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 탓에 날마다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리 요양원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조용한 분을 꼽으라면 단연 802호실에 있는 최미자(가명) 어르신이다.
하루 종일 있는 듯 없는 듯 큰소리 한 번 내는 적이 없는 그녀는 스스로 워커를 사용해 능숙하게 이동이 가능하다. 지나칠 정도로 왜소하고 깡마른 체격에 미소년같이 작은 얼굴, 언제나 차분한 행동과 교양 있는 말투 그리고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거짓 없는 착한 심성은 한눈에 봐도 그녀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녀가 늘 목에 걸고 다니는 2G 휴대폰에는 사랑하는 손녀딸의 사진이 화면을 장식하고 있는데, 그 손녀에게 전화라도 오는 날엔 천하에 없는 다정한 할머니의 목소리로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대화를 나눈다.
“늘 고생들 하는데 이런 부탁하기가 미안해서... 나, 이것 좀 해 줘요”
아주 사소한 것임에도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언제나 이런 말로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그리고 ‘잘 먹었습니다.’ 또는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말을 잊지 않는다. 식사 시간이 가까워져 ‘어르신, 식사하세요’ 하고 부르면 ‘네네~~’하고 벌떡 일어나 스스로 거실로 나가 자신의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그녀 덕분에 일손이 모자랄 때는 더욱 고마운 그녀다.
솔직히 요양원에 그녀 같은 어르신만 있다면 요양보호사들의 일이 고되고 힘들다는 말을 못 할 것 같다. 그런 만큼 그녀는 요양보호사들의 신뢰와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그녀는 타인을 배려하고 폐 끼치지 않으려는 것에 익숙하다. 같은 방에 있는 다른 어르신들의 말도 안 되는 투정까지 다 받아주고 달래며 혹은 위로하고 다독인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우리들의 관심에서 조금 멀어지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알고 보면 그녀 역시 각종 노환에 시달리고 기억력이 쇠퇴해가는 힘없는 노인임에도 말이다.
같은 방을 쓰는 다른 어르신들이 대부분 중증 치매에 걸린 상태라 마땅히 유쾌하게 대화할 상대가 없다 보니, 안쓰럽게도 그녀는 앙증맞은 인형을 안고 이불을 덮어쓰고는 홀로 찬송가를 부르며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 TV도 즐기지 않는 그녀가 말이 통하지 않아 느끼는 외로움을 인형으로 달래는 모습을 보면 한없이 애잔하다.
그런데 얼마 전, 늘 평정을 잃지 않던 그녀가 갑자기 당황해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조용히 불렀다.
“앞이 안 보여. 눈이 안 보여... 어떡해...”
순간 놀라서 허둥대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앞이 안 보인다고요? 어르신, 정말요?”
호들갑을 떨며 그녀의 볼을 양손으로 잡고 눈을 살피던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안도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이고, 어르신, 눈곱이 심하게 끼신 거예요. 양쪽 다 심하게 눈곱이 막처럼 껴 있네요. 눈을 다 덮었어요. 그래서 안 보이는 거고요.”
“아......정말 그런 거였어요?”
“미안해요... 괜히 걱정하게 했나 봐”
“내가 눈병이 좀 심해졌나 보네, 허허허”
안심이 되는지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는 그녀의 두 눈에서 조심스럽게 눈곱을 제거하자 그녀는 다소 민망한 듯 여느 때처럼 밝게 웃었다. 그때서야 아침이면 간호조무사들이 늘 안약을 그녀의 눈에 넣어주던 게 생각났다. 이쯤 되면 요양보호사로서 직무유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고 했던가.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스스로 너무 잘하고 있는 분이라는 생각에,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돌봐야 하는 당연한 일에 잠시 소홀했던 것이다.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며 안심하시라고 말은 했지만, 순간 잠시나마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을 그녀의 심정을 생각하니 왠지 미안한 마음이 자꾸 들었다.
‘혹시... 정말, 저러다 어느 날 눈이 안 보이시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기우이길 바라지만, 노인의 건강이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빠질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가 없다.
요양원에서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곁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어르신도 갑자기 돌아가시는 일이 드물지 않은 게 현실이다.
지금 내 곁에 연로한 부모님이 계시다면, 혹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전화할 때마다 항상 별문제 없다고, 당신은 건강하다고 큰소리치시는 부모님이 있다면 한 번쯤 돌아볼 일이다.
어느새 숨만 쉬어도 아플 나이가 되지는 않았는지, 굳이 말하려 하지 않는 고통 때문에 오늘 밤에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은 진지하게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