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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희영 Feb 24. 2021

엄마의 머리카락

 엄마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올케언니의 손이 살짝 떨고 있었다. 가위의 날이 무뎠던지 머리카락은 쉽게 잘리지 않았다. 간신히 몇 가닥 잘라내자 언니가 말했다. “조금만 더 잘라줘요.” 올케언니는 울상을 지었지만, 이번엔 조금 더 많이 잘라내는데 성공했다. 언니는 옆에 있는 티슈를 뽑아서 머리카락을 잘 감싼 후, 가방 안쪽에 그것을 소중히 집어넣었다.      

 엄마는 그 전날 저녁부터 의식이 없었다. 우리는 엄마가 드디어 깊은 잠을 주무신다고 생각했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이후, 엄마의 통증은 더 심해졌었다. 엄마는 집에 두고 온 마약 진통제를 계속 찾았다. 처음엔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새벽에 집에서 쓰러진 엄마는 응급실로 옮겨졌고, 뇌출혈로 인한 마비가 왔다.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됐고, 혀까지 움직이지 않아서 발음할 수 없었다. 의사소통이 되질 않으니 엄마는 답답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종이와 펜을 드려도 엄마는 쓰지 못했다. 엄마의 단정하고 예쁜 글씨를 기대했던 나는 그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엄마 손가락에 힘을 꽉 주고 글씨를 써 봐. 그렇게 잘 쓰던 글씨를 왜 못 써.” 나는 엄마를 채근했다. 그러나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시간이 흐를수록 엄마의 통증은 거세졌다. 엄마는 말을 할 수 없는 당신의 처지도 잊어버린 듯했다. 비명 한마디 없이 온몸을 뒤틀며 통증을 참아내던 엄마는, 몸에 부착된 패치와 연결된 호스들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엄마는 헉,하는 단말마를 뱉으며 눈을 부릅떴다. 부릅뜬 눈은 허공을 향했고 그 눈을 가득 채운 건 공포였다.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엄마가 비명이라도 질렀다면, 차라리 덜했을 참담함이었다.

우리는 엄마가 호스를 움켜쥘 때마다 엄마의 손을 빨리 잡아채야 했다. 소변줄이 움직일 때마다 엄청나게 아프다고, 언젠가 소변줄을 달고 입원했던 올케언니가 알려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그렇게 거세게 소변줄을 잡아당겼음에도 아픈 얼굴을 하지 않았다. 암 때문이었다. 엄마는 췌장암 말기 환자였다. 담당의는 췌장암의 통증이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끔찍하며, 화형을 당하는 고통에 맞먹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통증을 겪고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고통에는 한계가 있었다. 엄마가 단 일 분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몸에 붙은 것을 뜯어낼 때마다, 간호하던 우리는 지쳐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엄마가 떼어낸 패치를 다시 붙이고, 엄마를 오른쪽 왼쪽으로 바꿔 누이고, 엄마 대신 배와 등을 문질러주면서 우리는 조금씩 스스로의 고통에 더 열중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극도로 예민해졌다. 각자의 가정은 엉망이 됐고, 서서히 몸도 무너져 갔다. 가족들 얼굴이 누렇게 뜨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엄마를 간호한 지, 기껏 열흘이 지난 때였다.      


 그날따라 으슬으슬 몸살 기운이 느껴졌다. 동네병원에 들러 약을 처방받고 약국을 향해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상가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엄마가 자주 다녔던 미용실이 눈에 들어왔다. 미용실 유리창으로 파마를 말고 앉아 있는 손님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할머니였다. 엄마는 머리 손질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노인네가 두세 시간씩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쉽지 않았을텐데 엄마는 정기적으로 미용실을 찾았다. 늘 같은 파마와 같은 길이의 컷이었지만, 엄마는 그래서 늘 말끔했다. 파마하고 온 날이면, 엄마는 내게 다가와 물어보곤 했다. “어때? 괜찮니?” 고개를 치켜들고 좌우로 돌리며 엄마는 살짝 들떠 있었다. 나는 엄마의 파마머리를 힐끗 쳐다보며 대답하곤 했다. “응. 잘했어. 엄마.’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말이었다. 그러면 엄마는 미용사가 얼마나 당신의 머리카락을 칭찬했는지 자랑했다. ”숱이 이렇게 많은 노인네는 처음이래. 내가 염색을 한 번도 안 했다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얼마나 부러워하던지!“ 엄마가 들려주는 미용사의 예찬 내용은 늘 같았고, 그래서 나는 좀 지겨웠지만, 엄마는 어린애처럼 신나서 좋아하곤 하셨다.

그러고 보니, 엄마의 풍성하고 까만 머리카락은 당신 평생의 자랑이셨다. 미용실에 다녀온 날이면 엄마는 트로트를 흥얼대며 거울을 자주 들여다봤다. 엄마 옆을 지나칠 때마다 파마약 냄새가 훅, 끼쳐 왔다. 강렬하면서도 살아있는 냄새였다. 엄마의 머리에서 풍기던 파마약 냄새를 그리워할 줄, 그때의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미용실 유리창 안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무심한 표정으로 앉은 사람들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 일상의 표정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질투가 났다. 그곳에서 머리를 말고 앉은 엄마를 만날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었다.     

 엄마는 쓰러지기 며칠 전에도 파마를 했다. 엄마집에 찾아간 언니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엄마가 말했다고 했다. ”마침 잘 왔다. 파마하러 가자!“

암투병 중인 엄마가 몇 시간이고 미용실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있겠냐고, 언니는 걱정했다. 그러나 엄마는 간단하게 하고 오겠다며 옷을 갈아입었다. 엄마는 알았을까. 그것이 엄마의 마지막 외출이었다는 것을. 초봄이었다. 바람은 아직 차가웠지만, 햇살은 따스했다. 그날 엄마는 아직은 작고 연한 벚꽃이 핀 걸 봤고, 참 예쁘다고 말했다.  조금 힘들었지만, 엄마는 파마가 끝날 때까지 잘 참아냈다. 엄마는 파마한 모습에 만족해 하셨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엄마의 머리카락은 ‘덕분에’ 단정했다.


병실 안에 들어섰을 때, 엄마는 산소 마스크를 하고 잠을 자고 있었다. 아침부터 그렇게 주무시고 계셨다고 올케언니가 말했다. 입원한 지 열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그동안 엄마는 한 번도 편안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엄마, 나 왔어!“ 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아파도 우리가 부르는 소리엔 꿈틀, 반응을 보이던 엄마가 반응하지 않았다. 깊은 잠에 빠진 것 같다고 올케언니가 다시 말했다. 이상했다. 그 끔찍한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질 일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지쳐있는 상태였다. 엄마가 잠들어 있으면, 엄마의 몸을 주무르거나, 쓰다듬어주지 않아도 되었다. 엄마가 뜯어낸 패치를 다시 붙이거나, 소변줄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나는 잠든 엄마의 손을 잡고 엄마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 모든 게 그저 악몽이었으면 좋겠다고, 엄마 이제 일어나서 집에 가자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엄마는 다시 눈뜨지 않았다. 내 중얼거림을 들었던 걸까. 지친 우리를 걱정해서 엄마가 서둘러 가버린 것 같았다. 나는 식어가는 엄마의 손을 오래도록 놓지 않았다.      

내 책상 서랍엔 엄마의 머리카락이 있다. 엄마를 묻은 후, 나는 올케언니가 잘라둔 머리카락을 언니와 나눠 가졌다. 파마해둔 머리카락은 둥글게 말려있다. 하얀 새치도 섞여 있지만, 엄마의 자랑답게 염색 한 번 안 한 까만 머리카락이다. 엄마의 부재를 감당하기 힘든 날이면, 나는 엄마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져본다. 까칠한 감촉인데 엄마 맛이 난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엄마 맛, 그러나 한순간도 잊을 수 없는 엄마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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