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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티 구구 Feb 28. 2021


소립자 The Elementary Particles

미셸 우엘벡       열린 책들

 작년에 밀리의 서재에서 김영하의 북클럽 소개로 읽은 장편소설. 전자책으로 읽느라 놓친 부분이 많았다는 걸 다시 읽으면서 알게 됐다. 이번에는 전자책과 종이책을 오가며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 쓴 리뷰는 아름다운 부분만 애써 기억해 썼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읽으니 서구의 몰락, 종교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갈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현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한 성문란, 그리고 형제의 막다른 길, 이 정도로 이 긴 소설을 이야기할 수 있다. 여성보다 남성에 더 중점을 둔 이야기라는 점에서 반발할 여지가 있을지 몰라도, 그렇게 썼기 때문에 현대의 비극과 그 비극을 뚫고 지나갈 새로운 인간 종이 탄생되어야 할 의의가 분명해지기도 한다. 


 크게 3부로 나눠진 소설은 2부에서 두 형제 주인공 브뤼노와 미셸이 겪는 섹스를 지독하게 그려놓았다. 그 배경은 비트족, 히피, 뉴 에이지까지 서양에서 일어난 젊은이의 이상향에 있다. 결국 동양과 아프리카의 문명을 받아들이며 그걸 성행위로 풀어내는 것은 당시 서구 사회에 자본이 몰려있기 때문인 것 같다. 거대 자본이 휩쓸면서 살기 좋아진 중상위층 사람들이 남는 시간에 성에 집착하는 것이다. 아마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섹스일지 모르지만 벗어나기는커녕 전 세계의 성이 다 뒤섞이는 것 같은 분위기이다. 그리고 여성들은 너무 자유로워서 문란한 성관계 후에 임신중절 수술을 선택한다. 다수가 선택한 새로운 몸과 정신이 많은 남자와 여자를 휩쓸고 지나가며 안정되고 쾌적한 20세기에 성관계가 퇴행한다. 질서 없는 성관계는 당시 의학 발달로 임신 후 출산이라는 증거를 남기지 않지만, 그것을 자유라고 보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지 이 소설은 깊게 파고든다. 이런 나의 견해는 미셸을 사랑한 아나벨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나벨은 미셸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아나벨은 허기진 사랑을 자유롭게 육체적 사랑을 하는 남자들에게서 얻으려고 하지만, 두 번의 임신 중절 수술을 겪고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녀는 미셸을, 아이를, 가정을 원했는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성관계는 쾌락이라고 부르기에는 원시적인 면이 많다고 느껴지는데 뉴 에이지가 동양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한국에 사는 나로서는 동양을 빌미로 서양이 종교를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같다. 천주교를 믿는 프랑스인 대다수가 그렇다. 다들 나는 안 그랬소라고 하더라도 이미 문화 전반에 성을 위한 성은 차고도 넘쳐났다. 3부에서 미셸이 켈즈 서를 보고 영감을 얻는다는 부분에서 작가 미셸 우엘벡은 중세와 근대를 거쳐 현대에 온 서양 문명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단지 외골수인 천재 미셸만이 찾았다는 걸로 그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다. 분명 서양 종교에서 말하는 이상향은 분명히 전해져 오고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동양, 지금의 한국은 어떨까. 별다른 바가 없는 것 같다. 


 이미 서양과 동양은 섞여버려서 서로가 바라는 이상향을 잘못짚고 있다. 그런 이상향은 없다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형제를 통해 보여주려는 바는 무엇일까. 브뤼노는 문과를 미셸은 이과를 전공했다. 브뤼노는 외모가 미셸보다 못하다는 열등감을 갖고 있고, 미셸은 뛰어난 집중력과 사고력으로 천재이지만 몸과 감정은 평범하지 못하다. 브뤼노는 자신이 공부한 바를 끝까지 지켜내지 않는다. 자신에게 없는 미모 때문에 평생 결핍에 시달리고 계속 섹스에 집착한다. 미셸은 할머니, 어머니, 아나벨을 먼저 보내고 자신의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떠난다. 그곳에서 미셸은 소립자-내가 이해한 바로는 모든 조직과 그 조직을 이어주는 뉴런까지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현상까지 파악하는 바로 그것, 미셸은 모든 것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를 새롭게 연구하고 미셸이 실종된 후 새로운 인간 종이 만들어진다. 미셸이 남긴 '클리프덴 노트'는 세상을 과학의 눈으로 보고 다채롭지만 심플한 마음가짐으로 연구한 그의 유서이다. 그는 감정이 담긴 글을 쓸 줄은 몰라도 이치를 파악한 글을 쓸 줄은 알았다고나 할까.


 무엇이 사람을 이끄는가, 무엇이 세상을 움직이는가, 무엇이 영원한가... 미셸은 이야기 속의 미셸을 통해 인류의 실패, 생의 원리 그리고 새로운 인간 종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서로 다른 아버지를 가진 브뤼노와 미셸은 신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브뤼노는 결핍과 욕망의 아버지를 미셸은 우울과 창조의 아버지를 지닌, 하지만 둘의 어머니는 탕녀로 그려지는. 


 소설은 미셸이 아일랜드 연구소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스케치하고 있다. 바다와 해안절벽이 그려지는 그곳에서 생각하고 걸으며, 글로 적고 연구하며 자기 자신을 무수한 소립자로 바꿔갔다. 그는 점점 사라지는 사람처럼 연구소 사람들에게 존재감이 없었지만 창조를 이루어냈다. 이 소설은 20세기와 21세기를 그려내고 있고 앞으로 다가올 2029년을 단 몇 문장으로 그려낸다. 이 소설은 SF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니까 누군가 이 소설을 읽고 그 후 이야기를 써도 될 정도로 SF 소재가 충분한 것 같다. 좀 더 보태자면 굳이 외계인이 안 나오더라도 새로운 종이 살아가는 미래가 어떻게 남성과 여성을 버리고 존재를 유지하는지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분명 그 미래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  


 두 번을 읽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며 여전히 아름다운 시선을 떨칠 수 없다. 단지 아일랜드, 켈즈 서, 새로운 종.. 이런 단어 때문일까. 그건 생명을 다루는 작가의 솜씨가 촘촘하기 때문일 것 같다. 몸과 정신으로 대변되는 브뤼노와 미셸, 혹은 결핍과 완벽함으로 그려지는 브뤼노와 미셸을 통해 인간이 어디쯤에 머무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아일랜드가 아름답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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