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은 내 마음을 데리러 가는 길이다

3부: 내 마음을 아는 삶은 깊이가 있다

산책은 시간의 흐름에서 잠시 비껴서는 일,

계속 빨라지는 물살에서 잠시 벗어나 그저 발걸음만 옮긴다.

산책은 나를 향한 발걸음이다.

방향과 속도, 거리에서 자유로워진 발걸음은 어느새 자신에게 닿는다.


나를 속삭이는 밤, 김 민 지음, W미디어,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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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근무가 얼추 끝나자마자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손은 잔업인 편집과 송출을 위해 마우스를 잡고,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는데 몸이 자꾸 나가자고 한다. 잠시 일손을 놓고 굽 높은 신발을 조깅화로 갈아 신은 뒤 휴대전화와 이어폰을 챙겨 회사 바로 옆 공원으로 향한다.


공원 탑돌이를 할 때 대개의 사람들은 반시계 방향으로 돈다. 갑작스러운 화재에 단전이 되어 주변이 암흑천지일 때 대부분 왼쪽 방향으로 대피하더라는 인간의 본능과 뭔가 연관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자세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나도 그 물결에 편승한다.


댄스 버전의 트롯을 틀어놓고 봉 돌리는 아저씨의 움직임이 경쾌하다. 편 갈라 배드민턴 치는 사람들의 탄식과 환호성이 우렁차다.


“혹시 집이 이 근방이세요?”


매일 부딪히는 요구르트 아주머니의 질문에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미소를 짓는다.


유모차에 4마리 개를 긴 줄로 묶어놓고 산책 나오는 할머니와 자주 마주친다. 두 마리는 할머니와 같이 걷고, 두 마리는 유모차에 타고 있다. 타고 있어야 마땅할 것 같은 제일 어리고 제일 콩알만 한 녀석이, 제일 씩씩하게 걷는다. 오히려 큰 녀석 둘이 우아하게 탑승하고 있다. 조금 의아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녀석들은 성견을 지난 노견인 듯싶다. 기력 없는 이들에게는 바깥공기 쐬는 일조차 큰 결심이 필요한 법이니 이렇게라도 집 밖에 나오는 것으로 그 둘에게는 적잖은 활력이 될 것이다.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알리는 비가 한바탕 훑고 지나간 아침, 영문 모르고 공원 도로에 마실 나왔다가 무심한 발걸음에 밟혀 죽을까 앙상한 나뭇가지 들고 느릿느릿 지렁이들을 흙 쪽으로 긁어 던지는 할머니의 손길이 거칠지만 마음만은 따뜻하다.


운동화 발끝을 스치듯 가로지른 생쥐 한 마리에 눈 꿈쩍 한번 하지 않고 바삐 가던 길 재촉하는 어느 어머니의 내공이 놀랍다. 그보다 반 보 정도를 뒤따르던 나는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고 간이 ‘엄마야!’하고 푹 떨어졌는데.


풀숲을 헤치고 무언가를 찾기에 열심인 아주머니의 모습도 눈에 띈다. 옷 앞섶을 주머니 삼아 열매를 잔뜩 담은 모양새가 터질 듯 오물거리는 다람쥐 볼 같다. 길에 떨어진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덤불에 숨어있는 도토리나 밤은 그냥 놔두시는 게 어떨는지...


공원 가운데에서는 벤치에 앉아있는 한 아저씨가 이른 독서에 한창이다. 마스크만 쓰셨다면 더없이 완벽했을 가을의 멋들어진 풍경이다. 다른 쪽 벤치에는 누군가 축 늘어져있다. 고개를 푹 떨군 채 배 내밀고 앉아 있는 중년의 아저씨를 아침 일찍부터 그토록 힘 빠지고 무기력하게 만든 이유가 뭘까 가만히 헤아려 본다.


남을 살피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할 때면 내 마음의 소리도 들린다. 다정도 병이라 조심스레 타인에게 쏟은 애정이 섣부른 기대 탓에 상처로 남을 때는 그냥 놓아주라고 흘려보내라고 한다. 마음이 조금 더 넓은 사람이 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위로해 준다.


존재감 없는 사람들의 무기는 진정성이라고, 언젠가 멋지게 드러날 그 날을 위해 절차탁마를 멈추지 말라는 격려도 해준다. ‘웰다잉’이라는 인생의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 ‘웰빙’하라는 다정다감한 전략도 짜준다. 아이와 나섰다면 고난의 행군이었을, 혼자 나선 산책길이 얼마나 홀가분하냐며 농담도 건넨다.


마음을 곱게 접어 넣어 두어도 아쉬울 판에 발로 구겨 넣고 엉덩이로 밀어 넣어 억지로 봉인했던 이야기들도 흘러나온다. 동굴에서처럼 머릿속을 왕왕 울리기도 하고 심장에 와서 바로 아릿하게 꽂히기도 한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는데 들어주기 시작한다 싶으니 눈치만 보고 있다가 이제는 서로 먼저 나오겠다고 난리다. 사화산이 갑자기 활동을 재개한 것 같다. 처음 겪어본 소리 없는 아우성에 적잖이 당황해서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대고 낮게 속삭인다.


‘쉿, 얘들아 서로 밀지 말고 가만가만 줄 좀 서. 일렬로 차례차례. 하나도 남김없이 다 꺼내 줄게. 믿고 기다려봐. 대신 시간은 좀 걸린다.’


그동안 열심히 산다는 핑계로 미처 돌보지 못한 내 마음을 찾아 떠나는 여행, 마음을 데리러 가는 길. 마음 구석에서 오랫동안 웅크려 울고 있었던 나를 발견하기 시작한 게 불과 얼마 전이다. 더 일찍 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더 늦기 전이 아니라 아직은 안심이다. 내 마음과 진솔하게 이야기 나누는 귀한 시간을 이번에도 어김없이 애써 짬 내어 마련했다.


오늘도 마음이 내는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내 속에서 살금살금 조심스레 털어놓은 티끌 같은 단문들을 휴대전화 메모 앱에 닥닥 긁어모아 천천히 흔들리지 않을 만큼만 단단하게 꼬고 엮어야겠다.


‘오늘 하루도 허투루 살지는 않는구나.’


나는 매일 조금씩 점점 더 마음에 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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