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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톡톡부부 Jul 17. 2020

딱 걸렸어 너!

스탠소프, 호주

우리는 7년의 연애 그리고 5년째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남편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딱 한 가지 고쳤으면 하는 것을 꼽으라면 바로 흡연이다. 남편의 건강을 위해서도 있지만, 가까이서 풍겨오는 지독한 냄새에 인상이 찌푸려지고 나의 예민한 호흡이 순간적으로 가빠진다. 이 사실을 아주 잘 아는 남편은 흡연을 할 시간이 다가오면 살며시 눈치를 보고 자리에서 싹 사라진 후 돌아와서는 물도 마시고 가글도 하며 냄새를 없애려 애쓴다. 하지만 비흡연자인 내가 느끼기엔 남편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코끝에 전해지는 요상하고 기괴한 냄새들이 스물스물 퍼진다.

솔직히 여행이 길어지면 자연스레 흡연을 멈출 줄 알았다. 여행경비는 내가 철저히 관리하고 있었고 흡연 관련해서는 일체 공용 자금을 지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동안 모아두었던 쥐꼬리만큼의 용돈과 결혼할 때 받았던 축의금을 야금야금 써가며 자기만족을 해야 했다. 평소에는 흡연을 해도 한 번의 째림으로 위기를 모면하곤 했지만 술을 마시는 날엔 흡연과 흡연의 시간이 점차 짧아지니 서로 파이터가 돼버린다. 기분 좋게 놀다가도 머무는 공간에 인상을 확 찌푸리게 만드는 담배의 냄새가 퍼지는 순간, 말투가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서로 거칠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남편은 수도 없이 금연을 선언했다. 필요한 물건이 있거나 내 기분을 풀려하거나 기념일 적인 행사에 앞서서 이번 달 까지만 피고 끊을게~라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금연을 선언하는 남편의 모습을 증거 자료로 남기기 위해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어 보기도 하고 자필로 서명을 받아보기도 했지만 그 다짐은 길게 가지 못했다. 씩씩대는 내 모습을 보며 남편은 귀엽다는 듯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신난 표정을 짓는다. 그저 순간의 내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도구로 금연이라는 단어를 마구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남편의 머리를 잘라 주다가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오빠 금연 언제 할 거야? 이제 끊을 때도 되지 않았어? 내가 언제까지 오냐오냐 봐줄 것 같아?”라고 물어보면 마치 기계처럼 준비된 멘트를 날린다. “이제 안 필게. 내가 만약에 피면 네가 원하는 거 뭐든 지 다 할게” 기계같은 남편의 멘트에 “그럼 또 피면 삭발해” 당차게 말했다. “머리 밀라고? 알았어. 이번엔 진짜 끊을게” 너무나 흔쾌히 수긍하는 바람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이번에 걸리면 확 삭발을 시켜줄 테다 하고 생각하니 상상만 해도 소심한 복수가 성공적일 것 같았다.



호주 농장에서 연말 파티 중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매일 일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는 같이 사는 동생들과 골드코스트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이라 설레는 마음에 휴일에 쇼핑몰에 가서 옷도 사고 즐길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다. 일하던 농장에서는 크리스마스 전날 연말 파티도 열려서 부어라 마셔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남편 역시 분위기를 즐기려고 가리지 않고 술을 마셔서 얼큰하게 취했다. 분위기를 이어나가고 싶었는지 집에 와서도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테이블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화장실에 가겠다는 남편이 습관적으로 밖으로 나가 흡연을 했다. 술을 마시면 담배가 더 땡길 터. 그동안 참고 있던 본능이 눈을 떠버렸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딱 걸렸어 너! 얼마 전 약속했던 내용을 기억하는지 한번 떠봤다.

“남편. 금연하기로 했는데 담배 피우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니 내 누군지 아니?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남편은 뜨끔했는지 빙그레 웃더니 테이블 한 켠에 놓여있던 바리깡을 집어 들었다. 나를 힐끔 쳐다보길래 고개를 살포시 끄덕였더니 바리깡의 캡도 씌우지 않은 채 우거진 풀숲의 사이를 가로지르듯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옆에서 장난치며 함께 웃고 즐기던 동생들도 순간 당황하여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웃으며 신나게 머리를 밀다가 상황을 파악한 남편은 잠시 주춤하다가 이내 정신을 살짝 차리고는 마당으로 나가 어둠 속에서 머리카락을 전부 밀어버렸다. 잠깐의 찰나에 남편은 밤톨이가 되었다. 내 눈엔 마냥 귀여워 보였지만 가뜩이나 인상이 강한 남편이 머리를 밀고 확 변해버린 모습에 같이 지내던 동생들은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다. 이때 당시 영화 <범죄도시>가 개봉하여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조폭으로 나오신 위성락 역의 진선규 님과 이미지가 똑 닮아 있었다.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다음날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즐기러 골드코스트로 가는 길에 주말마다 열리는 선데이 마켓에 들려 구경을 하는데 호주 현지인들이 남편을 피해서 다니기도 했다. 처음 느껴본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왜 사람들이 나를 피해 다니지?” 말없이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 얼굴을 비춰줬다. 빡빡 민 머리가 어색한 지 계속해서 위아래로 만져본다.

이때 이후로 과연 담배를 끊었냐고 물으신다면 여행이 끝날 때까지 절대 못 끊었음을 알린다. 잊을만하면 금연을 선언하는 남편이 이번엔 정말 금연을 해보겠다며 전자담배를 나에게 건넸다.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까? 오늘도 남편을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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