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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고 TTGO Jun 14. 2019

활주로에서 보낸 하루

이탈리아 로마, 시칠리아, 몰타 여행기

우리는 비행기 안에 앉아있었다. 작은 비행기였다. 비행기는 몰타 공항의 활주로에서 이륙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리는 공항 대합실에서 걸어 나와 비행기가 놓여있는 활주로 위를 걸어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 건물과 비행기가 곧장 통로로 연결되지 않고 활주로에서 계단을 올라 비행기에 탑승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버스로 이동하지 않고 곧장 활주로를 걸어 비행기에 오르는 일은 많지 않았다.

어디에서였더라.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그리스의 산토리니, 그리고 몰타의 발레타. 기억을 더듬어 공통점을 찾아보니, 크지 않은 공항들이었고 모두 섬이었다. 비행기는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로 향할 예정이었다. 배를 타고 이동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비행기를 택했다. 오늘만큼은 시간을 아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연말에 떠난 여행이었다. 우리는 로마를 거쳐, 시칠리아와 몰타를 여행할 계획이었다. 아이를 포함한 세 가족이 함께 여행을 하고, 그 여행기를 연재하고, 책으로 출간하면서 여행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중에 하나는 항공권을 어떻게 구입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해를 거듭해 여행을 계속하다보니, 우리에게도 작은 팁이 있다. 항공권 가격은 거리에 정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업계의 복잡한 메커니즘에 따라 결정되지만, 우리의 방법은 단순하다. 우리는 대부분 여행 가능한 기간이 정해져 있다. 그런 경우 항공권을 저렴하게 구입하는 방법 중 하나는, 목적지를 미리 정해두지 않고 그 기간에 항공권이 저렴한 곳으로 여행을 가는 것이다.


우리는 지속 가능한 여행을 위해 일상을 두고 가지 않는 여행을 택했다.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다. 

일상과 여행이라니. 이 둘은 반의어가 아닌가. 여행을 계속하고 싶었다. 한 달, 아니면 몇 달, 몇 년이 아니라 지금부터 나이가 들어서도, 나이가 들 때까지 계속. 그래서 우리는 일상을 두고 가지 않고 휴가와 빨간 날에만 가족 여행을 한다. 연휴와 명절,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8월 첫 주로 고정되었던 여름휴가. 그러다 지난겨울 처음으로 남편 직장에서 연차 일괄 소진을 목적으로 연말에 휴가 아닌 휴가가 주어졌다. 연차수당은 가계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되긴 하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장 비싼 것은 시간이 아니던가. 우리는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였다. 남편은 곧 연말에 저렴하게 풀린 항공권을 찾아냈다. 이탈리아 로마행 티켓이었다.



여행 계획을 세웠다. 둘 다 다녀온 로마에서의 일정은 조금 줄이고, 시칠리아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시칠리아에서 가까운 몰타도 일정에 넣었다. 우리는 큰 이동경로를 정하는 것 외에는 여행 전에 준비를 많이 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기간이 연말이었다. 결혼 전 혼자 유럽을 여행할 때 로마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었다. 원래 일정은 달랐지만, 로마가 너무 좋았던 나는 며칠 더 머물다가 다른 도시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매일 밤 나보나 광장까지 산책하듯 걸어가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고 돌아오곤 했다. 크리스마스이브 밤에는 바티칸까지 걸어갔다. 거리는 불빛과 사람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었다. 조용했다. 가게들은 문을 닫았고,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전 날 밤의 들뜬 북적거림은 철 지난 트리처럼 치워지고 없었다. 가난한 여행자였던 나는 교회에 갔다가 텅 빈 거리를 걸어 숙소로 돌아와 마트에서 미리 사다둔 빵을 뜯었다. 이번에는 일정을 잘 조율해야 했다. 먼저 로마에서 몰타로 가서 며칠을 지내고, 크리스마스는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보내기로 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이탈리아 남부의 섬인 시칠리아는 크기가 제주도의 14배 정도였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몰타 발레타를 출발해 시칠리아의 카타니아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고, 거기서 팔레르모까지는 다시 기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불확실한 연말의 교통편을 고려해서 우리는 몇 달 전부터 이탈리아 철도청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미리 기차표의 구입을 마쳤다.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번 여행은 우여곡절도 많고 이래저래 파란만장했다. 로마를 거쳐 도착한 지중해의 섬나라 몰타는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예측 불가한 사건사고가 계속 벌어졌다. 첫 숙소는 엉망이었고, 유심은 터지지 않고, 택시비는 사기를 당했다. 몰타를 떠나는 날, 우리는 어느 정도 지치고 약간의 아쉬움과 후련함을 모두 가지고 발레타 시내를 벗어나 공항으로 갔다. 서둘러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의 작은 창문 밖으로는 정오의 환한 햇살이 활주로를 데우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채우고 이륙을 기다렸다. 마음은 이미 시칠리아를 향해 날아올랐다. 여행의 첫 장이 덮이고, 두 번째 장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우리는 비행기 안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예정된 시간이 지나도록 비행기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륙할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는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비좁은 좌석이 세 개씩 놓여있었다. 기내에서는 음식을 사 먹어야 했지만, 잠깐의 비행이니 우리는 도착해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예정이었다. 승무원들은 계속 분주하게 오갔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륙이 지연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런 일은 가끔 벌어지기도 하니까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렸다. 

어느덧 이륙 예정시간이 지났고,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삼십 분, 한 시간이 되었다. 이제 일부 사람들은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명을 요구하며 곳곳에서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우리는 계속 시계를 들여다봤다. 더 늦어지면 예약해둔 기차 시간이 빠듯할 터였다. 그 상태로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드문드문 안내방송이 나왔지만,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조금 후 이륙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기내 안내방송은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나왔다. 영어로 이륙 지연을 알리면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며 웅성거림이 일었고, 이탈리아어로 (아마도)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안내하면 짝-짝- 박수소리와 함께 항의가 이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흘러 두 시간, 그리고 세 시간을 넘겼다. 우리가 타려고 예약했던 기차는 이미 카타니아를 떠나 팔레르모로 출발했을 것이었다. 팔레르모로 가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마지막 기차였다. 나는 처음에는 느긋하게 기다리다가, 기차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졌다. 도대체 왜 이륙을 안 하는 건지 화가 났다가, 제발 지금이라도 출발했으면 하고 간절해졌다. 그러다 기차 시간을 넘기고 나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이대로 크리스마스를 비행기 안에서 맞이하는 건 아닌지, 기차는 다 끊겼을 텐데 카타니아에 도착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만약 몰타에서 더 있어야 한다면 숙소를 어디서 구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상황이 나았다. 아마도 그 비행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을테지만, 우리는 가족이 다 함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언제 이륙할지 기약은 없고, 항공법에 따라 다시 내릴 수도 없었다. 좁은 비행기 안에서 몇시간이 지나자 승무원들이 노약자에게 먼저 기내 판매용 음식을 꺼내 주기 시작했다. 우리도 통로에 줄을 서서 얼이에게 먹일 것을 받아왔다. 나중에는 비행기에 실려있던 음식을 전부 탑승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처음에는 승무원에게 항의하던 사람들도 통로를 오가면서 음식을 옮겼다.


창 밖은 차츰 어두워졌다. 짧은 겨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이륙하겠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환호하며 다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비행기는 마침내 몰타의 야경을 뒤로하고 날아올랐다.



그래서 그 날은 어떻게 되었냐면, 우리는 무사히 예약해두었던 팔레르모의 호텔에 도착했다. 시간은 밤 11시, 크리스마스가 되기 한 시간 전이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시내로 이동해 팔레르모로 가는 버스 티켓을 구했고, 잠든 얼이를 번갈아 안고 사람 하나 없는 밤거리를 걸어서 도착한 것이었다. 호텔에서는 우리에게 마구간을 내어주는 내신 우리 방을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가 있는 스위트룸으로 바꾸어주었다.


캐리어에는 우리 셋이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려고 챙겨 온 성탄 모자와 머리띠와 장식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파티에는 뭐가 필요하더라? 우리가 계획했던 것은 거기에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짧은 초조함이 사그라들고 나자 눈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이 어느 세트장에라도 걸어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사방에서 이국의 언어가 떠다녔다. 그러면서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묘한 동질감이 피어났다. 우리 셋은 나란히 앉아 대화와 웃음을 나누었다. 경험을 사는 것이 여행이라면 이런 경험을 또 언제 해보겠어. 얼이는 유일하게 챙겨 온 색종이 한 묶음으로 온갖 것들을 만들면서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We wish a merry Christmas. 유치원에서 배운 건지 어디서 들은 건지 노래는 딱 이 한 문장만 반복됐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륙이 지연된 것은 카타니아의 에트나 화산이 폭발해서 공항이 일시적으로 폐쇄되었기 때문이었다.


착륙하면서 창 밖을 내다보니 캄캄한 밤하늘 한편이 활동을 시작한 화산으로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비행기가 시칠리아 공항에 착륙하던 순간,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누군가 큰 소리로 말했다. Buona notte! 여행을 준비하며 이탈리아어를 공부했던 남편이 내 귀에 속삭였다. 

'좋은 밤'이라는 뜻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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