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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티 구구 Mar 14. 2021

플랫폼, 주말, 소설 : 리뷰

미셸 우엘벡, 김엄지, 제임스 설터

 가운데 책, '주말, 출근, 산책:어두움과 비'는 다 읽었고, 앞과 뒤에 있는 '플랫폼'과 '소설을 쓰고 싶다면'은 마지막 장까지 가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제목을 쓰고 보니, 지금, 오늘, 여기가 다 연결이 된다.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서, 3월 둘째 주 '주말'을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니, 제목에 집중해보자. 앞과 뒤를 끝내지 못했더라도 난 이 책들에 대해 한 명의 독자로서 리뷰를 쓸 자유가 있다.


 이 플랫폼의 작가로서, 그러니까 21세기 새로운 글쓰기 장 '브런치'에서 내 글도 어느 정도는 프로페셔널하다고 믿는다. 보통 작가는 문단에 등단하거나, 공식적인 지면에 글을 계속 올리거나, 적어도 책을 출판한 사람을 지칭하지만, 21세기는 그 경계가 모호하게도 이런 '브런치'라는 공간이 있다.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난 나 스스로 작가라는 위치를 지키고 싶다. 내겐 24명의 구독자가 있다. 나는 키티 구구이다. 이제 시작한다.


 칭찬으로 받아줄지 모르겠지만, '주말, 출근, 산책:어두움과 비'는 시 같은 소설이다. 이 소설은 소품이다. 김엄지 작가가 썼고, 아주 짧다-그래서 글이 젊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08. 김엄지 작가는 구체성을 뚫고 나와서 관념을 소품으로 완성했다. 시 같은 소설이라 함은 바로 그래서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장르이다. 시보다 더 시 같은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 구체적인 것들이 문장 속에 없다. 우산, 검은 우산, 비둘기, 토한 것을 먹는 비둘기, 실종, 이유를 알 수 없는 실종자 a. 소설 안에 스케치를 한 흔적이 없다. 이 소설책의 표지는 제목과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제목이 풍기는 분위기를 표지가 압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구체적인 표현이 없는 이야기가 소설이 된다는 것이 가능한가. 하! 바로 여기에 있다. 스케치가 없는 수채화처럼 여러 이미지가 번지듯이 이야기가 진행된다. 구체적인 문장들을 분량의 2배, 3배만큼 쓰고 나서 줄이고 줄여서 낸 다른 소설과 다른 지점이 있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되 소설 작법을 위반했다. 그리고 독자는 새로운 소설을 접한다. 그게 무슨 내용이니?라고 묻는 사람에게 제목을 말해주면 된다. 아마, 굉장히 끌린다고 할 것이다. 제목을 품고 소설을 접하면 작가가 그려낸 어두움과 빗속에 서 있을 것이다.


 플랫폼은 미셸 우엘벡의 장편소설인데 매우 구체적이다. 일상이 이렇게 구체적이려면 하루를 1주일처럼 지내야 가능할 것 같다. 매우 많은 에피소드가 끝없이 이어진다. 단 몇 개의 에피소드로만 플롯을 짜는 작가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일상이 이렇게 생생할 수 있을까 싶게 일상에서 벌어진 주인공의 어떤 하루를 선택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또 다른 날이 시작된다. 시작할 때는 스릴러인가 싶다가 그 부분이 끝나자 주인공은 태국으로 여행을 가버린다. 욕망을 채우고, 다시 돌아와서는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뒤는? 소설이 어떻게 진행이 될지 가늠해본다면 일그러진 사랑 이야기 아닐까... 싶은데, 아직 속단하지 말아야지. 왜, 플랫폼인지 알고 싶다. 미셸 우엘벡의 소설을 세 번째로 읽는 나는 어떻게 그는 이렇게 솔직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허구가 아닌 실제 같다. 미셸 우엘벡이 실제로 이런 에피소드를 겪은 것 같은 진실함이 소설에 베여있다. 게다가 이름까지!


 김엄지 소설과 미셸 우엘벡 소설은 관념을 글로, 실제를 글로 썼다는 점에서 서로 반대이다. 반대 지점에서 움직이는 작가의 시선은 그러나 출발은 현대인이라는 점이다. 현대인. 나도 당신도 현대인이다. 자연인으로 살아가지 않는 한 우리는 도시에서 살고 도시 생활에 젖어있다. 그러고 보니 김엄지의 소설은 미셸 우엘벡의 첫 장편소설 '투쟁 영역의 확장'과 닮았다. 아직 에피소드 속 화자가 글 쓰는 작가에서 분리되기 전 같다. 어떤 소설이나 현실의 사람과 소설의 캐릭터는 통하는 바가 있지만, '특별히' 분리되기 전의 소설이 있다.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 허구의 인물이지만 어딘가 작가를 닮은꼴인 캐릭터. 좋은 소설은 분리와 일치, 그 둘의 간극을 잘 조절해서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인물을 보여주는 소설이 흥미진진할 것이다.


 소설을 쓰고 싶다면, 제임스 설터의 책 'The Art of Fiction- 소설을 쓰고 싶다면 -을 읽어봐도 좋겠다. 마음산책에서 나왔고, 번역도 잘 되었다. 작가 제임스가 어떻게 소설가가 된 잭 케루악을 부러워했는지에 도달하면, 소설가가 되고 싶은 예비 작가들의 마음에 쏙 들것이다.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노력 일지 운 일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소설을 쓰고 싶은 욕망은 어쩜 이렇게 비슷할까 하고 감탄하게 된다. 이런 부러움은 차라리 행복한 욕망이다. 제임스 설터가 생애에 만난 다른 작가들의 소소한 이야기,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다른 소설가의 말, 소설을 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재미나게 찾아볼 수 있다. 또, 소설가들이 갖고 있는 허구에 대한 태도는 무릎을 탁 칠 정도로 나와 똑같다. 이야기 속의 캐릭터를 아니 그 이야기 자체를 실제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점 말이다. 너무나 생생하게 재미있어서 허구와 현실을 뭉뚱그려서 살아가는 점 말이다. 물리적으로 봐도 그렇다. 낮에 일하고 퇴근 후에 어두운 밤에 읽고 있는 책이 소설이라면 내 말이 맞을 것이고, 이 책에서 나오는 작가들의 얘기에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것이 소설의 힘이고, 이야기가 지닌 마력이다.


 이 글의 제목 '플랫폼, 주말, 소설 : 리뷰'는 오늘 읽은 책 세 권의 제목에서 빌려왔다. 주말에 소설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 플랫폼에 도착한다. 작가는 그곳에 서 있는 나를 태우고 이상한 세계로 데려간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에서 소설가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리뷰를 쓴다. 작가-소설-독자-리뷰-브런치-구독자, 이렇게 단계를 거쳐서 작가의 목소리는 다시 글로 전달된다. 목소리는 음성이고 리뷰는 문자이다. 한데 이야기는 그걸 담고 있는 그릇에 의해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념을 글로 풀던지, 실제를 글로 풀든지 간에 글을 읽는 이에게 세계를 펼쳐놓는다. 글 쓰는 플랫폼 '브런치'에서 '리뷰'를 쓰자, 한 주가 갔다. 새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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