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제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별거 아닌 "변증법"을 헤겔, 마르크스 등과 같은 양반들이 철학적으로 어렵게 설명하는 바람에 뭐 대단한 철학이나 사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대학의 철학과에서도 그렇게 가르치는 것 같다. 그러나 변증법은 대화와 토론의 스킬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학교에서조차 대화와 토론의 기술인 변증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로지 성적으로 경쟁하는 요령만 가르치고 있다. SNS에서도 대화와 토론의 기본상식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 이유는 제대로 배울 것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 비판과 반대 비판이 서로 오고 가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생각이 발전할 뿐만 아니라 정교하고도 새로운 개념들이 창의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비판을 할 때는 반드시 상대방 주장을 포괄하면서 그 주장을 근거로 비판적 논지를 펼쳐야 한다.
우선 테제(주장, These)가 있어야 한다. 우리 주변의 온갖 것들이 다 테제가 될 수 있다. 어떤 테제, 즉 주장을 비판하는 사람은 당연히 안티테제(반대 주장, Antithese)를 구성해야 한다. 여기서 안티테제는 테제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그런데, 안티테제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가끔 테제와 상관없는 주장을 막무가내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변증법의 기본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생떼'를 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보자. IS에 의한 국제적 무장테러의 위협이 커지고 있고, 북한의 로켓 발사 등과 같은 엄중한 사태가 발생했다. 이것이 하나의 테제로서 우리 앞에 주어졌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박근혜 정부는 테러방지법을 국회에 상정했다. 이러한 안티테제는 반드시 테제에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한다. 즉, IS의 위협과 북한의 로켓 발사 행위가 남한에 대한 테러행위와 어떤 인과관계 또는 상관관계가 있는지 설명되어야 한다. (물론 그 로켓이 인공위성이냐 미사일이냐의 논쟁에서 어떤 경우도 미사일은 아닌 것이 명백해졌다. 향후 로켓에다 미사일을 장착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데 테러방지법은 그런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IS 행태나 북한의 로켓 발사가 테러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뿐이다. 이런 주장은 대화나 토론을 성립시키지 않는다. IS가 남한에 대해 테러를 저지를 어떤 연계고리도 발견할 수 없으며, 북한의 남한에 대한 미사일 공격은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지 테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강화하자는 법안을 제출했다면 그나마 변증법적 타당성을 갖기 때문에 대화와 토론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정보기관에다 권력을 더 강화시켜주어야 하는 법안은 어떤 합리성도 갖지 못한다. 그것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정부 시절에 정적을 암살하거나 납치하고, 민간인을 사찰하고, 간첩을 조작하고, 선거에 개입하고, 인권을 유린해온 정보기관에다 더 큰 권력을 주겠다니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생떼를 쓰고 있는 셈이다. 박근혜와 새누리당 사람들을 보면, 변증법적 대화와 토론의 기술을 전혀 익히지 못한, 아주 수준 이하의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그저 자신들의 개인적 욕심을 채우려고 좌충우돌 생떼를 쓰고 있는 갓난애처럼 보인다.
이런 생떼를 막기 위해 야당은 필리버스터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안쓰럽고 답답하고... 필리버스터를 처음 경험하는 이들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국면을 보면서 신기해하기도 한다. 말이 난 김에 필리버스터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것은 다수당의 횡포를 막기 위해 소수당이 법안 통과를 방해하도록 하는 합법적인 장치다. 이 제도는 다수제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영미권에서 통용되는 방식이다.
독일, 스위스 등과 같은 합의제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필리버스터가 사실상 필요하지 않다. 국가의 주요한 정책결정을 다수의견에 따라 밀어붙이지 않고 소수의견이라도 모두 수렴하여 합의될 때까지 대화와 토론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 핵발전소를 2022년까지 전면 폐기하기로 연방의회에서 2011년에 결정했다. 이런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대화하고 토론하는 기간이 25년이나 걸렸다. 합의제 민주주의가 느린 의사결정 때문에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있지만, 나는 합의하는 것만큼 합리적인 제도는 없다고 생각한다.
합의한다는 것은 테제에 대한 안티테제를 제안하고 이 테제와 안티테제를 놓고 끊임없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테제와 안티테제를 포괄하는 완전히 새로운 합의안, 즉 신테제(Synthese)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신테제는 매우 창조적인 해결책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독일 핵발전소 예를 들어보자. 25년간 테제와 안티테제를 가지고 갑론을박을 해왔다(참고로 독일 녹색당의 핵발전소 전면 폐기 주장과 달리, 보수당인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물리학 박사 출신으로서 핵발전소를 계속 가동하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오랜 기간 대화와 토론을 해왔지만 합의안(Synthese)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터지고 말았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일본에서조차 핵발전소를 제어하지 못하고 재앙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그러자 독일 정치인들은 완전히 새로운 합의안을 창조적으로 만들어냈다. 바로 신재생에너지 기술을 발전시켜서 핵발전소를 대체하기로 한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완전히 새로운 창조적인 대안을 신테제로 만들어낸 것이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핵발전소를 포기하는 대가로 독일의 신재생에너지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을 확보했다. 이에 따른 새로운 일자리도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헤겔이 말한 변증법적 역사발전의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대화와 토론을 통한 합의제 민주주의는 합리적이고도 창조적인 사회를 만들어간다.
영미식 다수제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다수에 의한 폭정이 열려있기 때문에 매우 불안한 민주주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다수당의 폭정을 필리버스터라는 희한한 제도로 견제하고 있을 뿐,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면 필리버스터 제도도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서유럽 국가들의 대부분이 채택하고 있는 "합의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