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기독교인, Christian)이라는 개념에 대하여(4)]
[이 글은 나의 페이스북에다 2019년 1월 19일 쓴 네 번째 글입니다]
나는 소위 복음주의(=근본주의)의 ‘한국적 기독교’를 철저하게 믿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한국적 민주주의’가 민중을 속이는 거짓이듯이 ‘한국적 기독교’ 또한 신도들을 속이는 거짓이었음을 독일에서 알게 되었다. (이걸 말로 하자면 며칠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내 젊은 시절, 언젠가 로마서 주석이나 강해를 써보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이것은 유학시절 더욱 강렬해졌다. 독일사회를 관찰하고 경험하면서 한국기독교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귀국 후에는 경영실무에 종사하느라, 뭐 정확히 말하자면 처자식을 먹여 살리느라 엄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은퇴 후 요즘은 에너지를 부쩍 성서에 쏟고 있다.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시간이 날 때마다 성경을 펼쳐보게 된다.
기독교는 명과 암이 아주 분명한 역사를 가진 종교다. 로마서를 포함한 바울 서신들에 근거하여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를 신화(神化)하였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의 명암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예수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는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이론을 정립하여 개척교회들에게 여러 서신을 보냈다. 당시 바울의 서신을 접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던 활동가들이었다. 그들에겐 바울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예수의 일생을 기록하여 공유할 필요가 있었다. 복음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왜냐하면, 예수 사후 한 세대가 훨씬 지난 후, 그러니까 AD 70년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후 망연자실해 있던 민중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이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신학이론은 니케아 공의회(AD 325년)에서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게끔 만들었다. 결국, 역사적 실존 인물인 예수를 신(神)으로 승화시킨 아타나시우스파의 승리로 끝났다. 기독교의 초대교부들은 이렇게 예수를 신으로 만들었고, 그 후 중세시대 내내 신의 이름으로 엄청난 짓을 저질러 왔다.
나도 회사에서 실무를 할 때 무수한 문서를 만들었다. 회사가 나아갈 방향과 비전, 전략, 실행지침과 같은 문서들을 생산했다. 물론 혼자서 만든 것도 있지만, 다 같이 논의하고 합의하여 만든 문서도 많다.
돌이켜 보면, 한은 재직시절 추진했던 조직개혁 작업과 관련된 문서를 20년이 지난 지금 나 자신도 왜 그런 문장을 썼는지 그때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임원들은 어떤 생각을 했으며 직원들의 다수는 무엇을 원했는지 세세히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논의의 결론만 담겨있는 문서로 비추어 보면 당시로서는 그런 문장이 최선이었을 텐데, 지금은 그 이유가 어사무사하다. 요즘 생각하면, 조직개혁 작업을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쉬움이 쌓이는 것, 그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싶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것이다. 성서의 문서들은 그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반영하는 시대적 배경과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초대교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완전히 엉뚱하게 해석할 수 있다. 이해관계에 따라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교부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문서를 해석할 수도 있다. 어차피 이단을 심판하는 결정권자들은 힘이 있는 교부들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 똑같다.
심지어 AD 4세기에도 200~300년 전에 기록된 문서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 헷갈리는 판에, 요즘 요한계시록 같은 문서는 어떻겠는가? 당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여러 상징들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종말의 날짜를 제시하는 미친놈들이 가끔 생기고, 그런 놈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많이 생기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그 문서가 만들어졌을 때의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지 않고는 어떤 문서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성서는 중세라는 어두운 시대를 거치면서 제대로 검토될 수 없었다. 계몽시대 이후 겨우 문헌학적인 검토와 시대적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성서의 의미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19세기에 와서야 독일 신학자들, 성서학자들, 고고학자들에 의해 AD 1세기~4세기의 상황을 과학적으로 파악하고 성서의 여러 문서들을 본격적으로 분석하여 그 의미를 하나씩 이해하게 되었다. 중세의 교부들이 해석한 성서와는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온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한국적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학문적으로 분석하면 안 되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은혜가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지금도 '태양은 여전히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는 믿음을 굳건히 하시라고. 바로 그런 잘못된 믿음과 잘못된 목사들의 가르침 때문에 한국기독교가 이 지경까지 왔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가 저토록 부패한 것은 성서가 가르치려고 했던 본래의 의미를 전혀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특히 루터나 칼뱅의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로마서의 핵심주제부터 오해했기 때문이다.
당시 바울은 왜 믿음과 부활을 그렇게 강조할 수밖에 없었나? 예수 자신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으나 성서의 저자들은 왜 예수가 부활했다고 그리고 재림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나? 그렇다면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믿음의 대상은 무엇이며, 믿음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구원인가? 그렇다면 구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으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무엇을 위한 구원이란 말인가? 그런 구원의 방법과 수단은 무엇인가?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질문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 독일 신학자들이 노력하여 얻어낸 엄밀한 학문적 성과에 근거하고 있는 나의 신앙은 여전히 크리스천(기독교인, Christian)이라고 말하는 데 흔들림이 없다.
한국의 개신교 목사들, 특히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하는 말의 대부분은 예수의 말씀과 성서에 근거한 신앙이 아니라, 덮어놓고 무턱대고 생각없이 믿는 미신에 가깝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맹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