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의 첫 해는 외국에서 보기로 해

진짜 새해를 찾아 떠난 여행

by 탱탱볼에세이

2022년의 다짐을 다짐으로만 남겨두지 않기 위해, 12월 31일 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첫 도시를 치앙마이로 정한 이유는 이미 한 달 살기를 해본 적 있는 친숙한 곳이기 때문이다.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도 마스크를 안 쓰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실내에서도 마스크 필수착용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고 나도 마스크를 벗었다.


대학 졸업하고 일한 첫 직장은 이름만 말하면 다 한 번쯤 들어본 게임 회사였다. 대표게임의 모바일 출시가 임박해서 3달 단기로 대규모로 채용된 사람 중 하나였다. 2달은 게임교육을 받으면서 열심히 캐릭터 레벨업을 시켰고, 게임 기본지식 필기시험을 보면서 업무이해도도 점차 레벨업 됐다. 게임의 인기가 폭발적이라 실무하는 1달 동안 주 6일 근무는 기본, 밤 10시까지 야근은 필수일 정도로 일이 많았다.


짧지만 강렬한 3개월의 첫 회사 경험을 마치고, 바로 치앙마이로 도망쳐왔었다. 무슨 일을 해야 오랫동안 즐겁게 일할 수 있을까. 내가 하는 고민이 나만의 것은 아니구나. 타지에서 처음 본 사이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의 존재가 큰 위로가 됐다.


이번에도 계획대로 무사히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처음 치앙마이 왔을 때보다 좀 더 금전적인 여유가 생겼고, 회사 경험도 많이 해본 뒤 다시 오니 금의환향한 기분이 들었다. 지독한 로망주의자라, 그간 치앙마이에 올 때는 무조건 방콕에서 13시간 걸리는 야간침대 기차를 타고 다녔다. 이번 여행은 치앙마이에 빠르게 오고 싶어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


보통 택시는 그랩이나 볼트로 잡는데, 사람이 많은지 도통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30분 동안 아무리 택시를 잡아도 택시가 잡히지 않는 게 아닌가. 처음으로 오토바이를 타보기로 했다. 오토바이 택시를 잡고도 15분을 더 기다렸다. 보통 이러면 돈을 더 주고 공항택시를 잡을 법도 한데, 나는 고집이 세다. 언제든 리뷰를 남길 수 있는 안전한 플랫폼을 포기할 수 없다.


오토바이 기사님이 트렁크에서 헬멧을 꺼내주셨다. 배낭은 운전석 발에 고정해주고, 보조 가방은 트렁크에 넣어주셨다. 헬멧 쓰자마자 바로 출발했다. 어떻게 오토바이 기사님을 잡아야 할지 몰라서 처음엔 허리춤을 잡았다. 손이 미끄러져 버릴까 봐 깍지를 끼고 아예 기사님 배를 감쌌다. 이렇게 타는 게 맞나? 싶은데 9분 정도 걸리는 짧은 거리라 다행이었다. 다음엔 좀 더 능숙한 오토바이 탑승을 위해, 당분간 오토바이 뒷자리에 탄 사람들의 자세를 잘 관찰해보기로 한다.


숙소 사장님이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기다려주셨다. 사장님께 매해 마지막 날이면 타패게이트 앞에서 풍등을 날린다고 하던데 혹시 아시냐고 물었다. 러이끄라통 축제 때 풍등 날리는 건 알지만, 오늘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궁금하면 시내까지 태워주신다고 하자마자, 바로 yes라 말했다. 시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풍등이 훨훨 날아올라 바람길을 타고 끝없이 솟았다. 나도 풍등처럼 될 수 있을까. 소원을 빌었다. 부디 이 자유로운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소서!


산에 안 올라가도 해가 잘 보이도록, 산이 잘 보이는 외곽에 숙소를 잡았다. 해가 뜨는 방향은 고려하지 못해서 산 반대편으로 해가 떴지만. 날씨 앱에서 알려준 일출 계획대로 6시 50분에 일어나 숙소 옥상에서 새해를 봤다. 태국어로 주저리주저리 계속 마을 이장님이 음성방송을 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새해라고 해가 뜨는 것을 실시간으로 중계하시는 듯했다. 한국이든 태국이든 동네 스피커방송을 열심히 하는 이장님이 있구나 싶어서 반가웠다.

새해 첫 해는 외국에서 보기로 해. 혼자 한 다짐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아침부터 즐거운 마음으로 짐 정리를 했다. 잃어버린 물건이 있음을 깨달았다. 간이용 빨랫줄을 챙겨왔는데 달랑달랑 배낭에 걸고 다니다가 어디선가 흘린 듯했다. 이제서야 발견한 걸 보면 원래 없어도 되었던 거겠지. 구매하고 한번을 못 쓰고 잃어버리기는 계획에 없었는데. 이렇게 잃으면서야 진짜 필요한지 아닌지를 알게 되지 싶다.


새해를 계획대로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 계획 없이 숙소를 나섰다. 무작정 걸었다. 하루에 2만 보를 걷자든지, [생방송투데이]처럼 하루하루 투데이로 영상을 만들어 올려본다든지. 뭐든 비장하게 시작하고 싶은 날이다.


아점으로 국수 한 그릇, 밥 한 그릇을 주문했다. 수저통에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이 없었다. [젓가락 주세요]라는 태국말도 모르고, 직원들이 분주해 보여서 혼자 옆 테이블의 숟가락 동태를 살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나만의 눈치게임 시작. 사람들이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잽싸게 옆 테이블의 숟가락을 획득했다. 덕분에 쌀 한 톨도 남김없이 다 먹었다. 보통 계산서 주세요는 [첵빈카~]로 유투브에서 배웠는데, 그냥 계산해주세요는 몰라서 네이버에 검색했다. [껩당나카~]. 참고로 태국어는 끝말에 여자는 카, 남자는 캅을 붙이면 된다.


금방 배가 아파서 화장실이 내부에 있을 것 같은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간판부터 [오후베이커리] 한글로 적혀있어서 신기했다. 혹시 여기, 서울시 치앙마이동이 아닐까? 사장님이 반겨주시며 유창한 영어로 친절하게 빵도 다양하게 있고, 진짜 맛있는 파이도 있고 찬찬히 설명해주셨다. 생전 안 먹어 본 옥수수 파이를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미디엄 로스팅에 노 슈가요!


거울에도 안내 문구에도 한국말이 쓰여 있다. [오늘 참 예쁘다 그대,] 사장님 한국분 아니신데, 한국을 이렇게 좋아하시다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국인으로서 뿌듯함이 들었다.


앉은 자리에도 [파페포포 투게더]라는 책이 화분 받침으로 감성있게 쓰였다. 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외로움에 지쳐 있을 때 언제든 달려와 위로해 주었던 친구들에게, 나는 참으로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나도 그랬다. 이번 여행에 친구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응원을 받았다. 새해 엽서, 양말, 다이어리, 트래블 키트, 여행용 공기베개, 카메라 파우치. 각자 선물에 한정된 배낭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지, 여행에서 유용하게 쓰일지 섬세한 고민이 담겨있다.


사장님께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물어봤다. [원투에잇 원 투 쓰리 포 파입 식스 세븐 에잇]이라고 했다. 나는 [원투에잇원투쓰리포파입식스세븐에잇]으로 적었다. 연결에 실패했다. 사장님이 직접 연결해도 되냐고 물었고, 사장님 손길을 거치니 바로 연결됐다. 비밀번호는 [원 투 쓰리 포 파입 식스 세븐 에잇]이었다. 원투에잇에서 원투쓰리포파입식스세븐에잇까지 섬세한 가이드가 오히려 헷갈리게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앉아서 핸드폰 배터리를 충전했다. 열심히 사진 찍으면서 돌아다녔더니 20%밖에 남지 않았다. 자리에 콘센트도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사장님이 지나가면서 옥수수 파이 맛 어떠냐고 물어본다. [베리 굳!]이라고 자본주의 미소를 보냈다. [사실 아까 점심을 너무 많이 먹어서, 맛을 모르겠어요]라는 한국말을 태국말로 못해서 다행인 순간이다. 초코 도넛 한 접시를 들고 다시 오셨다. [기프트, 해피 뉴 이어!] 예상 못 한 새해 선물에 뭉클했다. 이미 배는 불렀는데, 사장님의 친절로 마음까지 배불렀다. 감사한 마음에 접시를 다 비웠다.


여행하는 동안 이렇게 작고 사소한 것들이라도 필기하고 또 필기하다 보면 진짜 내가 담고 싶은 것들이 무엇인지 선명해지리라. 또 그러다 보면 [필기]라는 단어 앞에서 시험이라는 두려움 보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필기하는 즐거움이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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