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족하게 솟은 첨탑만이 주머니 속 송곳처럼 구름을 찢고 나와 있을 뿐. 밑에서 쳐다보면 아득한 구름만 보인다.
저 위에 직접 올라가면 어떤 모습이 기다리고 있을까.
좋아, 내 인생의 목표는 이곳에 올라가는 것으로 정했다.
이 건물을 꼼꼼하게 둘러보고 싶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462미터 짜리, 유럽 최고 높이 건물 라흐타센터(Lakhta Centre). 이 건물도 이와 비슷하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
다행히, 이 빌딩은 누구나 출입할 수 있다.
별다른 출입제한은 없다.
그 대신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
아무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건물의 엘리베이터는 최소 3번 이상 정상에 오른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다.첫 경험자에겐 이동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다.
그래서 처음 이 건물에 오르는 사람은
반드시 계단으로만 가야 한다.
'하... 어떻게 가지?'
일단, 조금 더 가까이 가보기로 한다.
가까이만 가도 숨이 턱 막힌다.
고개를 들어 건물을 올려다보면 목을 최대한 꺾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그리고 금세 땅을 쳐다보게 된다. 엄청난 크기에 압도 당해 기가 죽고마는 것이다.
이런 건물을 계단으로 오른다고 생각해보라, 압도 당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 출처: 유튜브 World Lists )
1000층 꼭대기까지 계단으로 오르려면 2가지가 필요하다.
바로, 체력과 인내심이다.
먼저, 체력부터.
일단 체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쉬엄쉬엄 가면 된다.
하루에 한층 올라가서 잠시 쉬고, 또 다음날 한층 올라가서 잠시 쉬고.이런 식으로 간다면, 1000일 뒤에 꼭대기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하루에 두 층씩 올라간다면 500일,
하루에 열 층씩 올라간다면 100일이면 주파할 수 있다.
내 체력에 맞게 장기 계획을 세우면 되는 것이다.
컨디션이 매일 같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좀 괜찮은 날엔 10층까지 오르기도 하고,
다음 날엔 한 층만 올라도 된다.
이런 구체적인 체력 안배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건물의 층별 안내도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그림으로 친절하게 안내된 곳이 있다면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 출처 : 유튜브 GrayStillPlays )
안내도를 보면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견적을 낼 수 있다. 위 사진의 996층에는 스타벅스가 있다. 이 곳에 도착하면 좀 더 둘러보기 편할 것이고, 쉬어갈 만할 것이다.
998층과 999층에는 혹등고래가 있는 수족관이 있다.이 두 층은 특성상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 고래를 살펴보려면 998층과 999층은 반드시 하루에 같이 봐야 할 것이다.
이처럼 체력 문제는 층별 분석을 통한 체력 안배로 해결할 수 있다. 층별 분석이 끝나면 다음에는 부족한 인내심을 채우는 것이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인내심을 채울 수 있을까.
하루에 10층을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상까지 가려면 100일간 꾸준히 오를 수 있는 인내심이 받쳐줘야 가능하다.
인내심이 없이는 목표를 이룰 수는 없다.
한 번에 1000층을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꾸준함이 요구될 수 밖에 없다.
지루해서, 힘들어서, 끝이 보이질 않아서.포기하고 싶은 이유들을 하나하나 이겨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그래서 심심하지 말라고, 지치지 말라고.건물주는 이 건물의 각 층마다 전시품을 진열해 놓았다.
이걸 활용해야 한다.
미술작품도 있고, 문학작품도 있고 지루하지 않도록 그 옆에 친절하게 안내 설명서도 붙어 있다.
그렇다. 알고 보니 이 건물, 박물관이었다.
보통 미술관에는 작가를 대신해 작품을 설명해주는 큐레이터가 있지만, 이 박물관에는 큐레이터도 있고, 각 작품마다 작가가 직접 서 있다. 저작권자를 직접 만날 수 있다. 설명서를 읽다가 궁금하면 작가나 저자에게 직접 가서 물을 수도 있다.
'아니? 이렇게 좋은 박물관이 있다니.'
가다가 힘들면 쉬엄쉬엄 둘러보고,
그 옆에 적힌 친절한 안내문을 잘 읽어보고.
그래도 모르겠거든 작가에게 직접 물어보고.
운 좋게 내가 잘 아는 작품이 전시돼 있으면,바로 다음 층으로 올라가면 된다.이렇게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인내심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물어 물어 올라가다 보면
자신의 체력에 맞게 적절한 시간에
이 박물관을 훑어보고 옥상에도 도착하게 될 것이다.
나는 줄곧 이런 상상을 하면서 읽었다. 아니, 읽어냈다.
우리가 학술 서적이나 논문을 읽을 때, 두 번 기가 죽는다.
일단 압도적인 양에 기가 죽고,
그다음엔 생판 모르는 어려운 내용에 기가 죽는다.
보통 우리는 책장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긴다.
그래서 글을 읽을때 시선이 좌우로 수평이동한다.
마치, 평지를 걷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기게 되는데, 이때, 진도가 안 나가면 답답하다.
소설책처럼 술술 읽혀야 되는데,
다음 장으로 넘어가질 못한다.
그래서,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돈다.
평지를 걷고 있는데도, 다리가 아프다니.
나는 걷는 데 재능이 없나? 혹은 머리가 나쁜가?
오만 생각을 하다 좌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땐, 책을 쌓아놓고 먼저, 옆에서 보자.
다음 사진처럼.
'자, 어떻게 보이는가?'
이렇게 옆에서 보면 그 자체로 높은 건물처럼 보인다. 우리는 건물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하자. 이건 2000층 짜리다.
그래, 우리가 학술 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높은 건물의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다.
한 장 한 장 좌우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벽돌처럼 한 장 한 장 차곡차곡 위로 쌓아 올려야 한다. 즉, 좌에서 우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면서 읽어내야 한다.
오르막을 오를 때는 힘든 것이 당연하다.
안 쓰던 근육을 쓰면 다리가 아픈 것이 당연하다.
원인과 결과가 명백한 고통은 좌절을 가중시키지 않는다.
왜 힘든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만 힘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을 때, 코피가 나면 내가 백혈병 아닌가 걱정이 들지만 코를 후벼서 코피가 나면 그냥 휴지로 훔치면 그만인 것이다.후비면 피가 나니까.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원고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내 자세도 달라진다.
나는 이것을
'상대적 좌절(Relative Frustration)'이라고 부른다. '좌절 상대주의(Frustration Relativism)'라고 불러도 좋다.
이것은 생각의 힘만으로 조절 가능한 좌절이다.
난생처음 '국제법론' 교과서를 폈을 때도,
나는 1612층짜리 건물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아도.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못해도.
이렇게 생각하면 잘 안 읽혀도 크게 좌절감이 들지는 않았다.올라간다는 것은 당연히 힘든 거니까.
물론, 좌절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 난이도 자체가 가져다 주는 '절대적 좌절(Absolute Frustration)'까지 사라지진 않을 테니까.
다만, 상대적 좌절만 사라져도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좌절이 크게 경감된다.
그때부터는 이 난코스를 어떻게 쉬엄쉬엄 갈지, 어떤 부분을 잘 살펴봐야 할지가 문제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원효대사님 말씀이 맞았다.
그러니, 층별안내도를 잘 살펴보면서 계획을 세우며 마음을 잘 다스리면 된다.
쫄지 말고, 목차를 잘 살펴보란 소리다.
국제법 쟁점에 관한 논고를 모아놓은 김대순 교수님의 <국제법론>은 필수 교과서로 꼽힌다. 19판 기준. 전체 1612페이지이다.
우리가 생소한 외국에서 가서 그 나라 박물관의 유물을 볼 때내가 그 유물과 역사에 대해 모른다고 머리를 쥐어뜯고, 좌절하지는 않는다. 혹시나 운 좋게 한국어 가이드가 있으면 설명을 읽어보고, 없으면 영문 설명이라도 읽어보면서 알아가는 재미를 찾으면 그만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절대적 좌절'을 이렇게 극복했다.
다행히, 학술 서적들에도 박물관처럼 다양한 안내문이 붙어있다. 바로, 각주(footnote)이다. 처음에 글을 읽을 때는 각주를 놓치고 본문을 대충 따라가기가 쉬운데, 나는 오히려 처음 읽을수록 각주까지 꼼꼼하게 읽을 것을 권한다.
<국제법론> 각주 433번, 친절한 부연설명이 거의 본문 내용만큼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참 친절한 박물관이다.
각주를 봐도 내용을 잘 모르겠을 때, 즉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어도 작품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그때는 비로소 작품의 원작자를 찾아가서 물어보면 된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보다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한테 가서 직접 물어볼 수는 없지만, 논문에 인용된 '작품'은 그곳으로 바로 찾아가 원작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다. 박물관에서 혹은 미술관에서 작가를 찾아가서 묻는 심정으로 원전을 찾아가서 읽어볼 수 있다. 저자가 인용한 작가는 부활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처럼 언제나 친절하게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작가의 좌표는 참고문헌과 각주를 통해 꼼꼼하게 기술돼 있다. 학계에서 정한 최소한의 약속이자, 최소한의 양심이다.
이른바 '각주 쇼핑(footnote shopping)'이 그래서 중요하다.
각주 462번에는 작품을 만든 Boczek가 직접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잘 모르면 Boczek에게 가서 물어보면 된다.
이런 식으로 박물관 꼭대기에 오르다보면, 그 다음엔 다리에 근육이 붙어 좀 더 짧은 시간에 정상에 오를 수 있게 되고, 서너 번 오르게 되면 그때부터는 앞서 말한대로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비로소 발췌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관문을 통과하면 어떤 맥락에서 어떤 내용을 살펴보아야 하는지 목차만 보고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층별 안내도만 보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좀 더 익숙해지면 이제는 감으로 찾는다. 층별 안내도를 보지 않고도 원하는 층의 버튼을 누를 수 있다.
공부를 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왕도도 없다. 누구나 생소한 분야를 공부하게 되면 커다란 벽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필자는 학술 논문과 서적을 대하는 자세만 바꿔도 효율이 높아지는 기적을 경험한 바 있다. 그래서, 새로운 분야를 탐독하며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이 방법을 권하고 싶다.
우선, '상대적 좌절'을 없앨 수 있는 방법,
수평을 수직으로 세우는 관점의 전환이다.
또, '절대적 좌절'을 줄이는 방법, 각주 속 작가들과의 만남을 상기하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는 작가들과의 만남을 즐기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단, 주의할 점이 있다.
상대적 좌절을 없애도, 절대적 좌절을 줄여도 여전히 힘이들 수 있다. 넘어야 할 목표가 높고 클 수록 힘에 부칠 것이다. 이럴 때는 물리적인 공부의 양을 늘려서 극복할 수도 있고, 훌륭한 스승을 발판 삼아 이해를 넓힐수도 있겠다. 그런 노력은 당연히 해야하는 것이다.
다만, 어떤 책을 읽다가 커다란 벽에 부딪혔을 때 당신이 힘들다면, 힘들수록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지금 당신은 안 쓰는 근육을 쓰는 중이니까. 또, 힘든 것은 당연하다. 바로, 당신이 맞닥뜨린 그 책은 실제로는 고층건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