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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땅이 쪼개진다꼬?"

팔레스타인은 왜 중동의 화약고가 되었나 (1)

by 염띠

"고마~ 사께 한잔 하이소", "이랏샤이마세"

2050년 겨울, 부산 자갈치 시장. 호객꾼은 경상도 말과 일본말을 섞어 썼다. 일본인이 경상도 말을 배운 건지, 경상도 사람이 일본말을 배운 건지 헷갈렸다. 생김새를 보면 국적이라도 알 수 있을까. 그를 자세히 보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더 보이질 않았다. 그는 화려한 불빛을 토해내는 간판을 등진 채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강렬한 간판의 불빛은 역설적으로 그를 어둠 속으로 삼키고 있었고, 그의 실루엣 만이 가오나시처럼 취객들을 가게로 이끌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면 조금이라도 잘 보일까 싶어 눈을 잔뜩 웅크려 봤지만 그럴수록 화려하게 비춘 간판이 더욱 부각될 뿐이었다. 그의 말은 한국어와 일본어 반반이었지만 간판에는 일본어가 훨씬 더 많았다. 어쩌다 보이는 한글 간판만이 그래도 여기가 한때는 '부산땅'이었구나 짐작케 했다. 발에 차이던 돼지국밥집도 절반은 일본 라멘이나 우동 가게로 바뀐 지 오래됐고, 소주도 사케에 밀렸다. 이 모든 변화가 최근 10년 새 벌어졌다. 일본인들이 부산에 터를 잡으면서 시작된 일들이었다. 일본인들이 갑자기 부산으로 이주를 시작한 것이다. 막을 방법이 없었다. 돈 많은 일본인들이 땅을 사들이며 밀고 들어오니 속수무책이었다. 복비를 두둑이 받기만 한다면 공인중개사들은 거래가 된다고 하면 국적을 가리지는 않았다.


멀리 보이는 한글 간판이 이곳이 부산인지 오사카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저 멀리 화포 식당만 한글로 되어 있다.


부산은 원래 일본 땅이었스므니다?


일본인들이 부산땅을 사들이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인들은 대지진으로 영토의 상당수가 물에 잠겨 버린 지난 2020년대 중반부터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2019년 말에 창궐한 COVID-19 바이러스는 국가 간의 단절로 이어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 영토에는 돌이킬 수 없는 자연재해까지 발생해 국민이 거주할 수 있는 영토의 3분의 2가 사라졌다. 하지만, 전염병의 창궐로 인해 일본인 난민들을 받아주려는 국가는 많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스스로가 '하쿠가이(Hakugai)', 즉 박해의 민족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중, 러시아가 일본의 의학과 군사기술, 금융 시스템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시베리아 일부 지역으로의 이주를 허락한 것이다. 러시아는 척박한 시베리아 이외의 다른 영토에는 일본인 정착을 허용하지 않았다. 다만, 예외가 있었다. 그건, 러시아의 해외 영토였다. 세계 3차 대전 이후, 승전국인 러시아는 부산, 경남 지역을 점령하고, 위임통치를 하고 있었다. 특히, 부산은 러시아의 해외 점령지 중 일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땅이었다. 일단 시베리아 보다 따뜻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고향과 가까웠다. 처음엔 그냥 그러겠거니 넘겼는데, 어느 틈엔가 그들은 역사적 당위성까지 내세우고 있었다.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4세기 후반, 한반도의 남부를 점령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바탕으로 경남 땅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살던 땅이었다고 주장했다. 조상땅을 되찾겠다는 논리였다.


“아니 땅을 슬금슬금 차지하더니 국가를 설립한다고?”


이러던 중 러시아 정부의 발표는 일본인 이주 러시에 기름을 부었다. 러시아 외무 장관 세르게이가 “부산, 경남 땅에 일본인 국가 설립을 적극 지지한다.”라고 발표한 것이다. 이른바 '세르게이 선언'이었다. 일본인들의 이주는 가속화됐다. 급기야 부산, 경남 땅의 10% 가까이를 일본인들이 차지했고,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 숫자도 어느새 수십 만에 이르렀다. 반일 감정이 싹텄고, 반일 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무기가 없으면 돌멩이라도 들었다. 일본인 지주들에게 돌을 던지면, 일본인들은 정당방위라며 총으로 맞섰다. 일본인이 죽었고, 부산인은 더 죽었다. 러시아는 방관했다. 부산에서 갈등이 가속화되자 UN 본부에는 ‘부산 특별위원회 UNSCOB(UN Special Committee on Busan)'가 생겼다. 연일 유혈 사태로 비화되고 있는 부산 내 일본인 정착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취지였다. 곧 UNSCOB의 현지 조사가 시작됐고, 위원회는 절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게 절충안이라고?"


격론 끝에 만들어진 안은 부산 사람들이 볼 때는 황당했다. "미친 거 아이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부산 지역을 둘로 나눠, 일본인 지구와 한국인 지구로 분할한다는 안이 다수 안으로 올라온 것이다. 분할은 국가 설립을 전제로 한 말이었다. 부산, 경남 땅 반을 떼어 일본국을 세우자는 게 다수 안이었던 것이다. 소수 의견은 한 술 더 떠서 일본인과 한국인을 포괄한 부울경 일대 연방 국가를 만들자는 안을 내놨다. 둘 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여긴 우리 땅이니까. 부산 사람들은 다수 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도록 교묘하게 궁지 몰린 채 절충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급진적인 후자는 격론 끝에 기각됐고, 전자가 채택됐다. 물론, 이 논의에 부산 사람들의 의중은 반영되지 않았다. 의중이 반영됐더라면 애초에 이런 절충안이 나왔을 리 없었다.


"부산에 일본인 거주 지구를 조성한다"


갈등을 조정한다면서 내놓은 안은 결국 러시아가 선언한 안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러시아의 안에 국제 사회가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한 꼴이 되어 버렸다. 부산 사람들은 국제사회에 권한을 위임한 적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힘의 부재가 땅의 부재로 이어졌다. 그건 중재가 아니라 강제였다. 내용을 뜯어보면 더 참담했다. 부산, 경남 땅의 절반 이상, 대략 55% 정도를 일본인들에게 떼어 주도록 하고, 나머지만 부산 사람들에게 나눠 주라고 되어 있었던 것이다. 부산은 원래 부산 사람들의 땅이었다. 더구나, 당시 부산 인구는 한국인이 일본인의 두 배 이상 많았다.


"부산땅이 쪼개진다꼬?"


귀가 어두운 자갈치 시장의 한 팔순 할매는 신문을 들여다보며, 연신 주변에 이렇게 캐묻고 있었다.



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1920년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위임 통치에 들어갔다.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점령지가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 이주를 시작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이 수천 년 전 자신들의 땅이었다고 주장했다. 1917년 영국의 외무 장관 벨푸어는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국가 설립을 적극 지지한다.”라고 발표했다. 이른바 '벨푸어 선언'이다.


영국 외무 장관 벨푸어(1848~1930)의 선언으로 팔레스타인은 격랑에 휩싸인다.


'벨푸어 선언'이후, 1939년 무렵에는 팔레스타인 지역 유태인의 총인구가 50만 명에 이르게 된다. 아랍 내에선 반유태인 운동이 시작됐고, 갈등이 격화되자 UN은 11개 국가로 구성된 UN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 (UN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 : UNSCOP)가 설치됐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실사하고 있는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SCOP), 1947년


이 위원회는 두 가지 안을 내놓는다. 아랍인과 유태인이 지구를 분리하는 안(다수 안), 아랍인과 유태인을 포괄하는 연방 국가 창설 안(소수안)이었다. 1947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이 아랍인 국가와 유태인 국가를 따로 세울 것을 제안하는 결의안이 채택된다.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SCOP) 총회 장면, 이 곳에서 영토분할 안이 채택된다


결의안의 내용은 이랬다. 영토의 55%는 유태인에게, 그리고 나머지 45%는 팔레스타인인에게 주는 것이었다. 유태인 영토가 더 많았다.


1947년 당시 팔레스타인 분할 안, 푸른색이 유태인 영토이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인구 분포는 아랍인이 70%, 유태인이 30%였다.


- t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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