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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툰자 Sep 01. 2019

스무 살의 너를 다시 만나고

툰자 일기 4 - 지리산 여행

모임에서  지리산을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새벽 세 시쯤 산에 올라 일출을 보고 내려올 예정이라는 말에  나는 고민 없이 포기했다.  밤샘 등반이 가능한 체력과 황홀하고 감동적인 지리산의 일출을 볼 수 있을 그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는데 계속 지리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이번 주말에 지리산을 보고 오자고 결정했다.  여름 휴가 시즌이라 두 시간 검색 끝에  간신히 숙소를 예약했다.

    

토요일 오후에 도착한 숙소는 호텔이라고 하기엔 많이 실망스러웠으나 지리산의 맑은 물과 공기로 위로받자고 랬다. 저녁으로 지리산 흑돼지 불고기 정식을 먹었다.  넷인데  삼인 분만시켜도 되냐고 했더니  기분 좋게  괜찮다고 했다. 반찬이 더 필요한지 계속 신경 쓰시는 점도 고마웠다. 지리산처럼 인심도 넉넉했다. 평소에  맛보기 힘든 산나물 반찬이 많아서 더 좋았다.


    

온천을 즐기고, 숙소에  돌아와 맥주 한 캔 했더니 10시도 되기 전에 노곤노곤  잠이 쏟아졌다. 둘째가 '심심하다, 잠이 안 온다' 계속 말을 시켰는데 그게 꿈인지 생시인지 오락가락했다.  

   

눈 뜨니 새벽 6시. 늦게 잠들었는지 곤히 자는 아이들은 두고 남편과 노고단으로  향했다. 가파른 S자  도로가 시작되니  보조석에 앉은 내 다리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속도를 낼 수 없어 천천히 조심조심 올라가는데 반달곰 주의 표지판이 계속 나왔다. 곰을 만나면 어쩌나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는데  반달곰이 아니라  청년들이 나타났다. 단단한 종아리로 그 가파른 곡선 도로를 걷는 게 아니라 뛰고 있었다. 그 무리에는 어려 보이는 소녀들도 있어서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스무 살에 만났던 지리산이 떠올랐다. 밤새 완행열차를 타고 구례역에 도착해  쫄쫄 굶고 산을 올랐다. 장터목 산장 근처에 텐트를 치고  밥을 지어먹고, 다음 날  이른 새벽 일출을 보기 위해 천왕봉에 올랐다. 기타를 메고 산에 오른  친구의 반주에 맞춰 우리는 '아침 이슬'과 '광야에서'를 합창했는데. 신비로운 주목 사이사이로 구름꽃이  핀  천왕봉에서 가슴 벅찼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노고단 주차장 위쪽 성삼재 휴게소에 올라가니 드넓은 하는 캔버스에 구름이 그리는 작품이  신비로웠다. 거센 바람에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지만 남편과 나는 말없이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휴게소 식당으로 추위를 피하러 들어갔다가 라면과 우동으로 아침을 먹는데,  조금 전에 보았던 청년들이 들어왔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에 바람을 맞으니 추워서 들어온 모양이었다.

    

"혹시 무슨 운동하세요?"     

"철인 3종이요."     

     

'역시 철인이었구나. 철인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지.' 꼬불꼬불 가파른 산길 11km를 한 시간 만에 달려왔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 젊음과 건강함이  멋있고 부러웠다.  

   

다시 한번 스무 살 때처럼 천왕봉에 올라  벅찬 감동을 느껴보고 싶었다. 건강한 몸으로 단단한 종아리로 꼭 다시 오자고 멀리 산 정상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천은사에 잠깐 들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사가 더 운치 있고 아름다웠다. 우산이 하나라 오랜만에 팔짱을 끼고 걸었다. 사람은 안 보이고 몇 백 년은 족히 사를 지켜온 듯한 은행나무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촬영했다는 안내문과  내가 좋아하는 배우, 김태리 사진이 있어서 반가웠다.

   

아이들을 깨워  숙소에서 가까운 수락폭포에도 갔다. 마을 깊숙이 이런 절경이 숨어 있을 줄이야. 세찬 물줄기 아래 비닐을 뒤집어쓰고  공짜 마사지를 받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표지판에  폭포 마사지가 신경통, 관절염에 효험이 있다고 쓰여있는데 추워서 해 볼 엄두는 안 났다.

     

준비도 없이 급하게 떠난 여행이지만 지리산은  실망시키지 않았다.  큰 산이라서가 아니라 골짜기마다 아름다운 산사와 계곡, 폭포를 품고 있는 모습에 반했다. 힘들 땐 언제든 와서 쉬고 가라고  스무 살에 처음 만났던 지리산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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