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에 가기 전 안나와 이런저런 메시지를 주고받았을 때 일이었다.
안나, 혹시 한국 음식 뭐 먹고 싶어?
나는 당연히 김밥이지
안나가 김밥을 좋아하게 된 건 18년도에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오면서부터였다. 항상 인사말로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면 언제나 김밥을 먹었다고 했다. 또한 한국의 편의점 음식점에 파는 음식들을 극찬하면서 특히 김치 김밥이 맛있다고 했다. 그렇게 안나는 한국에 있는 동안 여러 편의점에서 김밥들을 먹곤 했다.
폴란드로 돌아간 후 근황을 물어볼 때 종종 김밥이 너무 먹고 싶었다고 했다. 폴란드에도 한식집이 있고 스시집도 있지만 한국에서 먹는 김밥 맛이 나지 않아 늘 그립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가는 김에 김밥을 배워가서 직접 해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출국 일주일 전 임여사의 1일 쿠킹 클래스로 냄비밥을 하는 법과 김밥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냄비밥은 김밥뿐만 아니라 폴란드에서도 밥은 해 먹어야 하니까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한국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으니. 엄마 옆에서 알려준 레시피대로 처음부터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냄비밥 레시피
큰 냄비를 꺼내 쌀을 좀 불리고 강불로 자글자글 끓이다가 중불로 바꾸고 어느 정도 되었다 싶으면 약불로 줄인 후 뚜껑 닫고 기다리기.
몇 분 정도 지난 후 다시 뚜껑을 열어 한 번 저어준 후 한입 먹어보고 적당히 고슬고슬하면 완성
김밥에 들어가는 밥 간 맞추기
소금 조금 3번 참기름 크게 1번 깨소금 많이
김밥 레시피
본격적으로 김밥을 만들기에 앞서 필요한 건 당연 김발과 김밥용 김
김밥 속재료에 필요한 김밥용 햄, 단무지, 계란 지단, 당근, 볶음 김치를 준비
김밥 말이에 김을 깔고 어느 정도 공간을 남겨준 후 밥은 평평하게 펴주면서 속재료를 하나둘씩 올린다.
김밥을 말 땐 말면서 눌러준다.
처음으로 김밥을 만들고 나서 느낀 건 생각보다 김밥이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김밥의 밥 간을 맞추는 것을 시작으로 김을 깔고 밥을 퍼서 속재료 하나둘씩 올리고 김발로 돌돌 말아 차곡차곡 쌓은 후 마지막으로 썰기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몸소 체험하면서 어릴 적 소풍 가는 날 도시락으로 엄마가 아침부터 만들어주신 김밥이 떠올랐다.
바쁘신 와중에도 어린 아들을 위해 준비하신 엄마의 정성 가득한 김밥이 떠오르면서 이렇게나 손이 많이 가는데 어떻게 출근 준비를 하시면서 만드셨는지 존경스럽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김밥을 먹으면서 엄마께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씀하시길
아들 가서 잘할 수 있겠어?
조금은 막막했지만 그래도
음.. 일단은 해보면 느낌 알겠지? 내 손과 감각을 믿어야지. 뭐
어떻게든 되겠지.
브로츠와프에서 지낸 지 8일 차. 냉장고엔 아직도 한식들이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김밥세트였다. 하루빨리 안나에게 김밥을 먹이고 싶어서 언제쯤 시간이 되려나 하던 때에 메시지를 보냈다.
안나, 김밥 언제 먹을래? 나는 준비가 돼있으니까 말만 해.
답장이 왔다.
오늘 어때? 오기 전에 필요한 거 있으면 이야기해줘. 한 오후 6시쯤 볼래?
그래 그러자. 필요한 거라.. 음 혹시 비닐장갑 있어?
오후 6시까지 내가 할 일은 몇 주 전 속성으로 배운 걸 다시 떠올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김밥 만드는데 필요한 게 없나 체크하는 게 우선이었다. 필요한 게 있다면 비닐장갑 정도랄까. 김밥을 할 때 손에 이것저것 묻을 수 있으니 비닐장갑 정도 있으면 편히 만들 수 있으니
정해진 하루 일과가 딱히 없어 아침 느지감치 일어나 그냥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고 나서 슬슬 만날 준비를 했다. 김밥세트, 참기름, 깨소금, 김발, 볶음김치 덤으로 신라면 2개를 챙겨 아파트 1층으로 내려갔다.
안나의 아파트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거의 이웃이랄까. (처음부터 Ania가 사는 곳 근처로 예약하지는 않았다. 에어비앤비 예약을 완료하고 나서 집 위치를 알려줬는데 우연히 그 근처였다.)
아파트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한 건 냄비밥이었다. 며칠 정도 집에서 워밍업으로 냄비밥을 했으니 어느 정도 감각이 생겨 자신 있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쌀 같은 경우엔 최대한 한국스럽게 만들고자 전에 한인마트에서 이천 쌀을 샀는데 우리나라 쌀로 냄비밥은 더욱더 자신이 있었다.
냄비에 쌀을 붇기 전 김밥세트가 10인용이라길래 쌀을 다 넣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어정쩡하게 남길 바엔 일단 만들고 남으면 알아서 먹으면 되겠지 하고 조금 많이 부었다. 이렇게 대량으로 만드는 건 처음이라 갑자기 긴장하긴 했지만 연습한 대로 냄비밥을 만들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완성이 될 때쯤에 한 입 먹어보는데 다행히 고슬고슬한 밥이 되었다.
잠시 뜸 들이는 동안 본격적으로 김밥을 말기 위해 하나둘씩 세팅을 했다. 계란 지단을 부치고 큰 접시에 속재료를 분류하고 도마 칼 김밥용 밥을 보관할 큰 그릇.
계란 지단을 부치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최대한 약불로 타지 않고 야들야들하게 잘 만들어 스스로 뿌듯해했다. 왜냐면 타지 않고 계란 지단을 부치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 밥을 퍼서 큰 그릇에 옮겨 담은 뒤 집에서 가져온 참기름, 깨소금, 소금으로 밑간을 했다. 여러 번 훑은 뒤에 한 주걱 먹어본 후
자, 이제 한번 제대로 말아볼까
경건한 마음으로 라텍스 장갑을 꼈다. 먼저 도마를 받침대 삼아 놓고 그위에 김발을 쫙 폈다. 그러곤 주섬주섬 김밥용 김 한 장을 시작으로 야물딱지게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옆구리 터지지 않게 한 줄을 만들고 나서 서서히 감을 찾기 시작했다.
아 이거다. 이거였어!!
그렇게 차분하게 조물조물 김밥을 말다 보니 어느새 10줄 정도가 나왔다. 김밥을 말고 있는 동안 안나는 다된 김밥을 한 줄씩 썰면서 이쁘게 플레이팅을 했다. 김밥의 꼬다리는 따로 놓아두는 센스까지
김밥을 다 만들 때쯤 라면을 끓였다. 원래 라면엔 김밥이거늘(흔히들 국룰이라고 한다.) 라면까지 끓이고 나서 보니 1시간 이상이 지났다. 8시 반이 넘을쯤 안나와 함께 늦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안나가 김밥을 먹으면서 계속해서 감탄을 했다.
테디, 진짜 맛있는데? 폴란드에서 김밥 장사해보는 건 어때? (웃음)
폴란드에서 김밥을 말 줄이야.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김밥을 만들기 전까지만 해도 막막함이 앞섰는데 차질 없이 완벽하게 한국 본연의 김밥을 만들어서 그저 얼떨떨했다. 나도 모르는 또 다른 재능이 있는 걸까.
안나, 나 음식에 소질이 있나 봐. 내가 만들었지만 너무 맛있는데?
그렇게 맛있는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안나의 룸메이트들이 집으로 왔다. 그들 또한 전에 한번 봤던 친구들이라 오랜만에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남은 김밥을 한 번 먹어보라고 권유했다.
야첵과 안드리안나는 반신반의하면서 먹었는데
테디, 이거 네가 만든 거라고? 맛있는데? 근데 이거 스시야?
그럼, 내가 만들었지. 직접 한국에서 다 가져온 거야. 이건 스시가 아니고 김밥이라고 해. 일본의 스시하고는 전혀 다른 음식이야. 스시보다 훨씬 맛있어.
한국 음식을 처음 접한 야첵과 안드리안나도 맛있다고 극찬을 했다. 비록 폴란드 친구들 3명에게만 좋은 피드백을 받았지만 뭔가 음식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고 현지에서도 운이 좋으면 한국음식으로 김밥이 통할 거란 막연한 기대감이 들기도 했다.
김밥을 만들고 나서 느낀 건 생애 처음으로 외국인 친구에게 한국음식을 직접 만들어 대접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고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덧붙여 한국이 아닌 폴란드에서 직접 김밥을 만든 게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고 내 인생에 있어 최고의 순간 중 하나가 되었다.
12월 30일 폴란드에서 김밥 장사나 해볼까. 가게 이름은 테디쓰 키친(TEDDY'S KITCHEN)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