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제일 춥군
혼자 여행 막바지엔 외로움보단 몸이 지친다. 포르토에서 공항으로 일찍 나서 휴대폰을 충전하고 햇볕을 쬐며 무상무념으로 방전된 체력도 충전한다. 그러다 배가 고파져 인스턴트 수프를 먹으려니 뜨거운 물 파는 곳이 없어 티를 시켜 뜨거운 물을 얻었다. 그렇게 수프도 마시고 티도 마시고 물배를 채운 채 파리에 날라왔다.
급격히 추워진 파리에서 살이 에인다. 포르토에 다가온 겨울은 봄 수준이었네. 추우니 점심도 수프다.
파리는 초겨울이라 4시 반쯤 되니 해가 진다. 에펠탑 본 게 전부인데 하늘이 캄캄하다. 춥다 투덜거리며 샤오궁을 지나 인셉션 다리까지 걸었다. 걷다 보니 눈도 내렸다. 파리는 언제 와도 춥구나.
파리에서 이틀째는 일요일이었다. 첫째 주 일요일이라 대부분 관광지, 박물관에 입장이 무료란다! 오예! 오르셰나 퐁피두는 커서 갈 엄두가 안 나고 루브르는 더 보고 싶지 않다. 줄을 상상하니 웩. 그래서 조금은 작지만 갬성이 넘치는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갔다. 10시쯤 시간 맞춰 가니 줄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입장했다.
모네에 수련 4부작을 볼 줄이야. 몽환적이고 흐리멍덩하지만 연못에 존재감은 확연했다. 빛에 따라 아마 날씨나 시간에 따라 같은 연못 다른 느낌, 여러 매력을 보여준다. 물가에 앉아있는 기분이라 맘에 드는 곳에 앉아 분위기를 느꼈다. 개구리 우는소리가 나는 듯했다. 다아시가 수영하던 물 같기도 하고 김밥이 먹고 싶어지기도 한다.
지하 전시관에선 아프리카 문학 전시회 진행 중이다. 꽤나 앙증맞은 작품이 많았다.
다음 관광지는 생트샤펠 성당. 방 전체가 빼곡히 채워진 창문에 징그럽고 대단할 정도로 밀집되어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가 압도적이다. 날이 좋아 햇빛이 촤라락 들어왔으면 눈부시고 더 어지러웠겠다.
점심은 또 수프. 양파 수프! 프랑스 어니언 수프는 꼬랑꼬랑한 버터 맛이 강해서 호불호가 조금 있지만 내게 최고로 맛있다. 쌀쌀한 날이라 원샷 때리기 좋았다. 후식은 분위기 낸다고 고급진 디저트 카페에 갔다. 신기한 질감에 케이크. 같은 단맛인데 먹어보지 못한 이상한 단맛이 난다. 멍청이라 이상 설명 불가.
이 날 최고는 라파예트 백화점 트리였다. 유딩레벨 갬성이라 알록달록 풍선으로 만들어진 대형 트리에 반했다. 시간마다 매달린 풍선이 조명과 함께 왔다 갔다 한다. 풍선이 일사불란 움직이면 나 포함 어린이들이 캬~~ 소리 지른다. 층층마다 전부 서서 트리를 각도별로 구경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진 샹들리제 거리를 보며 고민했다. 숙소로 돌아갈까? 하지만 갑자기 개선문 위를 올라가 보고 싶고 무료기도 해서 마지막 다리 힘을 이끌어 계단을 올라갔다.
절단된 에펠탑과 자그매진 관람차가 보인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이 거리.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어제 본 것처럼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4개월 전 사진이라니. 마음 편히 돌아다닐 날이 더이상 없을 것 같아 파리 거리가 더욱 아련해진다. 돈 벌어 또 가면 되지만 ㅜ.ㅜ 일하기 싫다. 돈 잘 쓰기 대회 나가면 1등할 수 있는데 ㅜ.ㅜ
낮에 줄이 길게 늘어진 루브르보다 비온 뒤 영롱하고 스산해진 루브르 피라미드가 더 분위기 있다. 너무 거대해서 지나치곤 했는데 야경이 참 이쁘구나. 여기서 에펠탑 열쇠고리 파는 흑형이 예쁜 사진도 찍어줬다.
파리에선 추워서 국물 있는 음식만 먹었다. 일본인 주방장에 일본인이 서빙하던 라멘집. 베트남 이민자 사장님이 팔던 쌀국수. 진짜 맛있더라! 역시 이민자에 나라.
3일째. 무료관광 뽕 뽑겠다고 돌아다닌 탓에 피곤하기도 했고 짐도 싸야 해 쇼핑하고 커피 마시고 빵 먹고 호스텔 주변을 걷는걸로 마지막 일정을 마무리했다. 따뜻한 찌개가 먹고싶어 한국에 빨리 돌아가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가기 싫었다. 나에 자유가 벌써 끝이라니. 세달 만에 돌아가는 집은 똑같을 텐데. 한국은 한파라 여기보다 더 추울 텐데 얼어 죽는 건 아닌지. 한국에 가려니 생각이 많아져 진심으로 가기 싫었다. (엄마 미안.)
이 포스팅이 오래 걸린 이유도 귀차니즘 탓이 아주 크지만 추억을 천천히 곱씹고 싶었다. 하지만 추억 소환하는 능력치가 낮고 갬성이 얕은 탓에 사진만 많고 춥다는 말만 가득히 남기고 말았지. 파리 포스팅을 마지막으로 춥다로 시작해 춥다로 끝난 방랑이 끝이 났다.
아직도 수집할 기념품을 정하지 못했고 그리 걸어도 매번 길을 잃는다. 덕택에 구글 지도 읽는 능력이 늘었고 길을 잃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모으는 기념품이 없어 캐리어도 항상 가볍지. 20인치 캐리어로 삼 개월 돌아다닌 나야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