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인생영화 8

글을 마무리하며

by 땅콩빵


올해 초 정리한 '2020 인생영화 8'은 2020년 기준 인생영화라고 생각한 8편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글이었다. 그때까지 고심해서 생각한 영화 목록이 8개였는데, 올해 생각지도 못하게 내 인생에 끼어든 영화가 한 편 더 있다. 그래서 사실 수정하자면 '2020 인생영화 9'가 맞는 것이다. 내 인생에 새로 들어온 영화는 데이빗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다.


<이레이저 헤드>는 공포영화로, 나는 공포물을 못 보기 때문에 내 인생영화 목록에 있어 생소한 영화일 수 있다. 이 영화는 자극적인 영화가 필요했던 밤 거실에 불편한 자세로 보게 된 영화다. 포스터와 스틸컷부터 강렬해서 정말 정신 쏙 빼놓겠구나 싶었는데 정말 너무 쏙 빼놔서 그 날 밤 악몽까지 꿨다. 근데 이 영화는 무서움보다는 더 무의식에 있는 무언가를 건든다. 악몽을 꿀 때 느끼는 불쾌함 같은 거 말이다. 영화는 현실과 꿈의 경계가 허물어져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꿈인지 알 수 없다. 그 경계는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나에게도 해당 되어,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마치 누군가의 악몽 속에 들어가있는 기분이 든다. 나는 시청각으로 영화를 보는 것 뿐인데 어떻게 꿈 속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이 느끼게 하는지, 정말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꿈에서 느낄 수 있는 뚝뚝 끊기는 어딘가 이상한 흐름이 영화에서 느껴진다. 영화는 꿈처럼 말도 안되게 이리저리 이야기가 뒤죽박죽 섞여 있다. 기괴하고 이상하다. 엄청 많은 영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영화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영화는 정말 난생 처음이었다. 감독이 남의 꿈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거나 들어가서 기록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이렇게 꿈에서 느끼는 이상한 기시감, 괴리감 같은 걸 캐치하고 화면만으로 느끼게 하는지 이상하고 신기할 뿐이다. 나는 이 점 하나만으로 이 영화를 최고의 공포영화라고 생각한다.


주제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올해 봤던 영화 중 좋았던 목록을 이야기하고 싶다. 사막에서 이루어지는 독특한 이야기 <바그다드 카페>, 사랑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블루 발렌타인>, 영화를 보며 애정을 다시 확인 할 수 있었던 나에게 완벽한 앵글과 이야기 <친애하는 동지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우주의 역사>, 강렬한 흑백 이미지가 돋보였던 <라이트 하우스> 아쉽게 2020 인생영화엔 들어가지 못했지만 너무 좋아서 짜릿했던, 혹은 정수리 주변을 맴돌던 영화들이다.


아직 한 달 가량 남은 2020년이지만,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못 볼 게 뻔하고 아직 마무리 하지 못한 일들 때문에 올해 영화를 더 볼 수 있을진 모르겠다. 그럼에도 올해는 단편을 많이 본 해라 개수로만 따지면 몇 년만에 신기록이다. 올해는 영화계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지켜봐야하는 혼동기다. 그 흐름에 잘 따라 갈 수 있을만큼만 세상이 변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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