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이 답

이어진 지음, 북오션

작고 사소한 일이지만 행복감을 느낄 때를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 소확행이라고 한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혼밥' 다음으로 최고의 신조어이자 이제는 일상용어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도 매일매일 즐기는 소확행이 몇 가지 있다.


1. 오레오


마트에 가면 오레오라는 과자가 있다. 진한 초코 비스킷 사이로 흰 크림이 박혀있어 우유와 함께 먹으면 저절로 광대가 승천하는. 나는 오리지널 흰 크림보다는 가운데마저 초코크림인 초코 오레오가 더 좋다. 마트에 가서 초코크림 오레오가 2+1인 걸 발견하면 그날은 요즘 말로 '득템 '하는 날, 옛날 말로 계 타는 날이다. 최근에는 레드벨벳 색과 카멜색 크림이 추가되었다. 크림의 종류는 비스킷 속 크림 색깔만큼 다양해졌지만 그래도 언제나 나의 선택은 초코크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초코크림만 쏙 빼고 흰 크림, 레드 크림, 카멜 크림이 죄다 있는 것이 아닌가? 은근히 섭섭했다. 다음부터는 마트에 가거나 편의점에 들르는 날엔 어김없이 과자 코너에 가서 오레오 초코크림이 있는지, 2+1 행사를 하고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얼른 사다가 찬장 선반에 쟁여놓는다. 사내 편의점도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참새가 방앗간 순찰하듯 지나치지 않는다.


아이는 희한하게도 두 개의 비스킷 사이에 크림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완전체를 굳이 반으로 갈라 가운데 초코 크림만 먹고 비스킷은 버린다. 모르고 거실을 걷다 밟을 수도 있기에 요즘은 초코크림만 한꺼번에 발라서 아이에게 먼저 준 뒤, 나머지 비스킷들을 모아놓고 천천히 음미한다. 책 읽을 때, 글 쓸 때, 입이 심심할 때 우유와 곁들이면 좋다.


아차, 방송에서는 특정 브랜드를 언급하면 안 된다. 오레오가 아니라 오 00이라고 해야 하나? 글이니까 오레오라고 밝혀도 되겠지? 나는 오레오와 상관없는 사람이다.


2. 믹스커피와 새벽일


매일 새벽 3시 20분쯤 일어나 집안 식구들이 깰까 까치발로 살금살금 부엌에 가서 커피포트를 안방과 화장실 사이에 작은 통로로 가져온다. 물 끓이는 소리가 새어 나갈까 조심조심 문을 최대한 소리 안 나게 닫고 휴대전화를 충전기에서 분리한 뒤 블루투스를 키보드와 연결한다. 아, 그전에 작은방에 있는 와이파이 켜는 걸 깜박했다. 나가기 위해 다시 안방 문을 열자 문 여는 여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고 거실에서 잠들어 있던 식구들이 살짝 뒤척인다. 작은방에 있던 와이파이 스위치를 켜고 안방으로 다시 돌아와 커피포트에 물이 끓기를 기다린다. 아침에는 반드시 모닝커피로 시작한다. 카페인이 들어가야 비로소 온몸 세포가 각성이 되는 것 같다.


특히 꼭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신다. 해외 출장 때도 예외는 아니어서 출장 가방에 가장 먼저 챙긴 것이 한 달 치의 믹스커피였다.


그리고는 방과 화장실 사이의 작은 통로에 앉은뱅이책상을 놓고 키보드를 조금 두드리며 글을 끄적댄다. 하지만 이내 주섬주섬 가방을 챙긴 뒤 양치질만 간단히 하고 집을 나선다. 새벽시간에는 회사에 아무도 없으니 글을 다듬거나 책을 읽거나 읽은 책을 리뷰하거나 라디오 녹음을 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고 아무도 없으니 당연히 집중도 잘 된다.


함께 사는 엄마는 왜 꼭두새벽부터 나가느냐고 회사에 너무 충성하는 거 아니냐고, 더 있다 가라고 어두컴컴한 새벽 출근길을 차로 달리는 딸을 걱정하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손인사를 한다.

"엄마 여기는 내 공간이 없어."


3. 알고 보니 몸이 원한 건 카페인과 달달함


언젠가 SBS 예능프로그램 '불타는 청춘'에서 이름이 비슷해서 친근한 오현경 씨가 나온 걸 본 적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버릇처럼 익숙하게 초코파이 하나를 통째로 얼른 입으로 집어넣는 데 옆에 누워있던 다른 출연자가 한마디 했다.

"먹지 마 당 생겨."

그런데 아랑곳 않고 응수한 오현경 씨 대답이 이랬다.

"먹어야 돼. 안 먹으면 당 떨어져."


내가 믹스커피를 좋아하는 이유도, 여행과 출장 때마다 가장 먼저 챙기는 이유도 아마 카페인과 당을 동시에 챙길 수 있어서 일 거다. 거기에 프림까지 들어가니 출출할 땐 든든한 한 끼 대용으로도 가능하다. 한때는 가루 프림이 몸에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다이어트도 할 겸 아침에 캡슐커피를 마신 적이 있었다. 믹스커피는 한 잔에 50kcal, 캡슐로 내려먹는 블랙커피는 겨우 5kcal. 간헐적 단식을 할 때도 차와 블랙커피는 0kcal로 쳐주기에 출출할 때 잠시 빈속을 달랠 수 있는 소중한 마실 거리다. 하지만 블랙커피로 갈아타니 잠은 깼지만 공복이라 위가 쓰렸다. 카페인만 섭취해서인지 베개만 닿으면 자는 내가 중간에 잠이 깨서 숙면을 취하지도 못했다.


결국 캡슐커피는 상온의 멸균우유를 타서 블랙 대신 카페오레로 마시고 거기에 믹스커피까지 더해져서 마시는 커피 양만 더 늘었다.


아침에 블랙 대신 카페오레를 마시면 속이 쓰리지 않은 대신 뱃속에서 꾸르륵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린다는 단점이 있다. 새벽 라디오 <이현경의 뮤직토피아>를 할 때마다 어찌나 민망하던지. 마이크를 타고 전국에 방송되는, 아니 외국에서도 들으시니 전 세계로 방송되는 꼬르륵 소리는 방송 다시 듣기에서도 여지없이 무한 재생되며 새삼 볼을 발그레하게 만든다.


4. 최근에 시작한 줌바


아이와의 예기치 않은 충돌로 인한 오른쪽 발톱 들림 사건, 따라서 혼자 무거운 몸을 감당하며 열심히 절뚝거리다 넘어진 왼쪽 발목의 접질림 여파로 힘든 두 어달을 보냈다. 어찌 보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된 침대 생활은 블루투스 키보드와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지만 줌바를 하지 못해 더 힘에 겨웠다.


머릿속에서는 이제 막 맛 들이기 시작한 라틴댄스 음악의 한 소절로 끊임없이 주크박스를 틀어대고 있는데 몸은 꼼짝을 못 하니 좀이 쑤셨다. 정형외과를 찾아간 첫날, 그리고 물리치료를 하러 다니면서도 의사에게 묻는 질문은 일관되게도 "언제 운동할 수 있어요?"였다.

"무슨 운동하시게요?"

자꾸만 물어보니 궁금했나 보다.

순간, '줌바'라고 답하기가 왜인지 모르게 쑥스러웠다.

잠깐의 멈칫 후 말했다. "그냥, 에어로빅 같은 거요."


'줌바'. 처음에는 '줌마'가 연상되기도 해서 아줌마들이 즐겨 추는 춤인 줄 알았다. 쉽고 재미있다는 얘기도 얼핏 들었다. 라틴댄스 기반인데 태동은 미국 캘리포니아라고 한다.


마침 사내 복지 차원에서 강습을 해 준다길래 점심시간에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갔다. 거울이 붙어 있는 작은 무용실에 예닐곱 명은 족히 되는 사람들이 이미 모여있었다. 운동화 끈을 매고 있는데 음악이 흘러나왔다. 50분 강습이었는데 시작하자마자 다들 땀을 삐질삐질 흘리더니 10분 후부터는 헉헉대기 시작했다.


'누가 쉽고 재미있다고 그런 거야?'

한참을 지난 것 같은데 시곗바늘은 20분을 넘기기 힘들었다. 난생처음 해 보는 동작에 다들 우왕좌왕하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왼쪽으로 가야 하는데 오른쪽으로 가는 사람, 팔과 다리가 따로 노는 사람, 허우적대고 버둥거리는 사람.......


좁은 공간에서 이산화탄소를 내뿜는 얼굴들이 벌겋게 불타올랐다. 틈틈이 마시던 물은 곧 동이 났고, 가지고 간 수건은 흠뻑 젖었다. 땀이 비 오듯 뚝뚝 떨어졌다. 급한 대로 축축한 수건을 목에 두르고 허둥지둥 줌바 선생의 동작을 좇아갔다. 격렬했던 음악은 템포가 느려지더니 마무리 운동으로 지친 영혼들을 안내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pt 서킷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줄 알았는데, 더 격하고 더 분주한 운동이 있었다니!'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줌바 수업은 화요일 퇴근 후와 수요일 점심시간, 일주일에 두 번이라고 한다. 조근이 일상이니 수요일 점심은 밥 약속 대신 '줌바'로 스케줄 표에 미리미리 적어 두었다.


그다음 주 수요일이었다. 줌바 공간이 한층 넓어졌다. 어떤 이는 이석증이 생겼다고 하고 어떤 이는 너무 힘들어서 몸살이 났다고 한다. '이석증과 줌바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기분 탓이겠지?'

참가자가 확 줄었다. 공간의 여백만큼 큰 함성과 기합소리로 50분을 채웠다. 줌바를 하면 할수록 느릿느릿 거북이걸음이었던 시곗바늘도 점점 속도를 냈다.


테트리스가 전국의 오락실을 강타하던 90년대 초반, 자리에 누우면 천장이 게임 화면이 됐다. 1자, ㄱ자, ㄴ자, ㅁ자, ㄹ자 블록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왔고 나는 머릿속으로 한 단 한 단 빈 공간을 열심히 채워 없애갔다. 당구에 미친 사람에게는 천장이 당구 보드가 된다지? 줌바에 맛 들인 사람은 내 귀에 줌바가 끊임없이 흐른다. 그러던 차에 스텝을 밟아야 할 양쪽 발이 다 못쓰게 됐으니 상심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드레싱과 체외충격파 치료를 겸하던 두 달이 1년처럼 느껴졌다.


자, 이제 줌바 다시 시작이다! 완치 판정은 받았으나 아직 뻣뻣한 왼쪽 발목에 발목보호대를 차고 설레는 가슴으로 줌바를 재개했다. 비가 온 날이었는데 수업 후 감은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고 급하게 서점에 갔다 왔더니 그만 감기에 걸렸다. 보통 약 바로 먹고 하루 푹 자면 똑 떨어지는 감기가 낫지 않고 들러붙었다. 목을 잠기게 하더니 코도 막히고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독한 약을 썼더니 하루 종일 자도 또 졸렸다. 조금 더 쉬어야 했다. 초보 줌바 댄서의 길을 험난하다.


지난주는 줌바 선생님에게 1:1 강습을 받았다. 컨디션 난조로 갈까 말까 망설였는데 나마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수업이 끝나고 둘은 신나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번 주는 감기 기운에 눈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책임감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다행히 한 명이 더 왔다. 수업이 끝나고 셋은 강강술래 대형으로 손에 손잡고 신나게 '줌바!'를 외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다음 주는 피할 수 없는 점심 약속이 있는데 어쩌지. 나 대신 누군가 꼭 출석해 주기를 바란다.


점심시간이라 참여도가 저조해서 그렇지, 저녁 수업은 제법 인기가 있다고 한다. 의외로 남성 사우들이 많아 성비를 압도하기도 한다.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줌바의 매력 포인트는 못해도 된다는 것이다. 재즈댄스, 방송댄스 등은 잘해야 재미를 느끼지만 줌바는 못해도 재미있다. 같이 틀리고 실수하며 킥킥거리는 재미.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푸념하며 가지고 온 물을 나눠 마시는 재미. 근엄하게 양복 입고 인사받던 아저씨 사우들의 헐레벌떡 당황한 모습을 엿보는 재미.


줌바의 매력 포인트는 또 있다. 살사, 메렝게, 차차 등 다양한 스텝을 수박 겉핥기식이지만 섭렵할 수 있다.

3박 자라 조금 헷갈리기도 하지만.


<퇴근이 답>, 이 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저자의 퇴근 후 취미활동에 살사 댄스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 책 서문에 소개했길래 반가운 마음이었다. 저자의 라틴댄스 경험을 듣고 싶었는데 본문에는 없는 걸 보니 책 출판 과정에서 통편집이 되지 않았을까 살짝 짐작해 본다.


5. 더 최근에 시작한 미술 동아리 활동


한 달 반 전에 시작한 따끈따끈한 취미 생활이다. 안식년을 앞둔 회사 선배의 권유로 가입했는데 격주라 한 층 부담이 없다. 지금은 정년퇴직 후 사우회에서 활동하고 계신 미술감독님이 창립하신 사내 동아리다. 몇몇 그림에 관심이 많은 사원들이 미술 각 분야의 숨은 사내 고수들을 초빙하여 기술을 전수받는 은밀한 모임이다. 비밀스럽다고 느낀 이유는 모이는 장소 때문인데, 회사 꼭대기 헬기 착륙장보다 한 층 위 창고에 자리 잡고 있다. 미술 동아리가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자그마한 아지트다.


처음 간 날은 마침 주 52시간 본격 시행으로 앞으로는 새벽 근무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통보를 받아 속이 시끄러운 날이었다. 8년 동안 몸에 익었던 패턴을 바꾼다고 생각하니 심란했다. 늦게 오는 엄마를 그리워하다 울음을 터뜨릴 아이 얼굴도 떠올랐다.


미술 동호회장은 빳빳하고 작은 종이를 주며 처음부터 끝까지 펜을 떼지 않고 아무 그림이나 그려보라고 했다. 그야말로 펜이 가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막막했지만 일단 펜을 움직이자 신기하게도 펜이 그 뒤부터는 알아서 움직였다. 가슴이 작게 떨리다가 마음에 맺힌 실타래도 절로 풀리는 듯했다.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진정되며 첫 작품(?)이 완성됐다. 초보자가 아닌 것 같다는 아마추어 상호 간의 칭찬이 이어졌다. 공치사였겠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2주 후에는 캐리커처 그리기를 할 건데, 1일 강사는 역시 퇴직하신 사우라고 했다. 가입 기념으로 심의 굵기가 각기 다른 펜 한 세트와 습작 노트를 받았다. 작년에 미술 동호회가 인사동에서 작은 전시회를 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계속해서 실력을 닦아나간다면 나도 언젠가 그 틈에 내 어설픈 그림 하나를 쓱 밀어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살짝 기대된다.


6. 퇴근만 답?


주저리주저리 개인의 일상에 비타민 같은 자질구레한 활동들을 먹고 마실 거리와 함께 소개했다. 일과 생활의 밸런스를 위해서는 퇴근이 답이다. 치열하게 일한 뒤 퇴근 후 즐기는 다양한 취미는 일과 생활을 부드럽고 활기차게 엮어준다. 책의 저자는 헬스, 크로스핏, 맨몸 운동, 달리기, 걷기, 산행, 수영, 프리다이빙, 독서, 영화 감상, 색소폰 연주, 자전거, 테니스 등의 다양한 활동을 소개하며 자연스럽게 소확행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특히 물속에서 숨을 참고 잠영하는 프리다이빙은 태곳적 엄마 뱃속을 연상시키는 신세계였다. 예전에 봤던 영화 '그랑블루'를 떠올리게도 했다.


그런데 과연 퇴근만이 정답일까?

주관식이라면 다른 답도 있다.

출근 전(운동)과 점심시간(줌바와 미술 동호회)을 잘 활용한다면 사내 동아리 활동도 근사한 답이다.



p.s. 책 서문에 언급했던 살사댄스가 막상 책 내용에는 없다고 투덜댔더니 저자가 개인 sns로 살사댄스 경험 글을 보내왔다. 읽으면서 미소가 번졌다. 고마워요.

저자들과의 소통은 언제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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