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해서가 아니라 실패가 두려워 도망친 이야기
‘30분 남았다. 어떻게 하지? 이게 꿈이었으면...‘
편집기 화면 속 영상이 흐릿하다.
키보드 위 손가락이 달달 떨린다.
이제 곧 내가 쓴 대본으로 더빙을 하고 자막을 입혀야 하는데...
3분 남짓한 짧은 영상이지만,
초 단위로 나누어진 화면 한 컷 한 컷을 채워야 하는 말과 글은 억겁만큼 무겁고 길다.
“이게 뭐야?! 그냥 화면을 설명하고 있잖아~
어차피 보면 다 아는 내용을 뭐하러 또 쓰고 있어? “
밤을 꼬박 새워 쓴 대본이었다.
담당연출의 쓴소리가 머릿속에 커다란 빗장을 걸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초조하다. 심장이 조여든다. 이대로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는 생각만 맴돈다.
아무래도 난 재능이 없나 보다. 내 길이 아닌가 보다. 이 프로그램만 끝나면 다른 일을 찾아봐야겠다.
어린 시절부터 라디오 듣는 걸 좋아했다. 따뜻한 음악이 흐르고, 마음을 다독여주는 목소리가 있어 좋았다.
이런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대학교 4학년 때 우연히 구직 포털사이트에서 TV 다큐멘터리 막내 작가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물론 난 작가로서의 경험도 경력도 전무한 생초보였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몰랐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0%, 덤벼서 도전하면 적어도 50% 확률의 기회가 주어진다. 도전이 없으면 시작도 없다. 망설임 없이 이력서를 보냈다.
나의 방송국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시작하다 보면 결국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사원증(계약직 프리랜서도 프로그램 소속으로 사원증을 만들어 주더라.)을 목에 걸고 당당히 방송국을 드나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써 꿈을 이룬 듯했다.
나는 지리산 반달가슴곰 방사 프로젝트를 다루는 다큐멘터리팀 소속이었다. 제작 기간이 1년 정도 소요되는 장기 프로젝트였다. 메인 작가를 도와 프로그램과 관련된 자료를 조사하고 연출팀이 찍어오는 영상들을 정리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연출팀은 대부분의 시간을 지리산에서 보냈다. 자연 다큐멘터리가 그렇듯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 주구장창 찍어대는 영상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낯설고 벅찬 일에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저 처음 경험하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드디어 1년의 시간이 흘렀다. 가끔은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싶게 만들었던 두서없던 영상들이 하나의 작품이 되어 TV 브라운관을 통해 방송됐다. 뭉클했다. 저 작품을 만든 구성원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은 한 가지.
프로그램이 끝나는 순간, 난 다시 일자리를 찾기 위해 버둥대야 하는 백수라는 것.
프로그램 단위로 구성되는 방송 제작팀 대부분은 계약직 프리랜서이다. 그렇다 보니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계속 프로그램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이번엔 함께 일한 연출팀의 권유로 또 다른 프로그램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경력이 쌓이면서 내 위치는 더 이상 자료조사만 하는 막내가 아니었다. 이제 프로그램 중 작은 방송 꼭지 하나 정도는 구성도 하고 대본도 써야 했다. 정식 작가로 인정받은 것이니 기뻐할 일이지만, 역할과 책임이 커질수록, 어쩐지 난... 두려움이 앞섰다.
방송은 정말 해보고 싶던 일이었다. 다행히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하면 할수록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었다. 내가 정말 이 일을 좋아하는 것인지. 그저 ‘방송’이라는 매체를 동경하고 앞뒤없이 덤빈 것은 아닌지. 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있는 것인지. 제대로 공부해본 적도 배워본 적도 없어 눈치로 버텨온 시간들이 ‘실력 없음’으로, ‘재능 없음’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도태되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3년 뒤, 난 방송일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했고 다른 길을 향해 달렸다. 정작 어린 시절 꿈꾸던 라디오국은 발도 들여놓지 못한 채.
주변 지인들이 물었다. 그 좋은 방송국 일을 왜 그만두었냐고.
난 ‘막상 해보니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다르더라, 일 자체가 너무 불안정해서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다, 더 늦기 전에 맞는 일을 찾아야 했다’라고 답했다.
스스로에게조차 그것이 진짜 이유인 양 세뇌했다.
그리고 그때는... 진짜 그런 줄 알았다.
지금 되돌아보면, 일을 성급히 그만둘 합당한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20대의 나는 모든 것이 불안했다.
나의 선택이, 나의 능력이, 사람들의 평가가, 내가 좇고 있는 모든 것이 허상이 아닐까 두려웠다.
결국 그 불안과 두려움이 나를 멈춰 세웠다.
난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다. 충분히 열정적이지 않았고,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실패하지도 않았다.
그저 실패로 끝날까 봐 두려운 마음에 먼저 도망쳤던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