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의 연휴를 찾아 뒤적거리다가 설 연휴 4일을 발견하고 그 뒤로 3일을 더 욱여넣으면 주말 합해서 9일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자전거여행에는 그리 긴 기간이 아니다. 이번에 내가 여행지를 탐색하면서 세운 기준 몇 가지가 있는데 “가까운 곳, 따뜻한 곳,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일 것이다. 왜 굳이 영어냐 하면... 그동안 남편과 세계여행을 다니면서 절실히 느낀 것이 “영어는 여행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 무기”라는 것이었다. 유럽 각 나라는 물론 스페인어권 남미에 가도, 프랑스어권 모로코엘 가도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쉽게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군분투 영어 배우기에 돌입, 몇 년 전 인도여행에서 비교적 편안하게 영어로 소통하는 나를 발견하고 더욱 자신이 붙어 내가 미국에서 산다는 생각으로 영어환경을 만들어 살았고 직업까지 영어친화적으로 바꾸었다.
싱가포르가 좋겠다. 6개월 전에 비행기표를 사 놓고 준비를 하는데, 나 혼자 가려니 그리 큰 준비가 필요치 않다. (남편은 도시여행에 관심이 없는 사람인지라 한 번 운 띄워 보고는 권하지도 않았다.) 내가 손쉽게 다룰 수 있기에는 접이식 미니벨로가 좋겠고 텐트도 1인용, 여름나라이니까 옷도 입은 옷 외에 하나씩만 더 준비하면 된다.
설 연휴가 시작되자 마자 집을 나서 여섯시간 정도 비행 후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당도하니 저녁 8시. 굳이 그 시간에 시내로 들어가 호텔을 찾자니 돈이 아까운 생각이 들어 공항 출발동으로 가서 하룻밤 숙박을 한다. 구석 ATM기 옆에 카펫도 깔려있고 작은 은박매트에서 침낭을 뒤집어쓰고 자고 일어나니 새벽 5시. 준비하고 슬슬 공항 밖으로 나가니 따뜻한 열대의 공기와 습도가 훅 느껴진다. 큰 국제공항울 벗어나는 도로를 자전거로 달리기는 매우 어렵다. 터미널4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나가라는 공항직원의 권유대로 자전거를 접으려는데 새벽 어둠속에 마주오는 대여섯명의 바이커가 보인다. 헬멧도 없고 백팩도 없으니 로컬바이커다.
시티로 가려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었더니 자기들이 그쪽으로 가니까 따라오라고 한다. 어반픽시를 탄 10대 여섯명과 공항도로를 종횡으로 달리고 간혹 역주행까지 하며 이스트코스트팍으로 들어섰다. 스피커에서 쿵쿵 랩을 울리고, 뒷바퀴슬립으로 박자를 맞추는 유쾌한 소년들이 결국은 내 첫 목적지인 Depot walk의 교회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가는 과정에서 싱가포르중심가의 랜드마크 빌딩들과 명소들을 주마간산으로 신나게 훑으며 달린다. 사이클팬츠에 땀투성이로 뛰어들어간 교회에서 동서고금 공통의 Bible로 예배를 드린 후 다시 바쁘게 달려 말레이시아로 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중심가 버스터미널로 간다.
서울 크기만 한 도시국가 싱가폴이 내 흥미를 끌 만한 것은 별로 없다. 내 목적은 따뜻한 나라에서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는 것인데 해변공원 10키로 남짓에 도시 신호등 사이를 가다서다 하는건 한국에서 실내 평로라 타느니만 못하다. 그래서 말레이시아의 말라카로 올라가 거기서부터 다시 싱가포르로 타고 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도시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말라카에서 1박 하며 한나절을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딸이 코리아 빅팬이라는 호텔 사장님께서 아침밥을 사 주시며 내 계획을 검토하는데, 말라카에서부터 싱가포르는 길이 위험하고 거리가 멀어 귀국날짜를 맞추기 쉽지 않을테니 조호르바루에서 출발하는 방향으로 생각해 보라고 하신다. 조호르바루는 국경 바로 위 도시라서 싱가폴과 너무 가까운데... 그렇다면 돌아서 가면 된다. 가까운 길 놔두고 저~~기 동쪽으로 돌아 페리를 타고 해협을 건너서 돌아가면 되는거지.
조호르바루 가는 버스를 일부터 저녁 늦게 예약했다. 버스에서 조금 자고 터미널에 내려 아침까지 자면 하룻밤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여행에서 매우 아까운 부분이 숙박비이다. 저녁에 들어가 잠만 자고 아침 일찍 떠나야 하고, 하루 샤워하고 피로를 조금 풀었다 해도 다음 날이면 다시 긴장과 먼지, 땀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좋은 호텔이 그리 절실하지가 않다.
우리나라의 설 명절만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의 설도 대단해서 국경간 민족대이동이 비슷하게 이루어진다. 덕분에 3시간 걸리는 거리를 다섯시간에 가니 나처럼 어디서든 자는게 목적인 사람에게는 너무도 고마운 일이며 길이 좀 더 안 밀리나 싶은 바램까지 갖게 된다.
새벽에 조호르바루 터미널에 도착해 인디언 소녀와 다리 엇갈려 벤치에 누워 한숨 더 잔 뒤 부슬부슬 비 내리는 길로 나섰다. 싱가포르 가는 페리를 탈 선착장까지는 135km. 이틀 혹은 사흘을 달리면 되겠다. 빗속에서 비닐로 덮은 스마트폰의 지도 보기가 매우 어렵다. 특히 고가도로와 정션, 인터체인지등이 얽혀있는 지점에서 내 길을 찾는다는 것은 수학문제를 푸는 정도의 스트레스를 준다. 그럴때는 묻는게 최고, 길가 식당의 사람들에게 가까운 목적지를 물으니 자기 오토바이로 안내해 복잡한 지역을 빠져나가게 해 주신다. 물론 자전거로 오토바이를 따라 고가도로 업힐을 하면서 게거품을 물긴 했지만 그리 많이 안쳐지고 씩 씩 올랐다는 자랑스러움에 서로 엄지 척.
비는 점점 거세져서 우리나라 장마철의 집중호우 수준이다. 길 가 농장으로 들어가 잠시 쉬는데 뜨거운 물과 커피를 내 주시는 주인께서 걱정을 하신다. 이제부터 국경까지는 계속 왕복2차선 길, 빗소리 물소리 차소리의 음향효과가 극대화 되고 고르지 못한 아스팔트 웅덩이에서 퍼부어지는 차바퀴의 물세례가 상황을 몇배 크게 느껴지도록 하지만 한편의 생각은, 폭우속에 운전자들도 속도를 낮추고 더 조심해서 운전한다는 것이다.
자전거여행은 길을 따라서 간다. 그 길은 거의 차들과 공유를 한다. 항상 여행을 시작할때면 마음이 가라앉고 모든 사고의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인정하며 시작하는데, 그것이 두려우면 공원에서 혹은 강변에서, 자전거 전용도로만 따라 다녀야 한다. 그러면 내가 가고싶은 곳, 내가 보고싶은 곳으로는 어떻게 가나. 강풍과 눈사태와 크레바스의 위험을 알면서도 산에 오르는 사람이나, 길 위의 위험을 알면서도 달리는 자전거여행자나, 내 앞길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고 걸어 들어가는 우리 인생이나 뭐가 다를까. 내 호흡의 한순간까지도 신의 섭리에 들어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모든 상황과 결과에 긍정하겠다는 편안함이 있다. 실제로 내 30cm 옆을 스치는 트럭바퀴의 위험을 그동안 여행에서 열 번은 경험했을 것이다. 돌풍에 말려 길 가운데로 던져지기도 했고 악명높은 그 공항의 경비행기를 시골길 달리듯 타 본적도 있다. (며칠후 그 공항에서 그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그러나 지금 나는 이렇게 건재하고 내 예정된 시간만큼 또 살아갈 것이다.
말레이시아 숲길 사이 도로의 로드킬 당한 짐승은 유독 뱀이 많다. 그런데 굵기가 내 허벅지만 하고 길이가 내 키만큼은 될 듯하다. 그 옆을 지날 때마다 에고, 한숨이 나오고 부디 살아있는 녀석이 나타나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오후 늦게 비가 약해지고 작은 도시를 만났다. 35,000원의 호텔에 들어갔는데 천정에서 늘어뜨린 식물덩굴과 자연목 침대프레임, 한쪽 벽면의 수풀장식, 사슴머리 장식이 마치 [요정의침실]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물론 그 요정의 방은 곧 냄새나는 양말, 흠뻑 젖은 옷가지들이 널려 더욱 야생화 되었지만 말이다.
하룻밤 푹 쉬면서 다음날 오전까지 차이나, 말레이, 이슬람, 인디아등 여러 음식을 전전하며 나름 미식을 즐기고 페리터미널로 간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길 가 하천의 수위는 배로 오르고 길 낮은 지대는 개울이 되었다. 내가 정한 페리터미널을 점검차 여러 사람에게 물었는데 결론은, 잘못된 지점을 찍었었다. 길 가 안전점검 나온 공무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회의 결과, 다른쪽 터미널로 방향을 수정하고 진행했다. 선착장이라 하면 우리나라의 여수, 완도, 무의도, 석모도 등등 횟집에 조개구이, 해물칼국수등 식당 많고 모텔들 블링블링한 신나는 곳으로 상상했기에 그런곳에서 하루 더 머물고 다음날 싱가포르로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말레이시아의 패리터미널은 정말, 딱, 페리 터미널이었다. 고급 리조트단지를 통과해 바닷가 코스트에 공원처럼 예쁘게 자리한, 그 안에 무료카페와 스넥판매점 하나 있는 단층 건물이었다.
내가 도착한 시간이 3시이고 배는 5시에 있다. 여기서 하루 머물겠다고 여유롭게 저녁에 도착했으면 또 페리터미널 벤치에서 자던가 필로티에 텐트를 쳐야 할 뻔 했다.
대양에 노출된 이쪽 만은 몬순시즌 중 일기가 불량할 때는 배를 운행하지 않고 해협에 있는 두 번째 경유지 겸 국경사무소까지 버스로 승객을 이송해 이미그레이션 수속을 하고 페리로 갈아타게 한다. 말레이해협을 건너는 동안 바다를 꽉 채운 전세계의 컨테이너선박 수백대가 계속 보인다. 금융, 무역 강국이라는 싱가포르의 위상이 눈앞을 압도한다.
싱가포르의 창이 터미널에 도착하니 저녁 7시. 할 일을 끝낸 페리터미널은 싹 비워져서 기댈곳이 없다. 우선 들어오는 버스를 타고 가장 가까운 MRT(전철)역으로 간다. 내 휴대폰은 말레이시아 빗속에서 습기가 너무 차 충전을 할 수 없다고 경고사인을 보낸지 오래고, 정류장에서 유쾌해 보이는 두사람에게 검색을 부탁한다. 백패커스호텔이나 도미토리를 찾아 달라고 하니 리틀인디아 거리에 있는 최저가 호스텔의 주소를 찾아주었다. Lavender역을 나와 자전거를 펴고 짐을 묶을때는 자전거여행을 많이 했다는 중국인 아저씨 한 분이 흑기사로 나타나 호스텔 로비까지 데려다주신다. 맛있는 식당, 호커센터, 저렴한 마켓 위치까지 다 일러주고 내일은 자전거로 이스트코스트 팍 라이딩 안내도 해 주실 수 있다는데 너무 말이 많으셔서 폴라이트 하게 노땡큐.
딱 싱글매트리스 하나 크기에 앞은 커텐으로 가려지고 한방에 16개의 칸이 아래 위로 있는 도미토리는 어찌나 아늑하고 조용한지 집에서보다 더 달게 잠을 잤다. 싱가포르의 특징인 호커센터로 브런치를 먹으러 나갔는데 지난 주일 교회에서 본 brother & sister를 만났다. 좋은 음식을 기쁘게 대접받고 헤어져 다음 일정은 싱가포르에 사는 자전거동호회 회원의 집에 초대받아 간다. 블로그에 매일 일기를 썼는데 그걸 보고 연락이 온 것이다. 그 댁까지 지도를 보니 15키로 라는데 도시 골목을 자전거로 달리는게 더 어렵다. 3시간째 14키로에서 줄어들지를 않는다. 덕분에 시내 구석구석 본의 아니게 관광을 하다 결국은 항복하고 MRT를 타고 갔다. 부부가 함께 자전거여행을 시작했고 올 5월에 프랑스행 티켓을 사 놓았다는 유쾌한 가족이 차려주신 맛있는 저녁식사와 여행, 장비 이야기로 [자전거 만세]를 외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른바 자덕들은 여행과 장비 이야기만으로도 3박4일 수다를 떨 수 있다.
마지막 날은 싱가포르 남단 센토사섬으로 들어갔다. 호텔과 쇼핑과 유니버셜, 엑티비티의 결집지인 센토사이지만 비치도 있다. 적도 근처 나라에 왔는데 나도 야자나무 그늘 아래 비치에서 휴양지 감성은 좀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해안도로를 달리다 옆에 산으로 오르는 업힐을 보자마자 빨려들어가듯 그리로 올라가게 되었고 더군다나 네츄럴로드를 발견한 순간 씩씩한 나의 자전거는 흙과 돌길을 즐기고 나무뿌리 요철을 달리고 있었다.
산 꼭대기에 있는 150년전 전투용 포대를 보며 그곳 안내판에 있는 사진 속 옛사람들이 이 센토사섬이 놀이동산이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의 주유를 끝내고 싱가포르를 떠나 인천공항으로 돌아왔다. 출국할 때 집에서는 낡아 버려야 할 외투를 입고 나와 공항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비행기를 탔던 터라 집에 갈 때는 얇은 타이즈, 반바지에 바람막이자켓 하나이다. 그래도 공항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가까운 택시로 달려갈 수 있어서 추위에 떠는 일 없이 집 안까지 도착했다. 그동안 설 이후 맹추위로 홍천 산골은 –23도까지 갔다고 한다. 뜨거운 적도의 열기를 담아와서 달콤한 피로감에 이틀을 자고 또 자고... 이제 책상앞에 앉아 지도를 보며 다음 여행지를 검색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