적 특성(underlying characteristics)과 외면의 사회적 환경(social structure and system)에 관한 문제를 분명히 밝혔다. 이것은 도덕과 보편적 입법(헌법)의 관계를 의미한다. 도덕은 자기인식을 통한 반성과 성찰을 말하고, 보편적 입법은 반성과 성찰을 가능케 하는 제도적 장치들을 말한다.
이제 칸트의 세 가지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Was kann ich wissen? What can I know?
⚊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Was soll ich tun? What should I do?
⚊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 Was darf ich hoffen? What may I hope?
칸트의 이 질문은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묻는 것이다. 나는 이 질문이 경영학에서 이렇게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가능) → 역량(competency)
⚊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의무) → 성과책임(accountability)
⚊ 나는 무엇을 해도 되는가? (허용) → 재량(discretion)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인식이고 도덕의 출발이다. 우리의 국회 인사청문회는 도덕성을 검증한다면서 온갖 모욕과 모멸감을 주는 꼴불견을 연출한다. 청문장에서 질문하는 자들의 도덕적 불감증을 본다. 도덕성은 검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도덕성이란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기 때문이다. 도덕성을 검증한다는 것은 사상을 검증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현실적으로 뇌세포의 연결망을 검사하지 않는 한 도덕성은 검증할 수 없다. 우리는 내면의 도덕성이 외부로 표출된 윤리적 행동, 즉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결정과 행동을 했고 그 결과가 어땠는지를 검증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사건 속에서(Situation)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Task), 어떤 행동을(Action) 어떤 의도로 했는지(Intention), 어떤 결과를 도출했는지(Results), 그래서 어떤 새로운 상황(new Situation)이 전개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이전에 쓴 글을 읽은 독자라면 이것이 바로 〈STAIRS〉라는 것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고위공직자들의 역량을 진단할 때 알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STAIRS〉를 통해서 고위공직자가 직무의 본질에 충실하면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지 예측할 수 있다.
▶ 역량진단을 위한 훈련과정에서 겪은 자기인식의 경험
1980년대 말, 역량개념과 역량사전, 역량모형과 역량진단방법론을 연구하고 훈련받으면서 비로소 내가 나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내 욕망은 무엇인지, 나아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그 상황에서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점차 명확해졌다. 내가 나의 욕망과 역량의 모습을 알게 되자, 내 주변의 여러 사람들의 모습도 이전과는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내 육체는 많은 학습량에 시달렸으나 고양된 내 정신은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책 읽고 글 쓰고 음악 듣고 아무리 혼자 있어도 전혀 외롭지 않다. 수줍고, 내성적이고, 대인관계 서툴고, 어떤 일에 직면했을 때 늘 노심초사하고, 사회적 불평등이나 불합리한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때로는 분노한다. 한때 소설가나 시인이 되고 싶었고,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타임지를 가방에 넣고 다니던 시절엔 영문학자가 되는 것도 꿈꿨다. 그런데 지금은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은 언제나 나를 짓누르고 있다.
궁핍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코지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라고, 타인과의 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갈등이 생기면 내가 손해 보는 쪽을 택하고 싶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한다. 분쟁이나 갈등 상황에서는 빨리 벗어나고 싶다. 나아가 시민단체에 조금씩이라도 후원할 수 있는 정도의 경제적 여유를 갖고 싶다. 누구나 이런 정도의 삶을 소망하지 않는가. 나는 그런 사람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나의 역량프로파일을 알고 난 후, 내가 품었던 커다란 욕망은 탐욕의 단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내 욕망을 나의 역량수준에 맞도록 조절해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거듭나는 느낌이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고 싶어 하면서 무엇을 해도 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것을 자기인식(self-awareness)이라고 부른다. 내가 누구인지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이것이 내 몸에서 작동하는 이성의 기능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놀랍게도 칸트는 이러한 이성의 기능이 인류 보편적 현상이라는 점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성의 기능을 포기하도록 하는 계급주의적 명령과 통제, 억압과 착취 속에서 살아간다.
그럼에도 나는 이성의 기능이 작동하는 자율적인 인간이 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싼 환경조건이 나를 독립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주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누군가로부터 지시와 명령을 받아서 움직이는 존재로 살아야 했지만, 독일에선 아무도 나에게 명령하거나 통제하지 않았다. 내가 내 몸을 잘 추스르면 됐다. 나 혼자 스스로 일하되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 일에 대해서는 그들과 협력해서 일하면 됐다.
석사와 박사학위를 마치자 고민이 생겼다. 독일에 남을지 아니면 귀국해서 한국은행에 복귀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아이들은 독일어가 모국어로 변했고, 나는 한국에서 가끔 오는 지인들은 한국어를 대단히 빠르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독일사회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을 방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귀국하면 다시 계급적 명령과 통제로 움직이는 사회에 적응해야 한다. 합리적 언어가 통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 어찌할 것인가? 내가 한국식 직장생활을 하면서 두 가지를 결심했다.
첫째, 모든 사람들을 수평적으로 공정하게 대우한다. 즉 모든 사람을 독립된 자율적 주체로 인정한다. 기득권자들의 권위주의적 태도는 인정하지 않는다. 나 자신에게는 기득권자들의 자기기만적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
둘째, 누구와도 분쟁하거나 갈등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길 것 같으면 먼저 양보하거나 피한다. 그럴 수 없는 경우라면 내가 손해를 보고 그 상황을 종결짓는다.
이것은 내 자율성과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원칙 같은 것이었다. 지금까지 사회생활에서 이 원칙이 지켜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때때로 분노했고 때때로 절망했다. 직장에서 나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물론 앞으로는 이 원칙이 사용될 기회도 없을 테지만, 아무튼 앞으로도 이 원칙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 자, 지금까지의 얘기를 정리해보자.
이전 글에서 도구적 역량의 핵심이 도구상자(toolbox)를 이용한 사실발견(fact finding)이었듯이, 추상화 역량의 핵심은 자기인식(自己認識)이다. 여기서 이성(理性)의 기능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자기 내면의 타고난 성향에 비추어 환경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재능(도구들)을 어디에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아는 능력이 자기인식이다. 반복하거니와, 타고난 다양한 재능 중에서 꼭 필요한 재능들을 취사선택하여 활용하는 재능이 곧 추상화 역량이다.
그러므로 자기인식이 결핍되면 자신의 재능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경우 욕망이 역량수준을 넘어 탐욕의 단계로 나아가고 결국은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큰 해악을 끼친다. 탐욕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내적 작용이 곧 이성의 기능이고 이것은 추상화 역량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에 보편적으로 주어진 이성(理性)은 각자 독립된 자율적 주체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하도록 한다. 이러한 이성적 반성과 성찰이 곧 자기인식(self-awareness)이다.
도구적 역량, 즉 훌륭한 도구상자(toolbox)를 가지고 태어났더라도 그 도구들을 어디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느냐의 이슈는 전적으로 추상화 역량의 핵심전제인 자기인식 능력에 좌우된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타고난 도구적 재능들은 전적으로 이성적 반성과 성찰에 달려있다.
▶ 안철수, 나경원, 금태섭, 이낙연, 박영선, 김진표의 경우
나는 왜 이 사람들을 지목했을까? 이 사람들은 언론에 비교적 많이 노출된 것뿐이다. 우리 정치판의 상당수가 《성취예측모형》의 기준으로 볼 때, 자기인식이 부족하여 도구적 재능을 잘못 활용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왜 그럴까? 이 사람들의 과거 행적을 잘 살펴보면 알게 될 것이다.
글이 길어졌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자기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독자들 스스로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자기인식 능력의 결핍여부를 진단하려면 어떤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는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자.
오늘은 여기까지. 쓰다 보니까 또 길어졌는데 아직 가장 중요한 본론을 다루지 못했다. 나도 점점 지쳐가고.
2021.02.21.,23:57 오타와 비문은 내일 수정보완 예정.
2021.02.22.,10:54 수정 보완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