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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툰자 Apr 03. 2023

봄은 시다

봄에는 무엇이든 시가 된다

         

   친구가 정호승 시인의 시와  산문이 있는 책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를 읽고 있다고 했다. 이 책을 남편이 도서관에서 빌려와 먼저 읽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시를 썼단다. 그 시를 읽고 한 사람이 떠올라 빵 터졌다고 하길래  너무 궁금해서 (시인의 허락도 없이) 카톡으로 보내라고 했다.


  시를 보고 웃음이  터진 게 아니라 왈칵 눈물이 터질 뻔했다. 친구 어머니의 삶을  그린 한 편의 다큐멘터리였다. 머릿속에 생생한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는 시가  좋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시를 지으려면 꽤 오랫동안 그 사람을 생각하고 마음을 썼을 것이다.


"남편이 너한테 보냈다 그러면 엄청 부끄러워할 걸."

"이 정도면 시를 계속 야 해. 책을 내도 되겠어."

"누가 우리 엄마를 이렇게 생각하며 시를 쓸까 그런 생각은 들더라."

 "그럼 그럼 이런 사위 흔치 않아."



 친구랑 통화한 다음 날 새벽에 청암산에 갔다. 호수를 끌어안고 있는 야트막한 산이다. 두 시간 정도 걸리는 산길 대신 이 날은 서너 시간 걸리는 호수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입구 주차장에서 오른쪽으로 돈다. 우리는 일부러 왼쪽 길을 선택했다. 한적한 길에서 여유 있게 걷고 싶었다. 사람들이 앞뒤로 있으면 내 속도 대로 걷기가 쉽지 다. 빨리 가고 싶은데 좁은 길에선 추월하기 어렵고 천천히 가고 싶을 땐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니까 한쪽으로 비켜 서야 한다. 게다가 대화가 노출되기 때문에 이야기를 고르거나 하던 말을 멈추기도 한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호수에서 몰래 낚시를 즐기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 사람들이 없었다. 부지런한 딱따구리 소리, 맑은 공기와 촉촉한 수분이 산책길을 채웠다. 조금 걷다 보니 아담한 수선화 정원과 나무로 지은 휴게실이 나타났다. 층에 마련한 휴게실은 호수뷰로 물멍하기 딱 좋게 탁 트인 공간이었다. 마침맞게 배꼽시계가 울려 군고구마와 오이, 오렌지로 아침 식사를 했다. 짧은 식사 후 커피를 마시다가 친구가 보내 준 시가 생각나서  남편에게 들려줬다.


            

        내 친구 밭때기 (밭뙈기의 전라도 방언)

              

                                                                장명석

    

따스한 봄햇살 고개 내밀자

내 친구 하나 나를 부르네

겨우내 꽁꽁  얼어 잠자던 나를

보슬한 흙 향기로 깨워 달라고


어서 와 먼저 깨어 고개 내민 풀

놀던 손 호미 들고 가까이 와서

말끔하게 한가득 뽑아 달라고


허둥지둥 그냥저냥 아침을 뚝딱

웬수 같은 너를 보러 문을 나서고

밤새 잠든 손수레 흔들어 깨워

굽은 허리 의지한 채 달려가 보네


바닥에 철퍽 앉아 긴 호흡으로

상큼한 흙내음 물씬 맡으면

내 영혼 편안함이 가득 차오르고

너에게서 따스한 온기를 받아

홀로 지샌 무료함 온간 데 없네


한평생 나 홀로 거리 누비며

그 많던 식솔들 보살폈건만

내 곁에 딱  붙은 건 너뿐이구나

결같은 안식처 단짝 밭때기


네 행색이 어찌나 말끔하던지

이불 깔고 누워도 좋다 하고요

딸들은 너를 잊고 살라 하지만

먼저 간 님 볼 면목 없을 거 같아

오늘도 난 너에게 다가간

                                        (시인에게 허락받고 올림)



그림 같은 호수를 앞에 두고 시를 읊으니  뻣뻣했던 가슴이 말랑말랑해졌다. 자연 속에서 시를 낭송한 것도 처음이었다. 남편도 감탄했다.

"완전 시인이네.  문학청년이었나 봐."

  

세 시간 반을 걷고 돌아오니 몸은 노곤노곤한데  뭐라도 쓰고 싶었다. 까칠한 마음이 아닌 보들보들한 마음을.


    

          봄은 시다


봄바람이  깨우고

봄볕이  쓰다듬어 주니

여기저기서 시가 피어난다


하얀 목련꽃 시

분홍 진달래 시

노란 수선화 시

초록 이파리 시

3년만에 봄소풍 간다고 좋아하는 아이들의 웃음꽃 시


부지런한 딱따구리도 시를 노래하고

호수 위의 윤슬도 시를 그리고

산책하던 아줌마, 아저씨도 시를  쓴다


봄은 봄이다

풀꽃을 들여다보고

나무를 올려다보고

호수를 바라보고

사람을 마주보고 웃는다




한정원 시인은 에세이 《시와 산책》에서 '산책할 때 내가 기웃거리고 궁금해하는 것들도 모두 그렇게 하찮다. 그러나 내 마음에 거대한  것과 함께  그토록 소소한 것이 있어, 나는 덜 다치고 오래 아프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친구 어머니의 밭뙈기처럼 다른 사람에게는 별 거 아니지만 내게는 소중한 무엇이라면 하찮고 소소해도 잘 가꾸고 보살펴야겠다. 아프지 않고  함께  웃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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