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잠은 다 잤으니 나가볼까
27일이 되었다. 벌써 크리스마스가 끝났다. 외출을 하고 싶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와서 어쩌다 브로츠와프 집돌이가 되어 가는 중이었는데 조금은 답답했다. 더구나 브로츠와프에 와서 며칠 동안은 거의 지출이 없었으니 오랜만에 쇼핑도 하고 외식도 하고 사람 구경도 할 겸 아침을 간단히 먹고 나가기로 했다. 아침으로는 전날 냄비밥에 눌어붙어있는 누룽지와 김치로 조촐하게 먹었다.
아침을 먹은 후 외출 준비를 하면서 갈 곳을 정하던 중에 집에서 제일 가까운 쇼핑몰로 가기로 했다. 쇼핑몰 이름은 GALERIA DOMINIKAŃSKA. 집에서 쇼핑몰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쇼핑몰에 도착한 후에 그냥 발길 가는 대로 갔다. 여러 낯선 브랜드들과 중간중간 보이는 아는 브랜드들. 쇼핑몰 규모는 마치 이마트나 홈플러스 같은 중형급이랄까. 어디부터 둘러볼까 고민을 하다가 신발 가게를 가봤다. 집에서 나오기 전 며칠 동안 거의 돈을 안 썼으니까 여윳돈이 있으니 이쁜 꼬까신 하나 사도 뭐 괜찮지 않을까 하여 한 번 둘러보기로 했다. 매장을 한 바퀴 돌아본 후 맘에 드는 로퍼 구입.
약간 즉흥적인게 없지않아 있지만 소소한 사치를 부렸다.
여기저기를 구경하다가 점심으로 아시안 뷔페식당을 갔다. 브로츠와프에 도착한 첫날 바르텍이 쇼핑몰 구경시켜주면서 지하에 아시안 뷔페가 있다면서 이것저것 아시안 음식을 먹고 싶을 때 추천해줬다. 음식점 이름은 Express Oriental. 뷔페를 이용하는 방식은 큰 접시에 순서대로 여러 음식을 담고 나서 계산대에서 접시의 무게를 측정하고 나서 g당 돈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설레는 마음을 가라 앉히고 쟁반에 큰 접시를 올리고 나서 뷔페를 입장했다. 이것저것 담다 보니 한가득이 되었고 볶음면까지 담으니 만 오천 원 정도가 나왔다. 매우 저렴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하나씩 먹는데 전체적으로 짜지 않았고 고슬고슬한 볶음밥과 짭조름한 간장 베이스의 요리들이 맛있었다. 때때로 정말 맛있는 걸 먹을 땐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의 맛집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마침 문구류를 살까 해서 Empik이라는 서점 겸 문구점으로 갔다. 소소하게 재미난 물품들이 많아 한동안 계속 구경을 했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교보문고와 핫트랙스를 합쳐놓은 것과 같았다.
책, 시디뿐만 아니라 여러종류의 보드게임이 있었다.
스윽 구경하다가 이것저것 산 후 매장을 나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안에서 익숙한 맬로디 흘러나왔다.
한국 노래였다.
어?! 뭐야?! 이거 BTS 노랜데
그렇다.
매장 안에 BTS의 FAKE LOV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 듣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머나먼 타국에서 그것도 흔한 쇼핑몰 어느 매장에서 한국 노래가 울려 퍼진다는 게 어찌나 국뽕에 취하는지 노래가 끝날 때까지 혼자 흥얼흥얼 거리다가 기분 좋게 매장을 나왔다. Kpop의 힘이란
한참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카페인이 땡겨 Green Cafe Nero에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 시키고 잠시 멍 때렸다. 조금 의아했던 건 아메리카노가 마끼아또보다 더 비싸다는 것이랄까
유독 스케치에 꽂혀 스케치 연습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했다.
신분증 좀 보여줄래?
쇼핑몰에 나온 후 짐이 생겨 어디를 갈 수가 없어 트램을 타고 다시 집으로 왔다. 그러곤 오늘은 뭐살게 있나 한 번 냉장고를 한 번 열어본 후 필요한 걸 적고 나서 장을 보러 갔다.
필요한 걸 담아 마트 계산대로 갔다. 늘 그랬듯 맥주를 담아서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갑자기 직원이
혹시 신분증이나 여권 있니?
물어봄과 동시에 맥주를 따로 빼놓고 나머지만 바코드를 찍는 중이었다.
당연히 여권을 챙겨 올 생각도 안 했고 브로츠와프에 온 지 얼마 안 됐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신분증 검사를 하지도 않았는데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마트에서 예상치 못한 질문에 어떻게 할까 하다가
미안하지만 지금 여권이 없고 한국 신분증이 있는데 그거라도 괜찮을까요?
하면서 신속하게 지갑에서 한국 민증을 보여줬고 태어난 년도와 월일을 보여주니
진짜 성인이 맞아? 너 너무 어려 보이는데.
약간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다행히 별문제 없이 통과.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이가 없지만 웃음이 계속 나왔다. 기분이 좋았다. 몇 년 만에 어려 보이다는 소리를 들은 건지. 반 오십을 먹었지만 어려 보인단 말에 철없이 해맑게 웃었다.
저녁으로 된장찌개를 재료들도 샀다.
구수한 된장찌개 한 사바리
아파트에 와서는 다시 또 뒹굴뒹굴 거리다가 저녁 준비를 했다. 어제 여차저차 냄비밥이 만족스럽지 않아 제대로 하고 싶어서 30분 정도 충분히 쌀을 불린 후에 자글자글 끓였고 다행히 전날보다 밥이 맛났다.
밥도 했으니 이젠 메인 메뉴인 된장찌개를 할 차례.
된장찌개는 종종 한국에서 끓여 봤고 국물용 멸치는 없지만 된장과 고추장이 있으니 만사 오케이였다. 재료로는 양파, 감자, 애호박이면 충분했고 레시피는 야채 송송 썰고 된장 2스푼 고추장 1스푼으로 넣고 자글자글 끓이면 완성.
야채를 다 썰고 나니까 양이 많아 보였다. 1인분이라 하기엔 많은 양이지만 우선 전부 투하시키기로 했다. 찌개라고 하기엔 물의 양도 꽤 많아 보였지만 끓이다 보면 자연스레 줄겠지 하며 재료들이 익을 때까지 쭉 끓였다.
어느 정도 팔팔 끓였을 때 구수한 된장찌개의 냄새가 났다.
고향의 맛이로구나.
다되었다 싶을 때 몇 분 더 센 불로 끓였으나 사실 국인지 찌개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단지 그럴싸한 된장찌개를 만들었음에 스스로 뿌듯해했다.
누룽지와 된장찌개 그리고 김치. 이보다 더 근사한 한식은 없다.
12월 27일 언제나 그랬듯이 집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