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시간부자가 되고 싶었을 뿐.
엄마는 아빠를 “내 사랑 자기”로 핸드폰에 저장해놓으셨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호칭. 아마도 나에게 처음으로 “자기”라는 단어를 알려준 최초의 사람이지 않을까. 아빠랑 엄마는 같은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곳은 엄마의 첫 직장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 초록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고 또렷하게 기억하고 설명하신다. 첫 눈에 사랑에 빠진다는 게 그런 걸까. 카카오톡도 영상통화도 없던 시절, 엄마는 5년간 세무사 시험 준비를 한 아빠를 기다렸다. 아빠의 성실함을 믿고, 엄마는 사랑으로 결혼했다. 그리고 우리 삼남매가 태어났다.
부모님이 맞벌이하셔서, 나는 태어나자마자 친할머니와 항상 함께였다.
작년 설날, 나의 28년을 함께한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이를 기점으로 부모님은 완전히 도시 생활을 정리하셨다. 엄마는 아빠를 따라, 아빠의 고향으로 귀촌하셨다. 할머니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년까지 사시던 집이기도 하다. 오빠가 갓난아기일 때, 맡길 곳이 없어서 할머니가 혼자 계시는 시골집에 맡겼다고 한다. 주말마다 부모님이 오빠를 보기 위해 왔는데, 똑똑한 아기는 부모님이 자기가 잠들면 가는 걸 알았다. 밤마다 울면서 쉽게 잠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님이 자기를 떠날까 봐. 그렇게 몇 달을 눈물 없이 떠날 수 없는 이별을 하다가, 결국
할머니와 함께 위로 올라와 다 같이 살게 되었다. 할머니의 존재 덕분에 나도 태어나고, 내 동생도 태어날 수 있었다.
아무런 연고 없는 곳에서 50대가 넘어 다시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엄마는 특히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데, 아빠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빠의 결정을 따라 시골로 내려가셨다. 아주 큰 용기다. 그래도 다행히 엄마는 새로운 농촌 커뮤니티에 잘 적응한 듯 보인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친해졌고, 시골집에는 시도 때도 없이 손님들이 방문하신다. 그렇게 시골집은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최근 오빠가 가족 행사에 미온적으로 참여하는 동생의 태도에 크게 화를 냈다. 항상 동생을 먼저 감싸주던 형이었는데, 서른이 다 돼가는 동생에게 이젠 단호하게 말할
필요성을 느꼈나 보다. 가족 단체카톡방도 폭파되고, 엄마는 오빠와 동생 사이가 좋지 않아진 것을 걱정하셨다. 오빠와 동생 사이 중간에 낀 나에게 중재해보라고 하신다. 할머니가 계셨다면, 잘 중재해주셨을텐데. 문득 할머니가 그리워졌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안다. 우리가 너무 커버렸기 때문이다. 삼남매 모두 삼십 대를 마주했거나, 곧 마주한 나이가 되었다.
내가 6개월 장기 여행을 하는 핑계로, 가족 단체카톡방을 재건했다. 오빠는 동생에게 화를 낸 이유를 장문의 글로 주르륵 카톡을 보냈다. 동생은 오빠의 그 긴 글을 읽었지만, 길게 답을 하진 않았다. 오빠는 용기 내서 본인의 감정을 모두 솔직하고 투명하게 보여줬다. 가족 단체카톡방에서 공개적으로 해결하는 오빠의 방식이 동생에게는 또 다른 서운함으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혼자 사는 동생은 이제
서서히 가족의 소중함을 알아갈 것이다. 엄마의 카톡만이 총성 없는 전쟁터인 단체카톡방을 따뜻하게 데폈다.
“엄마 오늘부턴 맘 편하게 행복하게 지낼게.
내 듬직이 경수, 내 보배 민주, 내 보물 동수.
다들 사랑한다. ”
찡했다. 부모님은 3명의 자식에게 똑같은 사랑을 주려고 항상 노력하신다. 한 번도 사랑을 모자라게 받았다고 다른 형제들로부터 질투를 느낀 적이 없다. 하지만, 세 남매가 언제나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다. 이젠, 각자의 집에서 뿔뿔이 흩어져서 살기 때문에 더더욱 한번 싸우면 쉽게 화해하기도 쉽지 않다. 할머니, 아빠, 엄마, 오빠, 나, 동생 여섯 가족이 함께 살던 때가 그립다.
나에게는 치앙마이 방문이 벌써 세 번째다. 첫 번째는 스무 네살에 졸업하고 첫 직장을 그만두고 한 달 살기를 했었다. 그때는 게스트하우스를 3일마다 옮겨다니며, 숙소 친구들과 어울렸다. 두 번째는 지난 추석 때, 부모님과 방콕 일주일, 치앙마이 일주일로 자유여행을 왔었다. 방콕의 화려함과 북적거림에 시달리다가, 세상 평화로운 치앙마이에 왔었다. 엄마는 취향마이라고 하시며 좋아하셨고,
아빠는 할 게 없다고 투덜거리셨다. 혼자 오기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서 여유로운 도시이지만, 부모님에게는 계획 없이 그냥 일상을 보내는 느낌이라 낯설어하셨다.
다시 혼자 온 세 번째 치앙마이.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왔다. 시내에서 좀 떨어진 한적한 숙소만을 한 달간 예약한 채.
이전 방문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번 여행에는 시간 부자가 되고 싶었다는 거다. 메타버스 공간에서 출퇴근하다 보면, 공간의 제약이 사라진다. 단순히 배경을 집으로 설정해놓고, 집처럼 일해도 아무도 모를 일이다. 어디서든 업무가 가능하다. 하지만 어디에 있든 아홉 시 반 출근, 여섯 시 반 퇴근 시간의 무게감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짓누른다. 그것이 집에서 혼자 일하는 나를 조여왔다. 그것이 내가 무작정 비행기표를 끊고, 서울을 떠나온 이유였다.
가끔은 집주인 아주머니를 따라 길을 나서기도 하고. 무작정 걸어보기도 한다. 어제는 구글 지도에서 동네 커피 근본 맛집 같아 보이는 곳을 찾아왔다. 사장님이 말 걸어주셨다. 이름은 뭔지. 치앙마이에는 왜 왔는지. 앞으로 어떤 계획인지. 무슨일을 하다가 왔는지. 혼자서 6개월간 한 달에 한 도시씩 여행한다고만 설명했을 뿐인데, 대단하게 용감하다고 여겨주셔서 감사하다. 모든 이야기는 영어로
말해야하기 때문에, 한번더 생각하고 힘주어 말하게 되어 그런 걸까.
사장님도 본인 인생사를 다 들려주신다. 일본에 보석 수출하던 시절 이야기부터 기타 연주, 오토바이 여행 이야기까지. 그렇게 사장님과 사장님의 손님들과 친해진다. 여기도 이 동네 사랑방임에 틀림없다. 손님들은 다 단골이라서, 너 처음 본다고 이름이 뭐냐고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외국 여행 와서 카페에서 이렇게 카페에 온 다른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었던가. 주말엔 바베큐파티에도 초대받았다. 사장님은 돈을 벌기 위해 카페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걸로 충분히 행복하다고 하신다. 단지 커피 파는 카페가 아니라, 하나의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커피로 통하는 소중한 커뮤니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앙마이에 많은 카페가 있지만, 이렇게 다정하게 사장님과 대화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다들 각자 조용히 핸드폰하고, 노트북 하기 바쁘지. 홍콩에서 은퇴 후 치앙마이에 정착한 부부 손님이 힘주어 말했다. 아저씨는 홍콩의 백미당에서 운영 매니저를 하셨다고 한다. 백미당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적은 있지만, 의외로 커피도 맛있다고 귀띔해주셨다. 한국에 돌아가면, 백미당 커피도 마셔봐야지.
사장님: “민주, 내가 한국식당에서 빙수를 주문했었는데. 빙수랑 민주랑 비슷한 게
맞아?”
나: “아니요! 완전히 다른데, 발음이 비슷한 게 재밌네요?”
이렇게 특별한 대화는 아니지만 영어로 대화 나누다 보면, 서로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재밌는 포인트들이 생긴다. 태국 사람, 홍콩 사람, 한국 사람끼리 얘기하다가 태국 치앙마이 억양과 방콕 억양이 다르다는 주제가 나왔다. 한국도 서울과 부산의 억양이 다르다고 받아쳤다. 홍콩은 광둥어를, 중국은 만다린어를 쓴다고. 학교에서 배우다 보면 모국어가 섞인 영어를 하게 되어 같은 영어인데 색다른 억양이 생긴다고. 사장님도 너무 태국 북부 억양이 섞인 영어를 가르치지 않기 위해, 딸을 국제학교에 보낼 거라고 하셨다. 그렇게 대화 나누다 보니까 카페에서 2시간이 훌쩍 지났다. 한국에서도 단골 카페가 없는데, 치앙마이에서는 단골 카페가 생긴 것 같다. 나를 알고 반겨주는 사장님. 출근 도장 찍듯이 얼굴도장 찍으러 오고 싶어진다.
그래서 사실 특별할 것 없는 지금의 시간이 좋다. 아홉 시 반 출근도 여섯 시 반 퇴근도 오후 한 시 점심시간도 없다. 그저 시간을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만큼 길다면 길게, 짧다면 짧게 머물러도 된다. 특히 점심시간에 쫓겨 밥을 허겁지겁 먹지 않아도 되서 좋다. 그냥 이 시간을 그대로 놔둬도 된다. 어쩌면 이 시간을 위해, 12월 30일에 퇴사하고 12월 31일에 비행기 타고 아무도 아는 사람 없고 아무런 말도 통하지 않는 곳으로 떠나온 걸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떠나오기 전, 6개월 동안 무작정 해외여행 떠나는 내가 멋있다고 다들 부러워했다. 이러다가 인생의 동반자를 외국에서 찾아오는 거 아니냐며. 다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난 한 번도 누군갈 자기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자기야”라는 말은 뭔가 낯간지럽다. 듣기만 해도 닭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다.
나도 엄마처럼 누군갈 “내 사랑 자기”라고 저장하고 부르는 날이 올까? 언젠가 이런 내가 누군갈 “자기야”라고 세상 다정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누군갈 “자기야”라고 당당하게 저장하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