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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톡톡부부 Jun 25. 2020

45. 1,032km

시애틀, 미국

우리는 차가 없다. 인천에 거주하면서 직장생활을 서울에서 했는데 대중교통을 타고 다녀서 자동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혹시 차가 필요하면 부모님 차를 하루 빌려서 사용하면 되었기에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던 중 추석 명절이 왔고, 직장인들에게 빛과 같은 휴일이었다. 처갓댁에 과일을 드리러 아버지께 차를 빌려서 가고 있었다. 신호 대기를 하며 정차를 했는데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뒤에 오던 차가 가만히 정차해 있는 우리를 박아버렸다. 다행히도 다치지는 않고 많이 놀라기만 했는데, 혹시 모를 상황에 일주일간 병원 신세를 보내야만 했다. 그 이후로 운전하는 게 무섭고, 싫어졌다.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교통사고라는 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운전을 하는 날이면 늘 긴장하게 된다.


운전을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여행하면서 어쩔 수 없이 운전을 해야 하는 일이 총 3번 있었다. 유럽 캠핑 여행, 호주 워킹홀리데이, 그리고 미국 서부 로드 트립. 여행 중 운전을 했던 첫 번째는 유럽 캠핑 여행인데, 아내는 국제 운전 면허증을 신청하지 않아서 100% 내가 해야만 했다. 아내는 이미 10년 전에 면허를 취득했지만, 평소에 운전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롱 면허나 다름없었다. 원래 운전을 싫어했는데 매일 100km 이상씩 4개월 동안 운전을 하고 나니, 운전이라면 이제 치가 떨린다.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상황은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할 때였는데, 운전면허증이 있으면 호주 내에서 공증을 신청해 운전을 할 수 있었다. 운전을 번갈아 하기 위해 같이 신청을 했고, 호주 생활을 하면서 아내에게 조금씩 운전을 가르쳐 주었다. 운전을 곧잘 하는 아내가 대견스러웠고, 알려주는 보람을 느꼈다. 다만 호주는 운전대가 우리나라와 반대인 왼쪽이라는 점이 우리나라와는 조금 다르다.



여행 중 마지막으로 운전을 했던 곳은 미국 서부 로드트립이었다. 미국으로 향하기 전 한국에 들려 호주에서 생활했던 짐을 정리하고 다시 배낭여행 짐으로 꾸리면서 이번에는 아내와 나, 둘 다 국제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았다.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따라 여행을 하고 애리조나주로 향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협곡이 있는 그랜드 캐니언까지 여행을 하고, 다음 목적지인 미국 북쪽 옐로 스톤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겨울철에는 안전상의 이유로 옐로 스톤 국립공원 근처의 도로를 폐쇄하며 관광객들이 여행을 할 수 없게 통제를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졸지에 갈 곳이 없어진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때가 솔트레이크라는 동계 올림픽이 개최했던 미국 서부 유타주의 한 도시인데, 캘리포니아로 돌아가자니 렌터카를 반납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고, 다른 곳을 가자니 부족한 상황이었다.


평범한 날이었다면 캘리포니아로 향해서 세계에서 아름답다고 소문난 캘리포니아의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고,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여유롭게 구경하면 된다. 하지만 정확히 2일 뒤에 아내의 생일이었고, 우리는 특별한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아내에게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어봤다. 아내는 곰곰이 고민을 하더니 스타벅스 1호점이 있는 시애틀에 가고 싶다고 얘기했다. 주섬주섬 핸드폰 지도 어플을 켜서 거리를 확인해봤다. 헐.. 말도 안 되는 거리다. 어플에서 안내하기로는 솔트레이크에서 시애틀까지는 1,350km를 달려야 한다. 쉬지 않고, 도로가 막히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약 13시간을 가야 하는데 불가능에 가까웠다.

“여보! 우리 1,000km 넘게 운전을 해본 적도 없고, 너무 힘들 것 같은데? 중간에 피곤해서 둘 다 퍼지면 당신 생일을 어딘지도 모르는 미국의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보낼 수도 있어..”
“정말 불가능한 거야? 운전을 나도 같이 하면서 도와주면 되잖아..”
“불가능한 건 아닌데 진짜 힘들 것 같아..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는 건 어때?”
“…”

상황에 맞춰 현실적인 방안을 제안했지만 아내는 탐탁지 않아했다. 캘리포니아로 돌아간다고 해도 딱히 갈 곳이 있던 것도 아니고, 옐로 스톤 국립공원도 못 가게 되었는데 시애틀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쉬운 아내는 금세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내의 우는 모습에 적지 않게 당황한 나는 아내를 안아주면서도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시애틀로 가자니 고된 여행길이 될 것 같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가자니 아내의 슬픔이 꽤나 오래갈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지도 어플을 켜서 확인해보고 굳게 마음을 먹고 아내에게 말했다.

“그래! 시애틀로 가보자! 생일인데 당신이 원하는 곳에 가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거 아니야?”


우리의 여행은 정해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거 하고, 먹고 싶은 음식 먹고, 보고 싶은 곳 보려고 여행을 떠났는데, 단순히 힘들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시애틀에 가는 걸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아내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고,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기에 우리는 시애틀로 향하기로 했다.

우리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김없이 날은 밝았고, 몇 시간 운전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우리의 계획은 이렇다. 처음 휴게소까지는 내가 운전하고, 그다음은 아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한 뒤, 남은 거리는 내가 운전하기로 했다. 목적지는 없다. 하루 종일 운전해서 시애틀 쪽으로 최대한 가까운 도시까지 갈 수 있는 만큼 가야 한다. 절대 무리하지 않고 2시간에 한 번씩은 휴식을 취하며 시애틀을 향해 달려가기로 했다.


첫 번째 휴게소에서 휴식을 갖고 아내에게 운전대를 맡겼다. 호주에서의 운전 경험이 있었지만 불안한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내가 운전하는 구간은 일직선의 끝을 알 수 없는 고속도로였다. 아내에게 도로가 끝나면 약 2시간 정도 되니까 그때 나를 깨우라 말을 하고 잠시 눈을 붙였다. 불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피곤함에 이내 잠에 들었고,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비몽사몽 상태로 시계를 보니 아내가 운전한 지 2시간 30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아내는 아무리 운전해도 도로가 끝나지 않는다며 피곤하다고 나를 깨웠다. 대충 확인해보니 한 번에 300km를 쉬지 않고 달렸던 것이다. 잠시 차를 세우고 2시간 넘게 홀로 운전을 한 아내가 대견하면서도 기특했다. 시애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남은 구간은 내가 운전을 하기로 했고, 아내에게는 조수석에서 조금 쉬라고 말했다. 2시간 반 동안 외롭게 운전을 해서 그런지 아내는 금세 잠을 청했다. 밝았던 주변은 어느덧 깜깜한 어둠이 찾아왔다. 아내가 2시간 넘게 운전을 한 덕분에 나는 체력이 넘쳤고, 예상보다 시애틀에 더 가까운 도시까지 갈 수 있었다. 솔트레이크에서 출발한 지 11시간 만에 케너윅이라는 워싱턴주의 소도시에 도착을 했다. 운전한 거리는 정확히 1,032km. 서울에서 부산까지 대략 400km라고 봤을 때, 왕복으로 서울에서 부산을 갔다 온 뒤 다시 서울에서 속초까지 간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말이 안 되는 거리이지만 미국에서는 가능한 거리였다.



시애틀 스타벅스 1호점
시애틀 스타벅스 1호점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서로를 토닥이며 격려를 했고, 1,032km 거리를 하루 만에 운전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걸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운전을 싫어하지만 이날만큼은 아내의 생일을 시애틀에서 보내기 위해 서로가 고군분투했고, 덕분에 세계여행 중 맞이하는 아내의 세 번째 생일을 미국 시애틀에서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운전을 싫어한다고 해도, 아내가 행복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루를 꼬박 운전으로 시간을 보냈지만, 그렇게 고생을 했기에 우리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생겼다. 시도도 하지 않고 후회를 하기보다는 일단 해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교훈을 배웠다. 만약에 이런 상황이 또 생긴다면 이제는 고민도 없이 출발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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