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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툰자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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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툰자 Jan 04. 2023

내 안에 연가시가 산다.

삼년고개


'너무 짜게 먹었나? 왜 이렇게 갈증이 나지?'


2012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일시적인 증상이겠지 하고 하루 이틀 계속 물을 마셔댔다.  마시는 빈도와 양은 계속 늘어나는데 마셔도 마셔도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결국 동네 병원에서 검사를 했는데 결과는 며칠 뒤에 나온다고 했다. 낮에는 견딜만했다. 그러나 밤에는 잠을 잘 수 없어서 미칠 것 같았다. 물 마시고  화장실, 다시 물 마시고 화장실. 수없이 반복하다가 날이 샜다.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터질 듯했고 벌컥벌컥  냉수를 들이켜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었다.



친구가 점심을 먹자고 해서 들어간 식당에서 콩나물국밥이 나오기도 전에 1L들이 물 한 통을 다 비웠다.

"사장님, 여기 물 한 병 더 주세요."

"툰자야, 괜찮아? 너 힘든데 괜히 만나자고 했나 봐."

"향미야, 내 몸에 연가시가 사나 봐. 기생충들이 수분만 쪽쪽 빨아먹는 것 같아."

결국 콩나물 국밥은 손도 못 대고 일어났다. 건더기 음식을 넘기는 것조차 힘들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영화 '연가시'의 인물들처럼 정신없마실 만 찾았다. 가까운 슈퍼마켓에 가서도 계산하는 중에 음료수 캔을 따 마시는 낯선 내 모습을 마주했다. 평소 커피 외에는 음료를 거의 마시지 않았는데 산음료까지 닥치는 대로 마셨다. 이러다 정신을 잃으면 하천으로 뛰어드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영화 내용과 다르게 사실 연가시는 인간을 숙주로 삼지 않는다고 한다. 검사 결과 신장에도 이상이 없고, 의심했던 당뇨도 아니다. 의사는 침착한 표정으로 대학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가장 빠른 예약 가능한 날짜가 13일, 그날은 14주년 결혼 기념일이었다. '대학 병원이니까 검사하고 바로 결과 나오겠지. 일찍 끝나면 둘이 오붓하게 외식이라도 해야겠다.' 아픈데도 결혼기념일이라고 조금 들떴고, 남편이 함께 가 준다니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일주일 정도 검사가 필요하다고 당일 입원을 권했다. 검사란 매일  피 뽑고 매시간 소변을 체크하는 일이 전부였다.


6인실에는 다양한 이유로 입원한 환자들이 있었다. 환자들 가족까지 보통 열명 이상이 한 병실에서 늘 북적대다 보니  조용할 틈이 없었다. 수시로 들락거리는 간호사들, 청소하는 분, 문병 오는 사람들까지 그 틈바구니에서 치료도 없고 링거도 꽂지 않은 소변통과 외롭게 지냈다. 검사 과정에 있는 나로서는 친정에도 친구들에게도 연락하기가 민망했다.


남편은 너무 바쁘고 둘째가 겨우 다섯 살이었기 때문에 시어머니께 아이들만 부탁했다. 병실에 보호자도 없이 하루 종일 혼자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옆자리 언니들은 새로운 간식이 생기면 나눠주고 살갑게 말을 걸었다. 갈증을 완화시키는 약을 먹으니 갈증은 잠잠해졌는데 임신한 사람처럼  특정한 음식이 당겼다.


우리 병실에는 지병 때문에 특식을 먹는 환자가 한 명 있었다. 치매로 요양 병원에서 지내다가 아파서 입원했다고 한다. 어느 날, 그녀의 식판에만 빨간 토마토 하나가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그 빨강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나는 밥도 안 먹고 그녀의 식판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밥도 고기반찬도 필요 없고 빨간 토마토 하나면 병이 나을 것 같았다. '치매 환자라 좀 아둔하니까 나가는 척하면서 슬쩍 주머니에 집어넣고 화장실에 가서 먹을까' 상상 속에서 나는 뻔뻔한 도둑년이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는 간절하게 부탁해 볼까 별별 궁리를 다했다. 결국 먹지 못한 토마토를 남편에게 공수해 오라고 하고 눈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병원 주변을 다 뒤져봐도 토마토 파는 곳이 없다며 배랑 사과 따위를 들고 왔다. 첫째 임신했을 때  망고를 못 사 와도 화를 안 냈는데  토마토 아니면 안 된다고 짜증을 부렸다.


몸이 예민해지면 마음도 사나워진다. 나는 빨간 토마토(특식 먹는 여자)를 시기했다. 그녀 곁에는 주말이라고 하루 종일 남편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입원한 왼쪽 침대 언니가 빨간 토마토 남편에게 물었다.

"멀리서 일하나 봐요? 오랜만에 오셨네."

그리고는 나에게  소곤거렸다.

"이제 겨우 마흔 넘었는데 치매라니 너무 불쌍해."

나보다 열 살은 많겠지 했는데 나보다 더 젊은 이였다. 이유도 없이 빨간 토마토를 미워한 내가 정말 싫었다.



혈액과 소변 검사는 신장에 이상이 없다는 동네병원의 결과와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담당 의사는 덧붙였다.

"그럼, 이제 뇌를 의심해야 하거든요. 월요일에는 뇌 MRI를 찍읍시다."


나는 병원에서 핸드폰으로, 남편은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검색을 시작했다. 뇌종양이 있을 경우 심한 갈증을 동반한다는 글이 눈에 띄었다. 6인실 병실에서 혼자 커튼을 치고 소리 죽여 울었다. 이제야 내 이름으로 아파트도 샀고 좀 잘 살고 싶은데  악마가 시기하는가 두렵고 억울했다.


커튼으로 혼자만의 동굴을 만들고 꼼짝 안 하는 내가 걱정됐는지  오른쪽 침대 언니가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언니는 목사님의 아내였다. 교회 사람들이 끊임없이 면회를 와서 알게 되었다. 다짜고짜 언니에게 병원 지하에 있는 교회에 함께 가자고 했다. 그때까지 나는 종교가 없었다.


처음 들어간 교회에서 나는 빌었다. 둘째가 초등학교 입학해서 적응할 때까지 3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그래도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엄마가 옆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6년만 더. 그러다  예민한 사춘기에도 엄마가 필요할 것 같아 또 3년을 더하고. 그렇게  삶을 갈구하면서 오래오래 기도했다. 


전래동화에 '삼년고개'라는 이야기가 있다. 삼년고개에서 넘어지면 삼 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전설이 있는데 한 노인이 고개에서 넘어진 후 낙담하다가  병이 난다. 그런데  지혜로운 아이가 나타나 걱정할 것 없다고 한다. 삼 년 고개에서 한 번 넘어질 때마다 삼 년씩 더 살 수 있는 거라고.



다행히 우려했던 종양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뇌하수체 호르몬 조절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요붕증 진단을 받았다. 평생 호르몬제를 먹어야 한다. 약을 먹지 않고는 24시간 이상 버티기 힘들다. 12시간마다 약을 복용해야  갈증을 느끼지 않는다. 여행 갈 때 챙겨야 할 목록 1순위가 약이다. 처방받을 수 있는 병원도, 약을 구할 수 있는 약국도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진단을  받은 지 만 10년이 지난  오늘은 결혼 24주년 기념일이다. 나는 살아 있다. 물론 내 안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연가시가 다. 지난 10년 동안 년고개에서 여러 번 넘어지고 일어났다. 넘어지고 일어나면 그만큼 더 단단해진다고 믿으며 다. 이제  삶을 갈구하기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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