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연 Mar 06. 2021

얼마나 아파야 하는 거여

     


충청도가 고향이라는 최경선(가명) 어르신이 요양원에 들어온 것은 작년 7월 무더위가 한창일 때였다. 말기 암 환자여서 방사선 치료를 막 끝내고 왔다는데 이미 완치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길고 진한 속눈썹 아래 선한 눈망울과 ‘그래여, 저래여’ 하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인상적이었던 그녀는 키는 작지만 제법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인지 능력이 충분히 있어서 의사소통에 별문제가 없었고, 처음에는 그저 한없이 얌전하고 따뜻해 보이기만 해서 좋은 분이 들어오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식사 때마다 반찬이 너무 맛없다고 불평을 했고, (사실은 모진 방사선 치료 탓에 입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늘 뭔가가 못마땅한지 이런저런 요구가 많았다. 어머니를 빼닮아 또한 한없이 착해 보이는 큰아들이 맛있는 반찬을 싸 들고 수시로 와서 식사 수발을 들곤 했지만 끝내 그녀의 입맛을 찾아주진 못했다. 그리고 점차 늘어나는 고통과 싸우는 탓인지 그녀는 좀처럼 낯선 우리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에여, 에여, 이제 내가 의지할 곳은 요양보호사 선생님들 뿐인가 벼”

라는 얘기를 하며 그녀가 자주 눈물을 보이기 시작한 건 한 달 정도 지난 후부터였다.

그녀는 면회 오지 않는 딸들을 원망하며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쓸데없이 왜 자꾸 우시냐고 때로는 면박을 주는 척도 했지만, 서러움이 가득 묻어 있는 흥건한 눈물을 닦아드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코끝이 아려올 때가 많아 괜스레 창밖을 보거나 복도 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녀는 당신이 말기 암 환자라는 사실을 몰랐지만,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는지 먼 곳에 산다는 딸들이 오기를 늘 기다렸다. 하지만 무슨 사연이 있는지 결국 퇴소할 때까지 그 딸들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요양원에서는 찾아오지 않는 자식들을 기다리며 늘 문밖을 주시하는 어르신들이 있다. 치매 때문에 막상 자식들이 와도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때때로 깊은 한숨을 쉬며 진심으로 자녀들을 보고 싶어 하고, 집에 가야 한다고 매달리며 사정을 할 때 무엇보다 난감하다. 자식들이 찾아와 오순도순 담소를 나누거나 간식을 나눠 먹는 게 같은 방에 거주하는 어르신일 경우, 부러움과 질투가 공존하는 그늘진 눈빛들을 마주하는 것은 고역에 가깝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다가도 ‘우리 딸’, ‘우리 아들’을 외치는 어르신들끼리 말다툼이 벌어지는 것도 보통 이때쯤이다.


가을이 되자 그녀의 상태는 급속히 나빠졌다. 처음에는 혼자서 능히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그녀가 기저귀를 갈 때마다 자줏빛 혈흔의 흔적이 뚜렷해지며 더 이상 스스로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온몸이 칼에 베이는 듯 아파서 잠을 쉽게 청할 수 없다고 했고, 밤에는 그동안 없었던 섬망 증세마저 보이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마구 지르기도 했다. 조금씩 생명의 불이 꺼져가고 있는 그녀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정성껏 시간마다 체위를 변경해 주고,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말을 잠시나마 들어주며, 곧 나아지실 거라고 짐짓 위로해 주는 것뿐이었다.

풍기는 피비린내가 조금씩 심해지면서 그녀는

“에여 에여, 도대체 얼마나 아파야 죽는 거여. 얼마나 더 아파야 되는 거여”

라며 온몸에 퍼진 통증으로 날마다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의 손발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겁이 나서 당장 병원으로 모셔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요양원에서는 신장에 너무 부담이 돼서 위험하다며 진통제조차 마음껏 줄 수 없다고 했다. 가족에게 연락을 하고, 서로 의논하는 그토록 긴 시간들이 왜 필요한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요양원에 들어온 지 넉 달 만인 어느 날 새벽, 그녀는 산소포화도와 혈압이 계속 떨어지면서 예상됐던 응급 상황을 맞이하고 나서야 병원으로 보내졌다. 처음부터 그녀에게는 노후 생활공간인 요양원보다는 요양병원이 더 적합한 장소였을 것이다. 물론 보호자들에게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을 테고, 감당하기 쉽지 않은 병원비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휴무일이라서 마지막으로 인사도 건네지 못한 그녀가 떠난 802호실 그녀의 자리는 다음 날 바로 다른 어르신으로 채워졌다. 며칠 간만이라도 빈 침대로 남아 있었다면 혹시 야속하고 서운한 마음이 좀 덜 했을까. 떠난 그녀의 자리에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다른 어르신이라니. 대기자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잠깐의 추억조차 허용하지 않는 냉정한 현실을 목도한 탓인지 한동안 개운하지 못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맑고 티 없는 호수 같던 눈망울에서 주근깨 송송 박힌 붉은 두 뺨으로 흐르던 설움의 눈물을 닦아드렸던 기억이 아직도 뚜렷하다. 그녀는 떠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이후 그녀의 소식은 영영 듣지 못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