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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석 Sep 17. 2023

크리스천(기독교인, Christian)

[크리스천(기독교인, Christian)이라는 개념에 대하여(5)]

[이 글은 나의 페이스북에다 2019년 2월 3일 쓴 다섯 번째 글입니다]


내가 예수 사후의 예수운동, 즉 초기 기독교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늘날 한국기독교가 왜 이렇게 부정부패에 찌들었는지 그 근원을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의 비합리적이고도 몰상식한 현상은 어느 날 갑자기 드러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근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980년대 후반 독일 유학 중, 나는 학문하는 자세를 훈련받았다. 그중 하나가 질문에 관한 것이었다. 지도교수는 제자들에게 항상 “왜 그런지 질문하라. 그리고 그 질문에 합리적인 대답을 스스로 찾아보라. 질문하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라고 요구했다. 우리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서로 열심히 질문해대곤 했다. 나는 뭔가 좀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게 있으면 거의 습관적으로 이게 왜 이렇게 됐지? 하고 묻는다.


한국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왜 이렇게 됐지? 주말이 되면, 그 근원을 찾아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과 만난다. 초기 예수운동과 기독교를 발굴해 낸 위대한 역사학자와 신학자, 그리고 성서학자들과 만난다. 나에겐 이 시간이 매우 즐겁고 은혜롭다. 오늘은 역사학자 일레인 페이걸스(Elaine Pagels, 1943~)가 쓴 글에서 큰 은혜를 받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 121~180)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스토아학파나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도덕적 평등주의보다는 황제의 권력에 대한 공식적인 선전을 더 선호했을 것이다. 인간 개개인을 계급, 가족, 부, 교육, 성별, 신분에 의해 서열화하는 사회에서는, 기독교가 전파하는 메시지가 통제할 수 없는 폭발력을 발휘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로마제국의 수도에 거주하는 주민의 75%는 법률에 따라 인적 자산으로 분류되는 노예들이거나 노예의 자손들이었다. 노예는 주인의 혹사, 잦은 폭력, 성욕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불만을 해소할 마땅한 수단도 없었고, 정당한 결혼과 같은 기본적인 권리조차도 인정받지 못했다... 유스티누스(Justinus, AD?~165)는 자신이 쓴 《기독교인에 대한 변호》에서 “여자아이들은 물론 남자아이들도” 아동매춘이라는 돈벌이가 잘되는 장사 밑천으로서 “소, 염소 혹은 양 떼”처럼 사육되는 일이 흔히 벌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가난한 자들의 움막이나 노예들의 처소를 돌아다니며 도움의 손길과 돈을 나눠주었고, 가난한 사람들, 무지한 사람들, 노예, 여성, 외국인들에게 좋은 소식, 즉 복음을 전했다. 이들이 전한 복음이란, 계급과 교육과 성별과 신분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인간은 유일신 하나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황제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 일레인 페이걸스(《아담, 이브, 뱀》, 아우라 2009, 112~113쪽)


『기독교 철학자 유스티누스는 기독교인을 변호하기 위해 아우렐리우스 가문의 황제들에게 쓴 편지에서, 기독교인은 섹스, 돈, 인종문제에서 태도와 행동이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비도덕적인 쾌락에 빠져 향락적인 삶을 살던 우리들이 이제 순결한 삶에 전념하고, 재물과 재산의 획득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우리들이 이제 각자의 소유물을 공동의 자산으로 바꾸어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서로를 미워하고 파괴하며 다른 인종과 함께 살기를 거부하던 우리들이 이제 그들과 친밀하게 살아간다.”


유스티누스가 자랑한 기독교인의 행동, 즉 성적 자기 절제, 자신의 재화를 궁핍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모든 인종의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은 성적 학대와 금전적 착취와 궁핍과 인종적 혐오에 시달리던 사람들(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민, 시민권을 얻지 못한 사람들, 노예들, 로마세계에서 멸시당하고 버림받던 사람들)에게 깊이 파고들어 그들을 감동시켰다. 기독교를 불온시하던 로마 관리들도 있었지만, 조직체의 꾸준한 발전을 통해 강화된 기독교 운동은 성장을 거듭해 나갔다.』 - 일레인 페이걸스(《아담, 이브, 뱀》, 아우라 2009, 125~126쪽)


놀랍지 않은가? 2천 년 전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던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너무나 생생하지 않은가? 얼마나 감동적인가? 황제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사자의 밥이 되거나 참수형을 당하는 온갖 핍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이 감동적인 예수운동(Jesus Movement)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진정으로 ‘나는 곧 그리스도’(Ich bin Christ)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들의 삶과 오늘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기독교인들의 삶을 비교하면, 우리는 지금 뭔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목사들은 이런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가?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고 출세할 것인가에 혈안이 된 교인들에게 그들의 욕망에 부합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이고 잘못 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던 초창기의 위대한 예수운동으로 이루어진 여러 공동체들이 있었다. 이들은 세속적인 황제권력의 핍박을 온몸으로 극복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공동체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기독교는 그 내부의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공동체들 간의 기득권 싸움이었다. 몇몇 기득권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사고틀에 욱여넣으면서 예수의 동정녀탄생론과 신성론, 삼위일체론, 원죄론, 세례론, 부활론, 재림론 등과 같은 각종 교리들을 만들어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만이 진리이며 다른 공동체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사건들이 수없이 벌어졌다. 이런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나왔겠는가? 그들의 논리 중에는, 오늘날의 시각으로도 탁월한 사상이 있긴 하지만, 아담의 죄가 섹스를 통해 자손으로 전달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는 사상도 있었는데, 이게 오늘날까지 현대인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평화롭게 예수운동에 몰입하던 많은 공동체들은 이런 멍청하기 짝이 없는 교리에 대한 이견 때문에 서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고 이단시했다. 이 골 때리는 싸움에서 과연 누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겠는가? 4세기 초가 되자 로마황제는, 이때까지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예수운동이라며 탄압하던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모든 핍박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주교들에 대한 세속적 우대와 재정지원까지 받게 된 기독교는 이제 승승장구하는 일만 남았다. 세속권력인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야합한 교리들이 승리를 거두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렇게 하나의 ‘보편적인 기독교’(Catholic Christianity)는 제도적 교회로 전환되었다. 


결국 예수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희석되거나 변질되었고, 기독교는 세속권력에 의지하여 별 의미도 없는 교리들이 제도화된 교회를 주도하면서 로마제국으로 편입되었다. 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남은 것은 기독교뿐이었고, 온갖 교리로 무장한 기독교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속권력까지 장악하게 되자, 중세는 암흑시대로 변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흥미진진한 내용들을 상세히 알고자 하면 이에 관한 문헌과 자료들을 찾아보면 된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샤머니즘의 종교적 요소가 뼛속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성서와 기독교의 진실한 역사이해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벌 받는다나 어쩐다나. 야비하거나 무식한 목사들은 사탄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기독교의 삐뚤어진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니 역사를 통해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한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여! 성서의 제작과정과 기독교 형성에 관한 역사공부를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라. 진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오직 예수의 가르침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배웠던 장로교의 복음주의적(=근본주의적) 성서해석이라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깨달았을 때, 오히려 내 신앙심은 더욱 깊어졌다. 초기 예수운동으로 나타난 공동체들이 바로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들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그러면 그렇지. 예수가 그렇게 가르쳤을 리가 없지.’라는 깨달음이었다. 나는 나를 옥죄고 있던 멍청하기 짝이 없는 기독교 교리체계로부터 해방되었다. 자유를 찾은 것이다.


오늘날 국정농단과 사법농단이라는 적폐세력이 우리의 자유와 존엄성을 유린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가치를 지키면서 살고자 로마제국의 잘못된 통치에 맨몸으로 저항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사회를 망치고 있는 저 기득권층의 적폐세력으로부터 우리의 자유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아침에 드리는 나의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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