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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양산업 종사자입니다

MBC의 사내벤처 공모 소식을 듣고 든 생각들

by 염띠

CD가 주요 음원 저장 수단이던 시절, 기업들은 앞다투어 더 좋은 CD플레이어를 개발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더 많은 기능에도 더 얇고 더 가볍게.



그런 노력 끝에 두툼했던 CD플레이어는 점점 더 얇고 가벼워졌다.

기업 입장에서 이런 노력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노력은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수요에 부응해야 이윤을 얻을 수 있고,

이윤 추구는 기업의 존재 목적이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CD플레이어는 증발했다. 더 작고, 더 가볍게. 그렇게 점점 얇아지다가 아예 사라진 것이다.



울트라슬림 CD플레이어, 한 때는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기업들은 억울할 수도 있다.


자신들은 소비자들이 원하는 걸 해준 것뿐인데,

그만 쫄딱 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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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MP3의 출현 때문이었다.


음악이 파일 코드 형태로 녹아 있는 MP3 음원은 물리적 크기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이런 특징이 그대로 음원 시장의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가 된 것이다.


음원 시장은 일대 격변이 일어났다.


2000년대 초반, 소리바다를 중심으로 한 음원 유통 시장이 형성됐고, 이제 CD플레이어가 아닌 MP3플레이어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쉬운 기술이다 보니 대형 전자회사뿐 아니라

거원, 아이리버 등 국내 중소기업들까지 경쟁력을 갖추고 가세하면서 시장은 커지고, MP3 플레이어의 품질 경쟁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마치 CD플레이어 시장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리버社에서 만들었던 목에 거는 MP3, 한 때 지금의 에어팟 만큼 힙했더랬다. ( 출처 : 구글이미지 )


차별화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어딘가에서는 엄지손가락 마디만 한 MP3 플레이어가 나오더니 아이리버社는 아예 목걸이형 MP3 플레이어를 만들며, 자신의 경쟁상대로 패션 브랜드인 '아르마니(Armani)'를 지목하는 일도 있었다.


" MP3로 유명한 아이리버의 성공요인은 무엇일까? 그들은 자신의 경쟁사를 누구로 생각하고 있을까? 아시다시피 MP3는 그렇게 하이테크가 아니다. 웬만한 회사면 다 만들 수 있는 중급기술이다. 이 회사의 양 사장은 자신의 업을 패션업으로 재정의했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사도 조르지오 아르마니라는 것이다. 디자인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디자인 전문회사 이노디자인에 모든 것을 맡겼다. 단순히 외주를 준 것을 넘어 주식의 일부를 줌으로써 파트너 관계를 맺었다."

< 2004년 9월 15일 머니투데이 기사 中에서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453013


흔히 수요자가 원하는 것을 잘 만들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이처럼 때로는 소비자가 알지 못했던 수요를 일깨우는 게 더 강한 파괴력이 있을 수 있다.

비슷한 예로 의류관리기 스타일러도 있다.

스타일러가 있기 전 소비자들은 다리미로 족했다.더 좋은 다리미를 원했지. 이런 의류관리기를 달라고 요청한 적은 없다.


다리미를 대신해 기존에 없던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서

없던 수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난 이것을 '수요 건설(Demand Construction)'이라고 부른다.


무언가를 새로 건설한다는 것은 기존의 것을 파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건설과 파괴는 한 몸이다. 동전의 양면이다.


그래서 '수요 건설(Demand Construction)'은

'수요 파괴(Demand Destruction)'이기도 하다.


MP3가 CD플레이어 수요를 파괴시켰고,

동시에 MP3플레이어 수요를 건설했듯이.




지난해는 역사적인 해로 기록될 것이다.

이마트가 2분기에 창사이래 첫 적자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른바 '기름집'으로 불리던 정유사도 큰 폭의 적자를 기록했고, 유튜브와 넷플릭스에 시장을 내 준

지상파 방송사, MBC도 1000억 가까운 적자를 냈다.

다른 지상파 방송사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과점 기업들이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그러니까 2019년은 먹이 사슬의 상위에 포진해있다고 믿었던 이른바 '레거시 공룡'들이 본격적으로 픽픽 쓰러지기 시작한 한 해였다. 과점 공룡들이 운석을 맞은 것이다.


참고로, 공룡은 운석을 맞고 멸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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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다.


이마트는 지난해 2분기 299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창사 이래 첫 적자였다.


한때 잘 나가던 이들에게 큰 폭의 적자가 발생했다는 건 수요가 갑자기 줄었다는 뜻.


다시 말해, 수요가 파괴되었다는 뜻이다. 그럼 어딘가에는 반드시 이 수요를 파괴한 사람들이 있다. 아마, 그들은 그리고 그 땅 위에 새로운 '수요'를 건설했을 것이다.




일단 MP3 플레이어가 나온 이상 아무리 얇은 CD플레이어를 만들어도 절대 이길 수 없다.


한번 파괴된 수요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방식으론 회복이 불가능하다.


그렇다 보니, 이제 '공룡'들은 MP3 생산에 뒤늦게 뛰어든 CD플레이어 제조업체들처럼 이 '수요'를 한 템포 늦게 뒤쫓고 있다. 지상파 3사는 WAVVE라는 OTT를 만들어 넷플릭스에 대적하고, 대기업 유통사도 뒤늦게 새벽 배송에 뛰어든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팔로어십(Follwership)은 다시 예전의 영광을 찾아주지 못한다. 새로 생긴 수요를 또 박살 내는 리더십(Leadership)이어야만 대적할 수 있다.


이미 업계를 선점한 리더들이 흘린 이삭을 줍는 식으로는

손실의 규모를 줄여줄 뿐, 새로운 이익을 내는 것은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거시 팔로워'들 중에 아직 그 사업모델로 흑자를 낸 기업은 없다.


게다가, 그걸 따라 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기존 몸집이 너무나 거대했기 때문에 한걸음 떼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존의 움직임이 너무 강해서 그 관성을 이겨내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사양산업의 구성원들은 이 점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해도 안 되는데 어쩌나. 에라 모르겠다.


그래서, 슬프다.

그럼, 그냥 힘을 빼게 된다.


나만 살 궁리를 해서 이기도 할 것이고, 해도 안될 거란 허무주의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정서가 팽배해진 조직은 특정인들에게

부하가 쏠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삿짐을 나를 때, 한 사람이 힘을 빼면 갑자기 무게가 실리는 것처럼 슬그머니 방관하는 자가 하나둘 늘어나면 그만큼 누군가는 힘을 더 써야 한다.


"왜 나만 힘들이고 있지? 알아주지도 않는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종국엔 모두가 힘을 빼게 되고,

그럼 이삿짐은 바닥에 떨어지게 된다.




이런 와중에 오늘 MBC에서 사내벤처를 공모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실 이대로가면 우리도 이삿짐을 떨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따지고 보면, 사내벤처는 흉년에 본업을 내친 농부의 공장 취직과도 같은 슬픈 일이다. 실제로 KBS는 구조조정을 발표했고, MBC도 임금 삭감이 시작되고 있다.


농사만 지어서는 생계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만큼 방송사의 사내벤처는 전례가 없던 일이다.


그래도 나는 비록 늦었지만 여기에서 한가닥 '수요 파괴'의 희망을 본다.


이대로 이삿짐을 서로 떠넘기다가 떨어뜨리는 것보다는 아예 그 짐을 버리고, 새로운 옮길 거리를 찾는 게 낫다. 늦을수록 팔로어십보다 리더십을 연구하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위기 의식은 업계 전반에 퍼져있는 듯 하다.

MBC뿐 아니라 이미 다른 언론사들이 경쟁적으로 사내벤처 육성에 나서고 있다.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47760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른다.


나도 그래서 멍석이 깔린 김에 제갈량이 기도를 올리는 심정으로

그놈의 '새로운 수요'가 무엇일지 연구해 볼 참이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기 때문이다.


그 잘 나가던 MP3플레이어도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스마트폰의 탄생과 함께 MP3플레이어의 수요도 처참히 파괴되었다.


-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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