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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툰자 Oct 06. 2019

대체불가능한 시간

홀로 깨어 있는  시간, 마음 근육을 키우는 시간


새로운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쯤 된  2018년  11월,  에세이 쓰기 모임에 들어갔다. 낯도 가리고 겁도 많은 사람인데 모임을 이끌 작가님의 제안인지라 용기를 냈다. 그래도 조금 두려운 마음이 남아서 같이 가자고 아는 동생을 꼬드겼다.   

  

처음 에세이 수업에 참석하던 날, 나는 일 때문에 지각했다. 모두 모여 있는 장소로 들어가는데 스무 살의 소개팅처럼 떨리고 설렜다. 그 후  나는  에세이 모임과  연애를 시작했다. 책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를 소녀로 만들었고, 건조했던 감성을 촉촉하게 했다.   

   

연애가 달달할 때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가족들에게도 상냥했고, 새로 시작한 일도 즐겁게 했다. 글쓰기도, 일도 술술 풀렸다. 여기저기 마흔아홉에 만난 사랑을 자랑하고 다녔다. ‘글쓰기 전도사’가 되었다.

    

수업 시간에 혹은 단톡 방에서 작가님이 내 글을 칭찬한 날에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글을  쓰기도 했다. 자격증 준비도 하고 있었는데, 시험공부보다 다음 에세이는 뭘 써야 하나 더 고민했다. 시험 결과는 세 달 뒤에 나오지만 에세이는 2주에 한 편은 써야 당당하게 데이트에 갈 수 있으니. 그렇게  에세이가 내게로 깊이 들어왔다.  

   

‘에세이’라는 큰 산에 오르기 위해 함께 버스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  이런저런 이유로 도중에 내리는 분들도 있었다. 산 아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처음 버스에 탔던 사람 중 딱 절반만 남았다. 리더와 남은 일곱 명의 팀원은 결의를 다지고 산에 올랐다.    

  

대장을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르다 보니  예정된 12회 수업이 끝났 우리는 쫑파티를 열었다. 푸짐한 도시락도 펴놓고 시원한 호가든으로 깔깔했던 목도 적셨다. 힘들게 올라와서 먹는 도시락이 얼마나 맛있던지 조금 쉬었다 가면 정상에 도착할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힘내서 정상까지 좀 더 빠르게 갑시다.”   

  

공식적인 수업은 끝났지만 우리는 계속 함께 쓰기로 했다. 2주에 한 편씩 쓰던 글을 1주에 한 편씩 쓰기로 결정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숨이 조금씩 가쁘고,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씩씩하게 잘 올라가는 멤버들을 보면 샘도 났고, 앞서가는 멤버들과 거리가 더 벌어지지 않도록 딴에는 안간힘을 썼다.  발바닥에는 '포기'라는 물집이 점점 커지고, 무거운 어깨도 쑤시기 시작했다.

    

산을 내려가야 할까 말까 입은 꾹 다물었지만  머릿속은 시끄러웠다. 아픈 몸으로 올라가려니 정상은 아직  까마득했고, 내려가자니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가자고 제안한 대장에게도, 내가 꼬드긴 멤버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내가 하산한다고 하면 다른 멤버들까지 힘이 빠질 것 같아 어지러운 마음과 욱신거리는 몸을  질질 끌고 따라갔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멤버들 중에 지치고 힘든 사람이 보였다. 그런데 간신히 따라온 내가 불쑥 그랬다.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요. 힘내요. 함께 갑시다.”     


숨이 턱까지 차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이게 무슨 오만인가. 지금 생각해보니 포기하려는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다른 멤버가 하산을 결정하면 나도 냉큼  따라갈 것 같아 불안한 거였다.

      

연애가 힘들기 시작하자 모든 게 꼬였다. 한여름인데 가슴속에서는  찬바람이 불었고, 감정은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말에 가시가 박히기 시작했다. 옷을 아무 데나 벗어 놓은 남편에게 불같이 화를 냈고, 늦은 밤 게임하는 큰아들에게는 집을 나가라고 했다. 점점 살이 찌는 둘째에게는 먹을 때마다 잔소리를 퍼부었다. ‘지금 내가 이렇게 괴로운 게 다 니들 탓이야’

  

독서도, 글쓰기도, 일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자존감은 끝도 없이 추락했고, 모임에서는 멤버들의 생각과 내 의견  조금씩 다르다고 느꼈다. 점점 멤버들과 시선을 마주하기도 힘들었다.   

  

고민으로 잠을 설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책을 폈다. 이웃 블로거가 한 달간  유럽여행을 떠나면서 딱 두 권만 가져가기로 했는데 가장 먼저 선택한 책이라고 했다. 그런데 제목부터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자기 계발서였다. 깜깜한 새벽에 구본형의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를 읽기 시작했다.

    

책 구성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순서로 되어 있다. 앞부분은 다른 책에서 읽은 내용과 비슷해서 살짝 지루했다. 그런데 가을의  문장들이 쾌도난마처럼  50여 일 동안 엉켜있던  실타래를 싹둑 잘라 주었다. 구구절절 모든 문장이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친구가 4년 동안 전도를 했지만 마음을 열지 않았던 내가 군산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주차장에서 만난 아주머니의 전도로 교회에 간 적이 있다. 그때 목사님의 설교가 모두 내게 하는 말처럼 가슴을 울린 경험이 있다. 절묘한 타이밍에 이 책을 만난 게 기적 같았다. 순간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여기 나에게  우선인 것은 무엇인가?’ 내게 물었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는데 다른 산이 보였다. ‘새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 작은 산도  오르지 못해 안달복달하면서 큰 산을 오르겠다고 버티던 내가 보였다.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일하는 시간만큼 에세이  쓰기에 매진할 자신은 아직 없다. 필력도, 필살기도 없는 나는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며 계속 이야깃거리를 찾아야 한다. 가까운 미래에 책 한 권을 낼 수 있을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와  감동을 주는 글이 쌓인다면 좋겠다. 그래서 에세이 모임에서는 하산하기로 결정했지만 글은 계속 쓸 작정이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은 수월하다. 어깨에 멘 가방도, 발걸음도 가볍다. 작은 산을 오르고 나면 큰 산도  다시 도전할 수 있다. 다음에는 올라가는 것도 좀 수월하겠지?


헛된 시간은 없다. 혼자서는 죽어도 못 갔을  큰 산에  오를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한 대장과 서로 응원한 팀원들 덕분이다. 이제 뚜벅뚜벅 걸어서 우리 동네 앞부터 올라야겠다. 지금은  혼자  근육을 키우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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