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은비 Apr 05. 2023

어쨌든 무릎이 깨졌다는 건 사랑했다는 뜻이다.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_안희연시인 / 난다출판사

얼마 전 난다출판사의 인스타를 보다가,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읽게 된 책이 있다. 안희연 시인의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라는 책이었는데, 천천히 넘기던 책의 문장이 뇌리에 꽂혀버렸다.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를 보여주는 지표. 어쨌든 무릎이 깨졌다는 건 사랑했다는 뜻이다.(p157)



안희연시인의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中  / 난다출판사


보자마자 엉엉 울었다. 내 무릎에 닿아있는 밴드. 밴드 위로 스며든 붉은색의 피. 잘 멈추지도 않을 만큼 깊게  파인 상처 앞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했는가 싶었다. 사랑이 아닌 줄 알았던 일이, 사랑으로 치환되는 순간, 나는 애써 다잡고 있던 마음들을 와르르 쏟아냈다. 슬펐다. 애통했다. 그토록 노력했는데, 내가 사랑받지 못해서 슬펐고 아무렇지 않길 바랐던 내 마음이 아무렇지 못해서 속이 상했다.


사랑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 애초에 나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되려 이것은 좋아하는 감정이야. 혹은 사랑에 빠지기 직전의 순간이야. 등의 말들로 애써 눈을 가리고 덮어두려 했던 것 같다. 이미 나 스스로도 직감으로 알고 있었던 감정이었다. '그 사람을 좋아해야만 해. 왜냐면 그 사람은 요즘 구하기 어려운 조건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거든. 잘 되면 내가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일을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이번 기회는 놓치지 않았으면 해.' 하는 마음들이 더 컸다. 정말 그 사람의 존재만으로 사랑할 수 있는지 여부는 사실 별로 중요했던 게 아니었다. 누가보아도 내가 가지고 이뤄낸 게 많았고, 더 멋지고 건강한 사람으로 보였을 텐데 그 모든 걸 내려놓게 했다. 그러니 가짜 사랑이라 칭할 수 있는 약간의 호감만으로 이 관계를 시작해 볼 수 있었겠다. 단지 그토록 바라던 조건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 관계가 막상 이루어지지 않은걸 보고 있자니, 나는 분노에 휩싸인다. 사랑이라고 부르기에 모호한 감정들이 종결된 것뿐인데, 왜라는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다.'왜 아니었지?', '나는 어디가 별로인 사람인가?', '나는 생각보다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사람인데?', '그 여자보다 내가 더 났지 않나?' 등등 오만한 생각들이 오만가지 든다. 분노와 슬픔이 자꾸 공존한다.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인걸 알면서도, 내가 얻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인지 불안인지 슬픔인지 모를 응어리들이 가슴에 새겨졌다. 내가 목을 멜만큼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었는데, 단지 조건의 부합성 외엔 볼 것이 없었는데, 왜 그랬나를 자꾸 따지게 된다.


밤마다 취한 나를 찾아와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일에 감동을 받았다가, 대화를 하면서 잘 들어주는 그 사람을 보며 더 나은 방향성을 추구했다. 그러다 관계의 종결을 맞고, 다시 내 모습을 되돌아보았을 때 내가 취해서 보인 행동들이라던가, 상황이 여의치 않아 부득이하게 겪지 말아야 할 일들을 겪었던걸 털어놓던 순간들을 보인게 슬퍼졌다. 과거의 내가 싫어하던 행동을 나는 거침없이 누군가에게 보였구나. 지난날의 나는 취한 남자친구들의 모습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그러고 있구나. 그럼 L군도 그런 마음이었겠구나 했다. 사실 변명을 좀 하자면, 하루종일 참아내다가 벅찬 감정에 휩쓸려 음주를 하게 된 것이다. 나 딴엔 더 이상 다가갈 용기가 없어서 취하고 나서야 가능했던 대화들이었는데, 그 밤의 대화들이 노력이란 이름하에 아름답지 못하게 보였겠구나 하게 된다. 늘 제정신은 언제나 뒤늦게 드는 법이지만.


그러니까 이 사랑의 주체와 목적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부터 끝이 나는 나르시시즘에 가까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이 감정들은 사랑이라기보다, 상대방이 누구든 간에, 나 스스로가 지리멸렬하도록 볼품없어 보이는 모습이 불편하고 불안하고 초조해서 분노를 채워낸 것 같다. 그것을 애써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을 했으나, 그것은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창피할 정도니까. 내가 나로서 존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반하여 말할 수 있는 일. 사랑이란 탈을 쓰고 쪽팔림을 걷어내고 싶어 하는 마음. 뭐 그런 것들이었겠다.


그러니까 이 무릎의 상처는 나 스스로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생겨난 일을 반증하는 일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나 스스로를 가장 믿지 못하고 나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물어야 했다. 우리의 사랑이 아닌, 나의 사랑에 대한 마음을 더 다잡아야 했다. 그 사랑이 완벽해야, 다음번 사랑이 무리가 없을 테니까.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실존하는 현재로 바꿔내며 더 애틋한 사랑을 해볼 수 있을 테니까. 


다음번 사랑은 꼭 사랑이 그저 사랑일 수 있게 하리라.

 


매거진의 이전글 오지 않을 연락을 기다립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