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을 읽고 평을 해주시는 멘토가 책 리뷰이지만 글쓴이의 삶이나 사회 현상을 빗대어 쓰면 그것이 인문학적 글쓰기가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 얘기를 사실 두 번째 듣는데, 도무지 나는 그렇게 쓸 자신이 없다. 나라는 사람이 사회 현상에 그리 관심을 두는 것도 아니고, 나는 강원도, 소도시에 국한된 일상 뿐이라 에피소드랄 것도 없다. 삶의 고통이나 고민을 빗대어 쓸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 정도로 나를 내 글에 담기는 싫다. 그래서 에세이보다 소설을 더 좋아하고 찾아 읽는다. 멘토인 작가님은 에세이를 여러 권을 쓰고 출판한 전문 작가이고 그래서 이 브런치 플랫폼에 잘 맞는 글을 쓰도록 권한다. 인문학적 글을 쓰지 않더라도 내밀한 나의 감성을 몇 자 적어서 브런치 라이킷을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내 감성을 소진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내가 복잡한 심정을 견뎌내서 감성이 더 응축된 글로 쓸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소설이다.
오늘은 내가 한국에 출판된 모든 책을 며칠 전에 한꺼번에 구매한 작가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에 대해 생각해본다. 요즘 계속 이 작가에 대해서 생각하며 알아보고 있다. 유튜브 동영상에서 인터뷰도 찾아보고, 어제는 미셸이 쓴 첫 장편소설을 읽었다. 그렇게 해서 알아낸 나의 인상은 미셸 우엘벡이라는 작가가 지닌 시선이다. 이 작가는 분명 매우 순수한 감성으로 사회를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거칠고 예리하게 현대인의 삶을 냉소적으로 써 내려간다. '피식'하고 웃는 미셸의 얼굴 표정처럼 소설은 묘하게 매력이 있다. 만약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을 영화로 연출한다면 병약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배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 복잡한 내면을 얼굴에 담으려면 메소드 연기가 아니라 냉정한 자제력이 더 필요할 것이다.
작가 미셸 우엘벡은 굉장히 수위가 높은 성관계를 '소립자'에서 보여줬고, 그의 첫 장편인 '투쟁 영역의 확장'은 이제 막 눈을 뜬 젊은 작가가 보는 인간, 현대인을 그리고 있다. 그 현대인은 매우 개인적인 한 명일 뿐이다. 아무와도 소통을 못하는 실패자이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은 뭔가가 새롭게 다가올 것만 같다. 그런 느낌의 결말은 '소립자'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첫 장편을 읽으며, 이 장편소설이 우리나라에서라면 출판이 될 수 있었을까 싶다. 소설은 딱히 사건이 없고, 주인공이 겪는 일상, 그 속에서 변하는 주인공 마음이 자세하게 그려진다. 또 미셸 우엘벡은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매우 냉소적인데 나는 그런 그의 견해에 공감한다. '소립자', '투쟁 영역의 확장' 두 소설 모두에서 그가 보는 여성들은 내가 보기에도 문제가 있다. 나도 과하다 싶은 여성들의 페미니즘 운동이 싫다. 나는 여성이 지닌 남성성과 여성성을 함께 갖고 가려면 집단으로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매우 개인주의적으로 자신을 찾는 것이 더 지혜롭지 않을까 생각한다.-위험 발언인가요.-
미셸 우엘벡의 장편소설 두 작품을 읽고 섣부른 결론일지 모르지만, 나는 미셸이라는 작가가 갖고 있는 '자연'에 대한 태도가 매우 인상 깊다. 그가 자연 속에서 얼마나 위로와 영감을 받는지 알 것 같다. 그런 자세는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덕목인 것 같다. 그의 다른 소설책이 네 권이 있는데, 나는 소설 속 주인공이 또 어디에서 자연을 만날지 매우 설렌다.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매우 어리석고 욕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소통을 못하는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나는 그런 주인공이 자연 속에서 시간을 거스르는 아름다운 순간을 만나는 것을 독자로서 매우 황홀하게 만끽한다. 그의 소설에는 매우 다양한 관점이 녹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 사회, 성과 사랑, 현대인의 정신질환, 여성과 남성 사이의 불통, 개개인의 심리 등등 아주 다양한 소재를 다 끌고 들어와서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 바로 '자연'임을 은근히 강조하는 것 같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비참한 상황에 맞닥뜨리는 주인공에 지쳐서 놓쳐버릴지도 모르지만, 다시 읽어보면 현대인이 쉴 곳은 'Mother of Nature'임을 조용히 아주 조용히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페미니즘'에 대해 그렇게도 냉소적일까. 그건 그에게 물을 게 아니라 페미니스트의 목소리가 균형을 찾지 못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이를 키우고 시간을 보내는 이는 그동안 대부분 엄마인 여성이 해냈다. 남성이 가정에 참여하는 것은 얼마 안 되었고, 남성은 사회에서, 직장에서 남성들과 경쟁하며 돈을 벌었다. 그리고 현재 21세기에는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아이를 키우지 않는 부부도 늘어나고, 비혼을 주장하기도 한다. 내 말은 페미니스트가 싫어하는 남성은 이제 점점 바뀌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에 발맞추어 페미니스트도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작가는 페미니즘에 대해 바른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페미니스트도 잘못 판단하고, 선택한다는 말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미셸 우엘벡은 다소 보수적인 시선으로 여성을 본다. 여성이 자유롭게 패션 연출을 하거나 원나잇 스탠드를 하는 것에 대해 소설 속 주인공의 시선을 빌어서 매우 어리석다고 본다. 나 역시 선택과 욕망을 잘 조절해야 함을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욕망을 채우기만 한다면 분명 중요한 순간에 비워내기가 매우 힘들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런 욕망이 나의 순수한 욕망이 아니라 남의 욕망을 보고 답습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바인가를 생각해내기조차 힘들게 현대사회는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기 힘들며 혼자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다.
미셸 우엘벡의 소설을 읽어볼 필요가 있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현대인을 알고 싶다면 한 번 읽기를 권한다. 한 번 읽고 다시 읽기도 권한다. 다시 읽으면 아마 미셸 우엘벡이 보여주는 자연의 신비가 물방울이 똑똑똑 머리 위에 떨어지는 것처럼 독자인 당신을 정신 차리게 할 것이다. 서구 사회와 동양 사회의 발전, 그로 인한 사회 현상은 시간차를 둔다. 그 시간차 동안에 벌어지는 사회 현상을 분명히 알려면 무엇보다 소설이 좋지 않을까 싶다. 소설은 허구이다. 하지만 허구의 배경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작가가 겪는 공간이고 사람 관계이다.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은 섬세하고 냉정한 자아를 소설 주인공에 투영시켜서 그 주인공이 어떻게 대부분의 서양인들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주인공이 변화를 겪는지 세밀하게 보여준다. 툭 던져진 일상이지만 그 시간과 장소는 주인공에 의해 문제제기가 되고 주인공은 그 문제를 떠안고 괴로워하며 마지막을 향해 간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다다른 장소는 어느 해안 절벽이거나 깊은 숲 속이다. 난데없이 자연 속으로 숨어버린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만큼 도시 사회는 더 이상 주인공을 쉬게 해주지 못한다. 작가 미셸 우엘벡은 비열한 도시를 떠나서 거대한 자연 속으로 몸을 숨긴다. 자연은 그의 여리고 순수한 감성을 다 받아주는 곳이다. 키티 구구는 그의 소설 속 자연으로 들어가 숨을 쉰다. 아름다운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