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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배워 어디다 써먹니?

내가 국제법을 공부하는 이유

by 염띠
국제법을 공부하면 밥은 나오나?


국제법은 영어로 International Law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Law among nations이다. 국가 간의 법이라는 뜻이다. 즉, 국가와 국가 사이에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을 규율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국가가 아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국가는 아니다. 이때문에 나와 당신이 법적 분쟁 상태에 놓였을 때, 국제법은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당장 우리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느낄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솔직히 돈은 안 된다. 법률 시장에서 국제법 전문 변호사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과거 사법고시에서도 국제법은 1차 객관식 선택 과목이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 국제법을 공부하면, 밥은 안 나온다. 그저 외교가, 학계를 중심으로 힘겹게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법대 대학원 내에서도 국제법 전공자는 손에 꼽을 정도이니까.


국제법 공부하는 거 어렵지는 않니?


어렵다. 일단, 내용도 어렵고, 양도 많다. 필자가 표지사진으로 올린 저 책, 보통 기본서로 꼽히는 교과서인데, 1700페이지가 넘는다. 처음에 국제법 교과서를 펼치면 두 가지에 놀란다. 일단, 방대한 양에 놀라고 두 번째는 원문이 외국어라 놀란다. 외국어가 원문인 내용을 이렇게 많이 봐야 한다고?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면 조금씩 눈이 트이고, 처음에 놀란 것들은 다소 진정이 된다. 공부라는 게 그렇다. 문리(文理)가 트이면 속도가 빨라진다. 그런데, 눈이 트이면 아까 놀란 데서 한발 더 나가서 다시 또 두 가지에 놀란다. 일단, 그 방대한 양이라는 것도 잘 정리해 조약문을 요약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 여기서 심도 있는 과정을 들여다 보려면 한발 더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국제법은 세부 전공이 아주 많다. 국제 형사법, 국제 인권법, 국제환경법, 국제경제법, 국제해양법 등등. 그래서 1700페이지를 다 이해했다는 건 여행가기 전 가볍게 지도를 숙지한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다시금 두 번째로 놀라는 점은 원문이 외국어라 일단 영어의 장벽을 넘어야 하는데, 그 외국어도 영어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보통, 유럽재판소의 경우 프랑스어 정본도 함께 나오기도 하고, 해당 당사국의 그 나라 언어로 나오기도 한다. 국제사법재판소는 5~6개의 언어로 판결문이 발표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어떤 논문은 영문 판결과 불문 판결의 차이점을 가지고 쟁점을 뽑아 내어 다투는 경우도 있다. 일단, 영어의 장벽을 넘어야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놀람 포인트'이다. 게다가 주요 법률 용어는 라틴어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강행 규범이라는 용어도 그냥 영어로 peremtory norm이라고 하면 될 텐데, 굳이 jus cogens라고 부른다. jus는 라틴어로 법이란 뜻이고, 라틴어 형용사는 명사를 뒤에서 수식한다. 국제법의 기원이 결국, 제국주의 시대 제국의 법에서 출발했고, 서구 제국의 시작이 로마에서 기원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결론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제법을 왜 공부해? "멋있어서요."


그래서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돈도 안되고, 어렵기만 하다면 왜 하냐는 것이다. 하긴, 공부도 투자인데 남는 게 있어야지. 일단, 나는 멋있어서 한다. 뭐가 왜 멋있는지 지금부터 그 이유를 알려드리려고 한다. 국제법의 매력을 잘 모르는 분들. 혹은 국제법 전공을 망설이는 후배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국제법 학자는 국가 대표다.


국제법은 국가 간 합의의 산물이다. 국내법은 입법부가 법을 만들고, 문제가 생기면 헌법재판소에서 그것을 판단하기도 하고, 국민의 법감정에 따라 의회의 수정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실체법의 상위 개념, 상위 기관이 존재한다. 법을 어기면 사법시스템이 가동되어 적절한 제재와 처벌도 이뤄진다. 그러나 국제법은 순전히 합의로 모든 걸 다 하게 된다. A 국가와 B국가 사이에 어떤 것을 합의하면 그게 법이 된다. 그게 옳든 그르든. 국제법은 동의로 잉태된다. 법을 어겨도 혹은 법이 이상해도 이를 심판해줄 기구 따위는 없다. 국제사법재판소가 있다고? 그것도 재판관할권을 수락해야 간다. 국제재판도 근간은 중재 재판이다. 동의해야 간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재판받을 권리가 국가들에게 있다. 일례로,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에 대한 인권 탄압에 대해 국제 형사재판소(ICC, International Criminal Court)가 이를 법정에 세워 심판하려 할 때도 ICC의 형사재판 관할권을 수락하지 않았다.

국제법은 이처럼 국가들이 밀고 당기기를 하다가 서로 원하는 중간 지점쯤에서,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힘이 도달하는 지점에서 줄다리기 줄에 매달린 리본이 멈추게 된다. 국제법은 그래서 평등하지 않다는 게 내 지론이다. 잠시 후에도 다시 언급하겠지만 트럼프가 파리협정을 제멋대로 탈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일단 합의되면 그 이후에는 해석 싸움이 시작된다. 국제법은 두 국가 즉 양자 간의 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 내 협정, 혹은 다자간 협정도 많다. 그런 제약조건 하에서 모든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관점으로 국제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국가 간에 어떤 분쟁이 벌어지면 모든 국가가 자기 입맛에 맞게 "이건 국제법 위반"이라고 외치는 모습을 종종 목도할 수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다.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이른바 '내 피셜'로 해석하려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럴듯하게 논리로 포장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겠지만.

예를 들어, 독도의 영유권 문제에 대한 국제법 관련 논문을 쓴다고 하면 아마 한국 학자는 한국 영토라는 것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쓰게 될 것이다. 한국 학자가 밤샘 연구 끝에 "네, 일본 영토 맞습니다!" 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어떻게든 상대 논리를 반박하고 파헤치려 하겠지. 반면, 일본 학자는 그 반대일 것이다. 사실 학계에서 학자들이 논문으로 소통하는 과정은 결국, 진리의 모서리를 깎고 갈아서 완만하게 만드는 설득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국제법의 영역에서 설득 당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상대의 논리를 어떻게 뒤집을지 고민하게 된다. 어찌 보면 국제법 논문은 언론이랑 속성이 비슷한 측면도 있다. 그래서 국제법은 처절하게 국내적이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한국 학자의 논문을 일본 학자가 보진 않을 것이다. 보더라도 그걸 어떻게 반박할지 고민하겠지. 이런 논문은 우리 외교부와 학계가 돌려보면서 논의를 이어가는데 이건 마치 원팀(one team)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국뽕의 단골 메뉴 국가대항전 말이다. 그래서 나는 국제법 논문을 읽을 때, 저자가 어느 나라의 학자인지 어디서 학위를 했는지 한 번쯤 살펴보게 된다. 그 나라의 정치적 입지도 고려해서 논문의 결론을 감가상각 하기 위해서이다. 적어도 미얀마 국제법 학자는, 어떻게든 ICC 관할권을 벗어나려는 법리적 연구에 나서고 있을 것이다. 참고로, ICC는 관할권 확장의 법리를 적용해서 미얀마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사실상 준강제적으로 사건 심리에 들어간 상태이다. 하여튼, 그런 의미에서 국제법 학자들은 모두 국가 대표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이게 멋있다고 생각했다.


"국제법은 짬밥 순이 아니다!"


국제사법재판소라는 곳이 있다. 줄여서 보통 ICJ(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라고 부른다. UN헌장에서 규율하고 있는 UN 산하의 국제재판소이다. 이 때문에 공신력이 있다. "정부는 이 사건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이런 작업을 190여 개 국가들이 쉴 새 없이 하고 있다.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찾아 국제 사법체계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ICJ, 많이 바쁘다. 아직 작년 통계가 나오진 않았지만 지난 2018년 한 해 동안, 3개의 사건에 대한 최종 판결, 16개의 명령이 내려졌고, 6개 사건에 대해서는 청문회(public hearing)가 열렸다. ICJ 판례는 그 자체가 책 한 권이다. 매년 중요한 '판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국제법은 영미법에 근간을 두고 있다 보니, 판례가 곧 기준이 된다. 또, 국제법 자체는 앞서 말한 대로 합의의 산물이므로 그 합의는 바뀌기도 한다. 합의가 바뀌면 합의에 대한 해석도 바뀐다. 지구 연방 공화국이 존재하지 않는 한, 국제법 전체를 규율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는 없다. 마치, 발을 담그면 닥터피쉬가 입질을 하듯이 국제법 관련 법리와 판례, 사건과 사실관계 그리고 국제정치가 뒤얽혀 매년, 매월, 매일 톡톡 튀어 오르고 있다. 이것을 꾸준히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누구든 뒤쳐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보자. 1992년 기후변화 협약(UNFCCC)이 채택되면서, 1997년에는 그 유명한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가 나오게 되고, 이어 2015년에는 기후변화 협약인 파리협정(Paris Agreement)이 채택되었다. 합의에만 20년 넘게 걸린 셈이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파리 협정 탈퇴를 거론한다. 그리고 급기야, 2017년에는 UN에 파리협정 탈퇴를 통보했다. 이렇게 20년 간 쌓아온 합의가 한순간에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다. 세계 무역기구 WTO를 규율하는 협정도 마찬가지다. WTO 협정은 세계 무역을 규율하는 법이다. 이 법은 우리나라의 물건을 다른 나라로 수출할 때 생길 수 있는 다양한 경쟁의 룰을 규율한 법이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갑자기 이제 수출은 그만하고, 미국에 공장을 지으란다. 그래서 결국 우리 기업들이 공장을 지었다. 이렇게 되면 이젠 더 이상 무역이 아니다. 일부 산업분야에서 WTO 협정이 적용될 여지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합의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무력화된다. 이 때문에 꾸준히 업데이트 버튼을 눌러주지 않는 학자는 살아남기도 힘들고, 할 말도 없어진다. 그렇다 보니 존경받는 국제법 학자들은 하나 같이 꾸준히 공부를 이어온 분들이다. F5 버튼을 매번 눌러주지 않으면, 좋은 강의를 할 수 없다. 박사 논문 하나로 30년 동안 강의를 한다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도 국제법 학계에서는 진작부터 불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국제법 학자들은 쉴 새 없이 공부하는, 공부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또, 지금 살아남은 국제법 학자들은 모두 쉴 새 없이 공부한 분들이다. 그래서 국제법은 짬밥 순이 아니다. 국제법 학자는 강물을 거슬러 가는 연어 같은 존재이다. 아무리 먼저 헤엄친 학자들도 꾸준히 자맥질을 하지 않으면, 금방 뒤쳐진다. 삼국지의 유비는 허벅지살을 만지면서 비육지탄(髀肉之歎)을 내뱉었다는데, 여긴 허벅지에 살찔 겨를이 없다. 이런 학문 분야, 나는 이게 멋있다고 생각했다.


국제법은 물 반, 고기반입니다.


논문을 심사할 때 학자들은 자신이 쓴 논문이 학계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심사위원들을 설득해야 한다. 이 때문에 항상 선행연구를 분석하고, 부족한 연구 분야는 무엇인지 탐구한다. 그래서 내 연구가 그 부족분을 메우고 향후 다른 학자들이 후속 연구주제로 나의 연구를 이어나가길 바라며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논문 작성의 8할은 주제 선정이다. 학계에 통찰을 내줄 수 있는 유의미한 주제를 찾아 시사점을 제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보니, 항상 주제를 찾을 때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국제법은 주제가 많다. 그래서, 물 반 고기 반 이라고 불렀다. 그물을 던지면 뭐든 연구 주제가 얻어 걸린다. 일단, ICJ의 홈페이지는 6개의 언어로 표시돼 있다. 이에 따라 판례도 다양한 언어로 발행된다. 국제법에서는 이런 판례들을 자세히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학문적 기여를 할 수 있다. 외국어로 표시된 판례를 국내 공론의 장으로 불러오는 의역(意譯) 작업도 중요한 학술적 창작이 된다. 앞서 잠시 언급하기도 했지만, 일부 학술 논문 중에는 서로 다른 언어의 번역상 차이를 가지고 법률상 의미를 분석한 논문도 있다. 즉, 기사로 치면 아이템이 많다. 바꿔 말하면 해야 할 일도 많다. 각종 연구 서류를 산더미 같이 쌓아두고, 은둔한 신선이 정신없이 일을 마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옆에 있던 도낏자루가 썩어 있을 것 같은 분야.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끝이 없는 공부 분야. 이게 멋있다고 생각했다.


국제법은 역사학이다.


국제법의 전개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역사다. 초기 제국주의 시대부터 시작한 식민지배, 이후 탈식민지의 국제질서 재편 과정, 2차 대전 승전국을 중심으로 전후 UN이 탄생하고 이후 체제 개편 과정, 국제법에서는 법제사(法制史)에 해당하지만, 챕터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한 편의 세계사이다.

또한, 크고 작은 전쟁과 분쟁 그 과정을 규율하기 위해 확인하는 사실 관계 하나하나 또한 그 국가의 국사(國史)에 해당한다. 그래서 국제법 판례엔 항상 역사가 있다. 민사 판례에 개인의 삶이 깃들어 있듯이 국제법 판례엔 국가의 삶이 녹아 있다. 역사가 녹아있다. 원고와 피고가 모두 국가이다 보니, 어떤 사실 관계를 규명하는 과정은 그 나라의 역사를 탐구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 물론, 국제인권법의 영역에서는 개인이 국제법의 주체가 되는 경우도 있다. )

실제로, 필자가 석사 논문을 작성할 때 미얀마, 케냐 등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다루었는데, 이를 규명해 내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살펴본 참고문헌은 각국의 역사를 다룬 논문과 단행본이었다. 그 나라에서 벌어진 사건을 추적하려면, 역사를 알아야 하고, 역사를 알려면 문화를 알아야 한다. 법을 알기에 앞서 역사와 문화를 먼저 접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국제법에서 재미를 느껴 공부를 시작한 사람들 중에는 세계사 탐구가 그 이유인 경우도 여럿 보았다. 배보다 배꼽이 커져, 아예 역사와 문화를 알기 위해 아예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국제법 학자들이 대부분 제2외국어, 제3외국어를 장착(?)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어떤 경우에는 국제법 쟁점 자체는 단순한 데, 해당 사건의 사실관계, 즉 역사를 파악하는 것이 더 복잡하고 어려운 경우도 있다. 학문의 본체보다 이를 준비하기 위한 곁가지가 더 굵직한 공부, 나는 이게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국제법을 공부한다.


-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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