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변희영 Jan 07. 2022

엄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싸워?

아무렴 어떠랴. 손을 내밀 수만 있다면 

  내가 살던 아파트 한켠은 온통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채였다. 그 건너편엔 오래된 임대 아파트가 겹겹이 늘어서 있었다. 하필이면 우리집은 철조망 바로 앞 동이었다. 복도로 나와 내려다보면 임대 아파트 상가가 코앞에 있는 듯 가까이 보였다.

여름밤이면 그곳 술집 앞에 파라솔이 설치되고 여러 개의 테이블이 길가에 질펀하게 늘어서곤 했다. 저녁 즈음부터 시작된 그들의 음주가무는 새벽이슬 내릴 때까지 계속됐다. 문제는 싸움질이었다. 그들은 틈만 나면 싸웠다. 악다구니로 소리를 질렀으며 술잔을, 술병을 수없이 깨부수었다. 천박한 욕설을 내뱉다가 기어코는 멱살을 잡고 육탄전을 벌였다.     

자던 아이는 울며 묻곤 했다. "엄마, 저 사람들 왜 저렇게 싸워? 경찰에 신고해. 엄마... "

경찰은 그곳을 빙글빙글 돌고 또 돌았다. 심지어는 술집 바로 앞에 차를 댄 채, 악다구니로 싸우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차 안에서 쉬고 있기도 했다.

때로 취한 그들이 술병을 깨고 바닥을 뒹굴거나 누군가의 발길질에 오토바이가 넘어지고 자전거가 뭉개져도 경찰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움직임 없는 경찰차는 긴 하품이라도 하듯 지겨워 보였다.

취한 그들 중 여자가 끼어 있는 날엔 삼중주 화음 같은 날선 소리들이 우리 집 유리창까지 날아와 박혔다. 아니, 그것은 내 심장 모서리 어딘가를 찔러대는 섬뜩한 소리였는데, 그런 날이면 나어린 아이의 두 귀를 막고 혹여 아이가 들을 새라 벌벌 떨고 앉았기도 했다.     

그들의 싸움은 길고 치열했다. 아침이면 등교하던 아이들이 그들의 토사물을 피해 빙 돌아서 반원을 그리며 걸어갔다. 자세히 바라보면 그들 중 어떤 이는 상가 한 귀퉁이에 몸을 둥글게 말고 웅크린 채였고, 때로 그 누군가는 아스팔트에 대자로 뻗어 지네처럼 등을 굽었다 펼치며 기어가기도 했다.  

   

 ‘아... 저이들은, 서로를 죽일 듯이 물어뜯는 저이들은, 실은 자신이 미운 거로구나. 제 자신을 향한 증오를 견딜 수 없어서 차마 자신을 죽이지 못해서 저리도 패악질을 하는 거구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들의 비명과 소란을 접하며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일까 새롭게 들려 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내 가슴 웅숭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오십이 넘는 중년이 되도록 집 한 채 갖지 못한 삶,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도 명예도, 하다못해 좋은 아내도 엄마도 되지 못한 내가 답답한 가슴을 치는 소리였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그토록 무시하고 백안시했던 저이들의 소란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들과 나는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었을까, 물론 아닐 수도 있겠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남루한 노인과 중년의 남성이 아파트 주차장에 멈춰 있었다. 노인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는데 남성은 노인의 아들인 듯 보였다. 중년의 남성은 그들 옆에 있는 음식물 쓰레기통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버려진 김치를 움켜쥐더니 비닐 봉투에 담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으로 내가 그들 앞으로 다가갔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그 남성에게 왜 김치를 가져가냐고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지갑을 열어 눈에 보이는 대로 만 원권 몇 장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김치를 다시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이 돈으로 김치를 사서 드시라고 했다. 그는 입이 찢어지라 웃으며 김치를 버리고 할머니의 휠체어를 끌고 사라졌다.

집에 돌아와서 남편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그 돈으로 김치를 사서 줬어야지.”했다. 그들이 돈은 다른 데 쓰고 다시 돌아와서 쓰레기통의 김치를 가져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난 돈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저 세상이 그토록 각박하지 않다는 걸, 그래서 혼자만 외롭지 않아도 된다는 걸, 그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비록 그들의 공간을 둘러싼 철조망은 날카롭고 섬뜩하지만, 실은 모두가 다르지 않다고, 단지 서로가 너무 외롭거나 서로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가난은 행복을 밀어낸다. 어쩌면 제 가진 물질의 크기만큼 사람은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행복한 가난은 분명히 존재한다. 나만의 불행에 초점을 맞추고 내 안의 비명에만 집중하면 세상은 아비규환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그저 지옥의 한복판일 뿐이다. 그러나 세상엔 나 말고도 수많은 불행과 아픔이 생생하게 숨을 쉬는 곳이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그들을 만날 수 있다. 나는 그들이고 그들이 곧 나임을 자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쯤 덜 불행하고 조금쯤 더 행복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사랑일 수도 연민일 수도 또는 동정일 수도 있겠다. 아무렴 어떠랴. 손을 내밀 수만 있다면 그리고 서로 안 됐다며 어깨를 토닥일 수만 있다면 말이다.      


올 여름엔 술집 앞 테이블에서 그들이 조금 덜 웃고 조금 더 많이 웃을 수 있기를, 나는 비록 그곳을 떠나왔지만, 이제는 먼 곳에서 그들의 행복을 기원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상실에 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