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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툰자 Jan 29. 2023

미친 듯이

11월의 폭우는 추억이 되고


"지금 나는 미친 듯이 공부하고 있어? 그런데 너는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좋겠다."


초등 3학년이 되는 아이가 미래의 자신에게 쓴 편지의 일부다. 크리스마스트리의 꼬마전구처럼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많고, 유머가 있는 아이다. '미친 듯이'에서 웃음이 났다가 '너도 열심히 하고 있겠지?'를 예상했던  는 웃음이 쏙 들어갔다. 녀석은 다음 문장을 궁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미래의 윤아, 너는 마음껏 놀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농구를 잘하면 좋겠어."


공부하느라 힘든 마음이 느껴졌다. 지난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뭐냐고 물었다.


"눈 오는 날 운동장에서 4반과 축구 시합한 거요. 추운데 점퍼도 안 입고 뛰었다니까요."

"와! 진짜 재밌었겠다. 윤이네 반이 이겼어?"

 "우리 반이 6 대 1로 이겼죠."

"이겨서  기억에  남았구나?"

"아니요. 눈 맞으면서 축구하는 게 신났어요. 점퍼도 안 입고 했다고요."


찬바람 부는 11월부터 3월까지 엄마가 입혀주는 내의 때문에 답답하다고 자주 투덜거렸는데. 난생처음 눈 오는 날, 외투도 안 입고 운동장을 누빈 아이는 해방감을 만끽했을 것이다. 좋아서 미친 듯이 하는 일은 승패에 상관없이 신나는 일인데 꼰대 같은 질문을 던진 내가 부끄러웠다.


내 기억의 서랍 안에도 성공했던 것, 좋았던 것만큼 처음 경험한 것이나 실패한 다.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는 쪽은 후자일 때다. 김영하 작가도 <오래 준비해온 대답>에서 계획한 대로 진행된 즐거웠던 여행보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아 실패했다고 생각한 여행을 오래 기억하고 글로 쓴다고 했다. 그렇다면 11월의 서울 여행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 머물  같다.


수업 시간도 조정하일하는 남편에게 익산역까지 태워 달라고 졸라서 간신히 예매한 KTX에 올랐다. 서울 사는 친구, 대전, 대천, 청주에서 올라오는 선배들을 만나는 날. 대학로 맛집에서 저녁을 먹고 연극을 보기로 했다.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한 나는 친구에게 대학로에서 어슬렁거리며 있을 테니 천천히 시간에 맞춰 나오라고 했다. 보슬비가 오락가락하는 토요일 오후, 대학로는 청년들로 가득했고 거리는 온통 은행잎으로 환했다. 젊은 에너지가 넘치는 자기장 안에서 피곤함을 잊고 한참을 걸었다.


여름 소나기처럼 비가 거세지는 바람에 담쟁이덩굴을 외투처럼 걸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앞이 지하철 2번 출구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보다가 포장마차 '에그머니나'가 눈에 들어왔다. 쌀쌀해진 날씨에 따끈하고 보드라운 계란빵이 딱인데 혼자 비 오는 거리에서 먹을 용기가 안 났다. 서울 와서 처음 먹은 음식이 계란빵일 수는 없다고 아이쇼핑 시점에서 관찰만 했다. 포장마차 외부는 연극과 음식점 광고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고, 사장님이 엉덩이 붙일 새도 없이 에그머니나에는 끊임없이 손님이 찾아들었다. 작은 포장마차가 뿜어내는 뜨거운 열정으로 계란빵을 먹은 것처럼 잠깐 따뜻했다.




열정 자기장의 힘이 약해졌는지  다리와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1층에 있는 카페는 만석. 그때 선배들과 함께 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버스가 꼼짝도 안 해. 비가 갑자기 많이 와서. 십 분이면 도착할 줄 알았는데....."


연극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으니 저녁 식사는 불가능해 보였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점점 더 배는 고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었다. 약속에 늦지 않으려고 군산에서 익산역으로, 서울역에서 대학로로 종종거리며 왔다는 사실을 되새김질했다. 초라해 보이고 싶지 않은데 힘없는 머리칼이 습기로 주저앉아 모자를 꺼내 썼다. '하필 오늘 비가 오고 난리야. 어쩌면 연극도 못 보겠군'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다행히 연극 시작 15분 전에  일행이 도착해서 안부만 묻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연극을 보고 나오니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썼지만 금세 무릎까지 젖을 정도였다. 맛집 찾아 돌아다닐 상황이 아니라 예약한 숙소가 있는 북촌으로 다.


버스에서 내려 한옥 마을 골목길로 접어들었는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길이 아니라 지리산 계곡 같았다. 운동화도, 바지도, 점퍼도 흠뻑 젖었다. 가게들은 밤 9시도 안 됐는데 문을 닫기 시작했다. 가는 식당마다 거절 뭔가 좀 억울했다.


어쩔 수 없이 숙소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선배들은 드라이어와 수건으로 옷과 신발을 말리기 시작했고, 친구는 집에서 싸 온 과일과 치즈, 빵, 와인으로 상을 차렸다. 밤 10시쯤 둘러앉아 배를 채우고, 이야기로 밤을 채웠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대신 숙소와 연극을 알아보고, 일정을 짜고, 대접할 음식까지 준비하느라 가장 분주했던 사람은 친구였다. 우리를 위해 친구는 같은 연극을 세 번째 봤단다. 오래 준비해온 일정이 계획대로 되지 않아 친구는 얼마나 마음 졸이고 속상했을까? 안도의 한숨과 웃음이 오락가락하는 사이 그토록 원망했던 11월의 폭우는 추억이 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비가 그친 날씨에 우리는 콧노래를 불렀다. 폭우가 아니었다면 생각지도 않았을 날씨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따뜻한 방바닥에서 꿉꿉했던 옷들도 뽀송하게 말랐다. 바지런한 친구가 감바스와 샐러드로 근사한 아침을 차려줘서 호텔 조식 부럽지 않았. 아침 산책을 나갔더니 골목길도, 한옥들도, 하늘깨끗했다. 세찬 가을비 덕분에 묵은 때를 벗은 것 같았다.


통제할 수 없이 벌어지는 일들은 버겁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변화를 가져오고 새로움을 경험하게 한다. 폭우가 아니었다면 북촌의 아름다움도 창덕궁의 가을도 금세 잊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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