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약간의 이벤트가 있었으니. 사건의 발단은 화장실에서 시작되었다. 외출 준비를 위해 화장실 샤워부스로 들어가 흥얼흥얼 거리면서 샤워를 하던 중이었다. 샤워가 다 끝날 때까지 샤워부스 안이 어떤 상황인지 몰랐다. 단지 오늘따라 물이 잘 안 빠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느낌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샤워를 끝냈는데도 물은 점점 발목까지 차올랐다. 물론 유럽 화장실 구조가 건조식 화장실로 되어있고 샤워부스에만 하수구가 있어 물이 천천히 내려가는 건 알고 있었으나 보통 샤워가 다 끝날 때쯤 전부 내려가야 하는데 흥건한 상황.
역시나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그 물은 주방 초입까지 흘렀고 물바다가 되었다.
음.. 어..?! 아?!
무척 당황했지만 일단은 물기가 더 번지지 않게 화장실 선반에 수건을 모조리 꺼내 물기를 전부 닦아냈다. 물기를 닦아내고 짜고 다시 닦고를 반복했다. 아침부터 참 생고생이었다.
얼추 물기를 제거하고 난 후 다시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가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고자 하수구를 열었다. 뭐가 많지는 않았지만 막히는 이유는 역시나 듬성듬성 보이는 머리카락이었다. 물론 하수구의 구멍이 매우 촘촘하게 되어 있어 금방 막힐 거라 짐작을 했지만 이 정도로 구멍이 촘촘할 줄은 몰랐다.
사실 체크인하는 날 바르텍이
'테디 너는 머리카락이 남자치고는 길기도 하고 파마도 해서 하수구가 금방 막힐 수 있으니 혹시 모르니까 하수구 잘 확인해줘'
했을 때 그때까지도 에이 설마 하면서 듣고 흘렸지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을 때 막혀 아침부터 일사천리로 물청소를 했다.
남자 머리카락이 얼마나 길고 자주 빠지길래 이리도 막히나 조금은 억울하지만 그래도 집주인이 없을 때 일어난 일이라 다행이었다.
마트 규모는 크지는 않았지만 여러품목들을 팔고 있었다. 사실 꽤 많이 놀랐다. 난 그저 기본적인 한국 제품들만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봉봉과 갈아 만든 배 그리고 비타 500을 팔고 있다는 사실에 입을 닫을 수가 없었다.
여긴 찐이구나.
마치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우리 동네 흔한 마트처럼 모든 게 친숙했다. 그 와중에 햇반 컵밥과 통단팥죽으로 시선 고정. 생각보다 비싸지 않고 딱 적당했다.
구경을 하다가 웃음이 났다.
나는 왜 한국에서부터 이 먼 곳까지 고생해서 한식을 챙겨 온 거야(허탈)
쭉 한 바퀴 둘러보면서 필요한 게 갑자기 생각이 났다. 젓가락. 젓가락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며칠 동안 포크로만 사용해서 불편했는데 모처럼 온 김에 젓가락을 사기로 했다.
저녁으로는 삼겹살을 구워 먹기로 해서 쌈장을 작은 거 하나를 샀다.
마지막으로 된장찌개 끓였을 때 남은 야채들이 조금 있어서 나중에 카레를 해 먹기 위해 오뚜기 카레를 샀고 혹시 필요할까 봐 한국 쌀도 샀다.
정말 집 근처에서 장보는 듯했다. 분명 폴란드에 있지만 잠시 한국을 왔다 간 기분이랄까
이때까지 몰랐다. 그저 삼겹살처럼 보였기에.
집에 와서 잔뜩 기대를 하며 저녁 준비를 했는데 고기 비닐커버를 뜯는 순간 깨달았다.
진득한 훈제향이 났다.
그렇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바보처럼 훈제된 삼겹살을 샀던 것이었다. 그래도 뭐 같은 고기고 한국에서도 훈제 삼겹살 먹은 적 있으니 아무렴 어때 하면서 구울 준비를 했다.
고기가 어느 정도 읽을 때쯤 한 점을 먹어봤다.
짜다. 짜도 너무 짜다.
아무리 훈제라지만 이 정도로 짜다니. 그래도 쌈 싸 먹으면 짠 게 덜하지 않을까 하여 일단은 구웠다.
바삭하게 고기를 구운 후 상을 차렸다. 반찬은 딱히 없지만 고기와 쌈 그리고 맥주면 충분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상추(?)와 함께 고기 한 점을 올려 쌈장을 찍어 바른 후 한입 크게 먹었다.
그래도 짜다.
사실 짠 게 가시지 않았다. 입안에 맴도는 짠맛으로 계속해서 맥주를 마셨다. 그러나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식감 때문에 먹을만했다. 저녁을 먹은 후 정확하게 내가 뭘 샀는지 가계부를 작성하면서 조사해봤다. 오늘 내가 산 건 boczek wedzony. 구글 번역을 돌려본 결과 smoked bacon, 즉 훈제된 베이컨이었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정확히 삼겹살이 폴란드어로 뭔지 찾아냈고 다음엔 구이보다는 제육볶음을 해 먹기로 했다. 구이가 맛은 있었지만 집에서 환풍기를 틀었지만 고기 냄새 빼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
우여곡절 끝에 정확히 삼겹살이 폴란드어로 뭔지 찾았으니 빠른 시일 내에 한 번 또 야무지게 해 먹기로.
12월 28일 훈제지만 괜찮아. 어차피 고기서 고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