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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걸 하고 싶은 대로

알배추 스테이크, 면두부 냉이무침, 고수 무침

by 퉁퉁코딩

대학생들 앞에 서면 언제나 긴장된다.

약간은 쑥스럽기도 하다.

내가 뭔가를 가르칠 위치인가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학생들의 눈빛을 보면 마음이 더 복잡해진다.

"저분은 뭐 하는 분이지?"

"연봉은 얼마나 받을까?"

"아, 제발 빨리 끝내고 밥이나 먹으러 갔으면..."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이 뒤섞인 눈빛들이다.


대학교 특강을 처음 나간 건 모교 교수님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어느덧 스무 번 가까이 이어졌다.

하다 보니 대학생들이 참여하는 해커톤에서 문제를 출제하거나 심사하는 역할도 맡게 되었다.

해커톤은 '해킹'과 '마라톤'의 합성어다.

예전에는 밤새 체력과 코드를 갈아 넣는 개발자들의 무대였다.

요즘은 다양한 분위기의 헤커톤이 많아졌다.

기획, 디자인, 그리고 발표를 잘하는 친구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팀을 이루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한 대학에서 열리는 해커톤에 3년 연속 키노트 발표자로 초청받은 적이 있다.

한 번은 내가 준비한 발표 제목이 조금 특이했다.

<끈기 없이 살아가기>

한 우물을 파 전문가가 되는 삶도 멋지지만, 관심 가는 대로 방향을 바꿔가며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후자에 가까운 편이었다.

그래서 그 발표에선 '끈기 없이 살아온 사람들'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발표의 첫 슬라이드는 이렇게 시작됐다.

지금부터 제 주변에 끈기 없는 사람들을 소개해볼게요.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맞혀보세요.

고맙게도 학생들은 열심히 손을 들고 답을 해주었다.

아마 준비해 간 상품권과 영화 티켓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나온 답변들을 기억나는 대로 정리해 보면 이렇다.


[드라이버를 들고 과학상자를 조립하던 초등학생]

테슬라 엔지니어

장난감 제작자

건축가

로봇 공학자

[알고리즘과 자료구조를 열심히 공부하던 중학생]

해커

프리랜서 개발자

게임 개발자

코딩 강사

치킨집 사장

※ 개발자는 수명이 짧아 결국 치킨집을 차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대학에서 금융공학 전공, 경제학 부전공]

전업 투자자

알고리즘 트레이더

유료 클래스 운영자

칼럼니스트

금융 사기꾼(?)

[암호화폐 관련 연구로 경영정보학 석사 취득]

스타트업 대표

유튜버

부자

스님

※ 큰돈을 벌었거나, 다 잃고 무소유의 길로 들어섰거나...


이제 답을 공개할 시간이다.

내가 준비해 온 네 명의 인물.

그리고 학생들이 상상한,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

그런데 사실, 그 모든 사람은 한 사람이다.

바로, 끈기라고는 1g도 찾아볼 수 없는 '나' 자신이다.


참고로, 나는 부자가 아니다.

대학원 시절부터 코인에 투자했더라면, 어쩌면 지금쯤 꽤 큰돈을 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시드머니도 없었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싶다.

금융 사기꾼은 더욱더 아니다.



나는 관심이 생기면 뛰어들고, 질리면 돌아서기도 했다.

전공과 진로가 꽤 자주 바뀌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지금은 유튜브에서 '퉁퉁코딩'이라는 이름으로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브런치에도 같은 이름으로 글을 쓰며 '개발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조금은 달라졌다.

현재 나는 직접 코드를 짜고 있지 않다.

약 5년간 개발자로 일했고, 지금은 개발보다는 서비스 기획을 맡는 PM(Product Manager)에 더 가깝다.

그래도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남아 있다.

현업 개발자들과의 소통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퉁퉁코딩이라는 이름은 개발자로 일하던 시절 아내와 함께 고민해서 만든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이 들었고, 굳이 바꿔야 할 이유도 없어서 지금까지 그대로 쓰고 있다.

이럴 땐 또, 괜히 끈기가 있다.


그리고 요즘 브런치에 연재 중인 글 중 하나는 요리 이야기다.

줄줄이 나열되는 키워드들.

요리, 개발자, 기획자, 기계과학, 금융공학, 암호화폐.

연관성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전공이나 직군을 바꿀 때마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그동안 공부한 게 아깝지 않아?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느껴본 적이 없다.

특히 기획자로 직무를 변경할 당시에는 개발자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연봉도 눈에 띄게 오르던 시기였다.

누군가는 '지금 바꾸면 손해'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돌아보니, 내가 무슨 대단한 업적을 쌓아 회사의 주가를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만둔다고 사라질 만큼 가볍게 해온 것도 아니었다.

내 생각은 이쪽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하고 싶은 걸 못 하고 살아가는 시간,
그게 진짜 아까운 거 아닐까?



요즘처럼 팍팍한 세상에서, 나는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진짜 좋아하는 게 없는 사람은 없다.

그저 관심의 크기나 깊이가 조금 다를 뿐이다.

그걸 꼭 전문가만큼 잘해야 하거나, 직업으로 삼을 만큼 대단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냥 좋아하면 되는 거다.

그 자체로 충분하다.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인정해야, 그것에 쓰는 시간도 아깝지 않게 느껴진다.


나는 종이접기를 좋아하고, 현금과 주식 배당금도 좋아한다.

요리, 서재, 보드게임, 라면, 레알 마드리드, 키보드, 코끼리, 그리스로마신화, 멘토링, 파워포인트, 산책, 회, 영화 <옥토버 스카이>도 좋아한다.

이 중 어느 것도 내 전공이나 직업이 된 적은 없다.

그래도 좋아했기에, 꽤 많은 시간을 기꺼이 들였고 자연스레 애정도 깊어졌다.


전공이나 직군을 바꿨을 때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엄청난 의욕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충분히 좋아했고, 시간을 들였다.

다만 그저 하다 보니 조금 더 강한 끌림이 생겼을 뿐이다.


정확히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크게 고민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냥 하고 싶어서 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려 한다.



오늘 만든 요리도 그랬다.

정해진 레시피 없이, 그냥 해보고 싶은 대로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오늘의 요리는 내 삶을 참 많이 닮아 있었다.


첫 번째 요리의 주재료는 알배추다.

레시피 없이 손 가는 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됐다.

그냥 알배추 스테이크라고 부르기로 했다.

먼저 편으로 썬 마늘, 어슷 썬 대파의 흰 부분, 잘게 썬 햄, 약간의 페퍼론치노를 준비한다.

이 재료들을 올리브 오일에 넣고, 약불에 기름 향이 올라올 때까지 천천히 볶는다.

천천히, 오래 볶아야 향이 잘 밴다.


그다음은 알배추를 1/4 크기로 썬 뒤, 물에 잘 씻고 채에 밭쳐 물기를 최대한 뺀다.

볶아둔 기름에 알배추를 넣고 뒤집어가며 모든 면을 부드럽게 익힌다.

이때 너무 세게 다루면 배추 모양이 흐트러지므로 조심한다.

간은 소금과 후추로 간단하게만 한다.


그 위에 볶아둔 재료들을 잘 올리고, 모짜렐라 치즈를 살짝만 뿌린다.

이제 팬에 뚜껑을 덮고, 약불로 10분간 익혀준다.

치즈가 녹고, 알배추가 찌듯이 부드럽게 익는다.

접시에 조심스럽게 옮겨 담고, 파슬리 가루를 톡톡 뿌려주면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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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요리는 면두부 냉이무침이다.

냉이는 할머니가 보내주셨다.

받자마자 감사한 마음으로 냉동실에 모셔두었다.

그 냉이를 요리 몇 시간 전, 냉장실로 옮겨 해동했다.


해동된 냉이를 끓는 물에 약 1분 정도 데치고 찬물로 식힌다.

물기를 꾹 짠 뒤 먹기 좋게 잘라 준비한다.

면두부는 30초 정도만 데친다.

두 재료를 한 그릇에 담고, 소금, 간장, 참기름, 통깨를 넣어 조물조물 무친다.

면두부는 잘 찢어지므로 조심조심 무친다.

냉이 자체가 좋은 향을 가지고 있어 양념은 간단한 편이 낫다.

맛을 보며 간을 맞춰주면, 향긋한 냉이 향이 부엌을 감싼다.

면두부의 오묘한 색감은 매력을 더한다.


그림2.jpg


세 번째 요리는 고수무침이다.

고수는 호불호가 극명하다.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열렬히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마주치기만 해도 고개를 돌린다.

나는 다행히 전자 쪽이지만, 아내는 단호한 후자다.
그래서 이 요리는 오직 나만을 위한 한 접시다.
후기도 받을 수 없다.

깨끗이 씻은 고수의 물기를 빼고 먹기 좋게 썬다.

간장, 고춧가루, 설탕, 간 통깨, 레몬즙을 넣고 조물조물 가볍게 무친다.

향긋하고 상큼하면서도 매콤 강렬한 접시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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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차려놓자, 아내가 요리들을 바라보며 설렌 눈빛으로 묻는다.

"이거 뭐야?"

나는 무심한 듯 대답했다.

"그냥 내 맘대로 만든 거야. 맛이 있을지는 모르겠고, 일단 먹어봐."

기대치를 낮춰야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오늘도 그 전략은 유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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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고수무침을 제외한 두 요리를 정말 기뻐하며, 아주 맛있게 먹었다.

선물 받은 트러플 소스가 있어 함께 곁들여보았는데, 알배추 스테이크와 너무 잘 어울렸다.

아내는 한입 먹고 이렇게 말했다.

"이거 트러플 소스 얹으니까 파인다이닝 요리 같은데?"

요리들은 생각보다 맛있었고, 와인이 있었다면 살짝 곁들여도 괜찮았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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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대로, 그저 좋아하는 것들을 하다 보면 뜻하지 않은 기쁨이 찾아올 때도 있다.


보드게임을 좋아한다.
아내의 친구 커플과 만났을 때 보드게임 카페로 향했다.
엄선한 게임들 덕분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종이접기를 좋아한다.
크리스마스 시즌, 아내가 잠든 밤 조용히 산타 모자를 접어 거실 인형들 머리에 씌워뒀다.
다음 날 아내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엽다며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스로마신화를 좋아한다.
신혼여행 중 마드리드의 미술관에 갔을 때 익숙한 그림 앞에서 가이드처럼 이야기를 곁들였다.
관람이 훨씬 깊어졌다.


산책을 좋아한다.
여행을 가면 자연스레 공원으로 발길이 향한다.
함께 걷는 길 위에서 형형색색의 꽃도, 귀여운 동물 친구들도 자주 마주친다.


라면을 좋아한다.
물의 양, 면 익힘, 라면별 어울리는 조합까지 자신 있다.
재료가 없어도 갑자기 배고픈 아내를 위해 언제든 맛있는 라면을 끓일 수 있다.


그리고 요리를 좋아한다.
오늘처럼 아무 계획 없이 있는 재료로 만든 음식조차 아내와 함께 꽤나 맛있게 즐길 수 있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아내와의 추억이 하나씩 얹히면, 그 기쁨은 늘 배가 된다.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 가장 좋아하는 건 아내인가 보다.


아... 물론 아내가 아무리 좋아도, 결혼 생활이 늘 하고 싶은 대로만 되는 건 아니다.

본인의 개성만 내세우면 안 된다.

오늘 후기를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강렬한 향 때문에 식사 도중 식탁 한쪽 구석으로 쫓겨나야 했던 고수 무침처럼 말이다.


아내의 후기

알배추 스테이크
★4.8점
한 입 먹고 익숙한 맛이 나서 속으로 '뭐지? 뭐지?' 했는데, 딱 떠올랐습니다.
알리오 올리오!
알리오 올리오 베이스에 파스타 면 대신 배추가 들어가 색다른 느낌이 났어요.
부드러운 배추에 고소한 오일, 그리고 치즈까지 더해져 담백하면서도 정말 맛있었습니다.

면두부 냉이무침
★4.0점
면두부에 냉이무침을 곁들이니 씹는 맛이 훨씬 풍부해졌어요.
건강식으로도 아주 좋고, 마치 퓨전 한식을 먹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고수무침
...


P.S.

아내와 밥 먹는 이야기를 글로 쓰고 있다고 하니, 장모님께서 무척 궁금해하셨다.

링크를 보내드렸고, 그날 저녁 장모님은 연재된 글들을 단숨에 읽으셨다.

그리고는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다"며 응원의 마음을 담아 선물을 해주시겠다고 했다.

혹시 플레이팅에 필요한 식기가 있다면 말해 달라고 하셨다.
오늘 사용한 접시들은 그렇게 장모님께서 새로 사주신 것들이다.

오늘의 밥상에는 장모님의 따뜻한 응원과 사랑까지 함께 담겨 있다.

장모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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