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배달
1년 동안 두 형과 할머니와 함께 살던 친구네 집에는 시골살이를 정리한 부모님과 동생들이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온 가족이 모여 산 지 얼마 안 돼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사망 소식을 들었다. 반장을 통해 조의금을 전달하고 일주일이 지나도 친구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은 반장을 통해 친구의 근황을 알아보라고 지시했지만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우리 반 친구 중에서 제일 가깝게 지내던 친구였다. 중학교 2학년 초에 아버지를 잃고 내성적인 성격과 우울증으로 소심해진 내게 친구가 되어준 친구였다. 3년 전에 내가 겪은 슬픔에 잠겨 있으리라 생각하니 원식이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나타난 원식에게
‘학교에는 왜 안 오니?’
‘학교 그만두려고.’
‘왜?’
‘동생들도 있고 나까지 학교에 다니면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형이 둘 있지만 둘째 형은 군대에 가 있었고 막노동하는 큰형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그만둔다고….’
‘공장을 다니며 야간학교를 알아보려고.’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골똘히 생각하다가 우리 반 친구 중에서 신문 배달하는 친구가 생각났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나는 겁도 없이
‘나…. 신문 배달할 건데, 너도 같이하며 학교 다니면 되잖아. 집에 부담 주지 않고.‘
내 말을 듣고 나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간신문을 돌리는 수남이와 석간신문을 돌리는 영재, 잠이 많은 나는 아무래도 방과 후에 할 수 있는 석간을 돌리기로 마음먹고 단짝 친구들과 연합하여 영재의 소개로 00지국에 찾아갔다. 연창, 홍이는 도심 번화가를 선택했지만 수줍음이 많은 나는 시의 변두리를 선택했다. 이 구역을 담당하는 총무님이 얼마나 좋아하지는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도심의 많은 사람의 시선이 내게는 큰 부담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신문 배달은 얼마 후 원식이도 합류하면서 연창이가 자주 쓰던 우리는 ’동반자’라는 단어 속에 우정을 쌓아갔다.
100부가 넘은 신문을 반쯤 둥글게 말아서 왼쪽 옆구리에 끼고, 총무의 가르침대로 시내버스를 올라타며 신문 한 부를 버스 기사님 옆에 묵례하며 놓으면 기사님은 고개를 끄덕인다. 이것이 버스 요금인 셈이다.
이렇게 버스를 타고 도심을 한참이나 지나 한적한 도시 외곽의 병목안(안양9동) 버스 종점에서 내려서 신문 배달을 시작한다.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가며 혹여 빠트리는 집이 없도록 신경을 곤두세우며 이집 저집 신문을 배달한다. 평지의 주택가를 끝내면 몇 집 안 되는 창박골과 수리산 계곡물 따라 오르고 오르다 보면 할아버지와 젊은 부부와 아기가 사는 도자기를 굽는 집과 그 윗집을 끝으로 배달이 마친다. 외부 소식을 하루도 빠짐없이 전해 받는 고마움의 표시인지 80년 12월 크리스마스 선물로 도자기로 만든 필통을 선물로 받았다.
한 번은 창박골에서 신문을 배달하고 병목안 버스 종점으로 되돌아 나와 수리산 골짜기로 가는 길이 싫어서 창박골 꼭대기 집에 신문을 배달하고는 능선을 가로질러 수리산 골짜기를 갈 생각으로 산 능선에 올라섰다. 가시넝쿨을 헤치며 가도 가도 원하는 골짜기는 보이지 않아 이런 무모한 행동을 후회하면서 분노를 삭이기 위해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읊조리며 덤불 숲을 헤쳐나갔다.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길을 나설 때의 쑥스러운 감정이 사라질 즈음, 골목길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멀쩡하게 생겨서 신문 배달이나 하고….’
여인네들의 쑥덕거리는 소리는 관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문 부수를 150부를 넘겨 버렸고 그 후론 사복 대신 교련복을 입고 신문 배달을 했다.
신문을 배달하다 보면 대문 입구의 사나운 개를 제압하는 법, 아파트를 담당하는 언수를 통해 현관문 틈새를 이용하여 신문을 투척하는 법, 경쟁 신문사 표식을 변조하는 법, 여분의 신문을 활용하는 법, 등은 시골뜨기인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이 보게 되고 들리지 않던 귀가 열리게 된 계기는 연창이 말대로 우린 동반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졸업식 날 원식이는 조용히 내게 다가와서 ‘고마워’라며 한 마디 건네고는 멋쩍은 듯 미소를 지었다.
260217
도자기 필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