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사랑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술자리 안주로 으레 나이 듦을 올린다.
“야, 자고 일어나면 몸이 천근만근이야.”
“계단 내려갈 때 무릎에서 딱딱 소리가 나.”
우리는 노화라는 이름의 작고 반짝이는 장신구를 옷깃에 달듯, 그 고통을 가볍게 걸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잔을 부딪치며 건네는 그 앓는 소리들은 사실 지독히 역설적인 과시다. 고통조차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다는 여유, 그리고 내일이면 기어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오만한 확신이 그 밑바닥에 고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노화란 아직, 차가운 맥주 한 잔에 씻어 보낼 수 있는 달콤하고 가벼운 투정일 뿐이다.
그러나 생의 벼랑 끝에서 마주하는 진짜 노화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그것은 무용담 섞인 서글픔조차 허락하지 않는, 지독하게 선명하고 서늘한 현실이다.
어느 아침, 내 몸이 나의 명령을 거부하는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 그때 비로소 노화는 시작된다.
약 몇 알로 달래지던 신호들이 매 순간 생의 유효기간을 알리는 경보음으로 변하는 지점.
살아온 날들의 화려한 풍경 뒤로 남은 날들의 희미한 그림자가 터무니없이 짧아졌음을 온몸으로 직감하는 비참함이다.
내 생각에, 그 현실이 가장 잔인하게 증명되는 장소는 대학병원이다.
이곳은 단순히 치유를 구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이들을 묵묵히 걸러내는 무정한 요새다.
천장이 높은 로비는 기계적인 소음으로 가득하고, 사람들은 오직 푸른 스마트폰 액정만을 응시하며 유령처럼 바쁘게 움직인다.
젊은 나조차 미로처럼 헤매야 하는 동선. 키오스크가 뱉어내는 무미건조한 번호표들.
1950년대생 우리 엄마에게 이 매끈한 디지털의 성벽은 당신의 시대가 완전히 저물었음을 선포하는 가혹한 벽이다.
전쟁의 잔해 속에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손마디가 굵어지도록 생을 다 바쳤건만, 정작 생의 마지막 관문과도 같은 병원에서 엄마는 길 잃은 아이처럼 서 계실 뿐이다.
세상은 더 이상 당신의 헌신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직 시스템을 이해하는 능력만을 다그치며, 그 능력이 없는 자들을 무력함의 늪으로 밀어낼 뿐이다.
나는 능숙하게 QR코드를 찍고 키오스크 버튼을 연타하며 엄마의 손을 이끈다.
“엄마, 요즘은 다 이래. 그냥 나만 따라와.”
내 목소리엔 은근한 자신감이 배어난다. 기계가 뱉어내는 언어를 엄마보다 더 유창하게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 손에 묘한 권력감을 쥐여주었다.
밤새 물류센터에서 몸을 갈아 넣어 일하고 온 피로조차, 이만큼 힘들어도 자식 도리를 한다는 자위의 근거가 되었다. 그 피로를 훈장처럼 앞세우며, 나는 스스로를 꽤 괜찮은 보호자라고 믿는 오만을 부렸다.
하지만 나의 그 알량한 자부심은 엄마의 나지막한 한마디에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미안해. 엄마가 좀 더 똑똑해서 혼자 올 줄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가 건강관리 잘해서 안 아팠으면 네가 밤새 일하고 이런 고생 안 해도 됐는데….”
엄마에게 아픔은 자신의 몸에 배긴 통증이 아니라 자식에게 짓는 죄였다.
좋은 형편에 태어나 교육을 받고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는 엄마였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지 못해 자식의 잠을 뺏고 시간을 뺏는 당신의 존재 자체가 미안함의 근원이었다.
예약 시간이 한참 지나 진료가 지체될수록, 엄마의 눈은 당신의 부서지는 무릎이 아니라 초췌한 내 얼굴을 훑는다.
아픈 건 엄마인데, 정작 엄마는 내 퀭한 눈가에 서린 피로를 닦아내지 못해 안달이 난다.
당신의 생을 온통 깎아 먹으며 자라난 자식에게, 이제는 줄 것이 남지 않았음을 미안해하는 비논리적인 헌신.
나는 키오스크를 조작하고 병원 접수와 수납은 기계로 할 줄 알았지만, 정작 당신의 생을 깎아 만든 시간으로 나를 길러낸 엄마의 마음은 단 한 줄도 읽지 못했다.
내가 피로를 핑계로 효도를 정산하며 보호자 유세를 떨던 그 시간에도, 엄마는 여전히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나를 당신의 전부로 품고 있는 진짜 보호자였다.
생각해 보면 나는 단 한 번도 아파서 병원에 갈 때, 엄마에게 미안해하며 병원을 따라나선 적이 없다.
엄마의 등에 업혀 응급실로 달려가던 밤, 내 구토물을 맨손으로 받아내던 엄마의 손길을 나는 마치 당연한 권리처럼 삼켜왔다.
자식의 사랑은 이토록 철저히 인과적이며, 그만큼 오만하다. 명절 인사, 용돈, 여행. 효도라는 이름의 행위들은 마치 정석과 기술이 있는 것처럼 매끄럽다.
나는 그 기술들을 습득하며, 나름의 도리를 다하고 있다는 합리적인 정산에 몰두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자식을 위해 나를 완벽히 지워버리는 부모의 사랑은 결코 공부로 세상의 속도를 부모보다 잘 따라잡았다 해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나는 오늘 대학병원의 차가운 복도에서 내가 찼던 보호자라는 오만의 완장을 내려놓는다. 나는 결코 보호자가 될 수 없다. 그저 죽을 때까지 다 갚지 못할 거대한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영원한 피보호자일 뿐이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부모님보다 더 똑똑해졌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부모님의 마음이라는 심연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그 깊이 앞에 겸허히 고개를 숙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나는 이제 다음 진료 예약표를 챙기며 엄마에게 나만 따라오라는 말 대신, 당신의 굵어진 손마디를 가만히 쥐어보는 법부터 시작하려 한다.
내가 닿을 수 없는 거대한 마음의 그늘 아래, 나는 그저 고마운 빚쟁이로 머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