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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빼는 건 힘들다

소보로덮밥

by 퉁퉁코딩

올해 초, 아내와 부산으로 1박 2일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즐거움은 도착도 하기 전에 시작됐다.

여행 며칠 전,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기차 타고 부산에 다녀올 거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기차에서는 계란이랑 사이다 먹어야지~" 하고 웃으셨다.

나는 요즘 기차에는 그런 거 안 판다고, 이제는 계란 까먹는 사람도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듣던 아내는 어리둥절한 눈빛이었다.

"계란이랑 사이다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20대인 아내에겐, 80년대 기차의 풍경은 그저 영화 속 장면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아내에게 설명했다.

예전엔 기차 안에서 카트를 끌고 다니며 간식을 팔았고, 단골 메뉴는 삶은 계란과 유리병 사이다였다고.

창밖 풍경을 보며 계란을 까고, 목 막힐 때 사이다 한 모금 마시는 그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고.


사실 나도 직접 겪어본 건 아니다.

그저 전해 들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데 아내는 갑자기 뭔가 마음을 굳힌 눈치였다.

우리도 해보자.
나도 기차에서 계란이랑 사이다 먹어볼래!


문제는, 우리가 탈 KTX에는 더 이상 그런 낭만이 없다는 거다.

카트는 사라졌고, 대신 콘센트와 와이파이가 등장했다.

요즘은 사이다보다 휴대폰 충전이 주는 갈증 해소가 더 중요한 시대다.

게다가 편의점에서 파는 계란은 안 된단다.

무조건, 내가 직접 정성을 담아 삶아줘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여행 당일 아침 나는 조금 일찍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계란을 삶고, 사이다를 챙기고, 소금까지 곁들였다.

괜히 소풍 도시락 싸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아침 아내와 나는 기차 좌석에 나란히 앉아 계란을 까먹었다.

반숙란은 아주 적절히 촉촉했고, 사이다는 기차 소리보다 먼저 목을 시원하게 통과했다.

아내는 정말 무척이나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자주 경험하고 싶은 기분이었나 보다.

얼마 전 대전에 갈 일이 생겼을 때도, 아내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계란, 준비할 거지?"

이제 우리 부부의 기차 여행엔 반드시 삶은 계란이 함께 탑승해야 할 것 같다.



또 다른 추억 하나는 바로 '티 클래스'였다.

이번 부산 여행은 우리 부부의 두 번째 방문이었다.

첫 번째 여행 때, 뭔가 색다른 걸 해보자며 검색하다가 전통 찻집에서 진행하는 티 클래스를 발견했다.

와인 클래스야 익숙했지만 티 클래스는 처음이었다.


왠지 어깨가 펴지고, 호흡이 느려질 것 같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시면 여행 중간에 재충전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설레는 마음으로 신청했지만, 아쉽게도 강사님의 개인 사정으로 수업은 취소됐다.


그 아쉬움을 담아 두 번째 여행에서 다시 신청했고, 이번에는 드디어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날 클래스 신청자는 우리 부부뿐이었다.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오붓하고 느긋한 사교육이 시작되었다.

이날은 '개완'이라는 도구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다.

뚜껑, 몸통, 받침으로 구성된 도구인데 각각 하늘, 사람, 땅을 의미한다고 한다.

차를 마시려면 우주 삼라만상을 이해해야 하나보다.


거기까진 무리였어도 우리는 짧은 시간에 꽤 많은 걸 배웠다.

차의 종류, 물을 따르는 법, 우리는 시간, 우려낸 차를 따르는 순서, 마신 뒤 정리하는 법까지.


나는 이 티 클래스가 심신을 다스리고 정신을 고요하게 만드는 체험일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찻잔을 들고 차를 따르는 순간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개완은 무거운 도구가 아니다.

그런데 내 팔은 마치 아령이라도 든 듯 뻐근했다.

그 모습을 본 강사님께서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다도는 결국, 힘을 빼는 걸 배우는 과정이에요."


그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최대한 편안하게 힘을 쭉 빼보려 애썼다.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잠깐만 방심해도 다시 손끝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어쩌면, 힘을 빼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다.



요리는 내 취미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누군가에게 대접하는 건 내가 가진 사랑의 가장 맛있는 표현 방식이다.

하지만 이 사랑도 매번 온 힘을 쏟아부어 만들 수는 없다.

몇 시간씩 육수를 우려야 하는 요리.

여러 재료를 씻고, 자르고, 데치고, 볶고, 찌는 요리.

물론 다 좋다.

하지만 매번 그러기엔 나는 물론 우리 집 냄비도 지친다.


특히 급하게 식사를 준비해야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갑자기 외출 중이던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 옥타브 높았고, 배고픔이 빠르게 전달되었다.

나 15분 안에 도착해!
너무너무 배고파!

주어진 시간은 단 15분.

갑작스레 대결 상대는 없지만 나만의 '냉장고를 부탁해'가 시작됐다.

가장 중요한 건 제한 시간을 준수하는 것이다.

그러니 힘을 주는 요리 말고, 힘을 뺀 요리가 필요했다.


그렇게 떠오른 메뉴는 바로 소보로덮밥이다.

'소보로' 하면 대부분 소보로빵을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일본어로 '부슬부슬하고 알갱이진 상태'를 뜻한다.

소보로덮밥은 잘게 다진 재료들을 밥 위에 가지런히 올려 먹는 덮밥 요리다.

일본에서는 편의점 도시락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메뉴다.


가장 기본이 되는 재료는 계란과 다진 고기다.

이 두 가지만 있어도 훌륭하지만, 취향껏 다른 재료를 얹어도 좋다.


먼저 재료를 준비한다.

작은 계란 여섯 알을 깼다.

그중 두 알은 노른자만 따로 빼두었다.

오늘 요리의 비주얼을 책임질 녀석이다.

나머지 네 알은 소금과 후추를 살짝 뿌려 고루 풀어준다.

다진 돼지고기에는 간장, 소금, 설탕, 후추, 다진 마늘, 참기름, 굴소스를 넣어 조물조물 섞는다.

불고기 양념과 비슷하다.

쪽파는 송송 썰어두고, 김치는 잘게 다진 뒤 설탕만 살짝 더한다.

금세 재료 준비가 끝났다.


이제 볶을 차례다.

계란, 고기, 김치 순으로 볶으면 팬 하나로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번엔 빠른 완성이 목표이니 팬 두 개를 동시에 가열하고 기름을 두른다.

한쪽 팬엔 김치를 넣고, 수분을 날린다는 느낌으로 약불에서 볶는다.

다른 팬에는 계란을 넣고, 알갱이를 계속 부수듯 익혀준다.

일종의 소보로식 스크램블이다.

계란이 다 익으면 따로 덜어두고, 같은 팬에 그대로 다진 고기를 넣는다.

어차피 결국 섞일 재료들이니, 팬 하나로 충분하다.

고기는 노릇노릇해질 때까지 잘 저어가며 볶아준다.


이제 모든 재료가 준비되었으니, 밥 위에 얹기만 하면 된다.

기본은 3색 소보로덮밥이다.

밥 위에 계란과 고기를 반반씩 올리고, 그 사이에 쪽파를 얹는다.

중앙에는 계란 노른자를 살포시 올리고, 깨까지 톡톡 뿌려주면 아내를 위한 한 그릇이 완성된다.


나는 좀 더 매콤한 버전을 선호한다.

그래서 김치를 더해 4색 소보로동으로 준비했다.

네 가지 재료를 밥 위에 사등분해 올리고, 중앙에는 역시 계란 노른자 한 점과 깨소금이다.

이렇게 15분 안에 근사한 한 끼를 완성했다.

조금 힘은 뺐지만, 꽤 마음을 담은 시간이었다.


집에 도착한 아내는

"와, 금방 이렇게 준비한 거야?"

하며 기분 좋은 칭찬을 날려준다.

바로 계란 노른자를 터뜨리고, 밥과 재료들을 골고루 비벼 먹기 시작한다.

한 입, 두 입 너무 맛있게, 정말 잘 먹는다.

김에 싸 먹어도 또 별미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요리든, 오늘처럼 힘을 빼고 빠르게 만든 요리든, 아내는 늘 맛있게 먹어준다.

특히 오늘 요리는 색감이 예뻐서 눈으로 먼저 한번, 입으로 다시 한번 감동을 주는 메뉴였다.

요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한 끼 차려보고 싶다면 이 소보로덮밥을 추천하고 싶다.



오늘의 요리처럼, 원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힘을 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에겐 그게 잘 안 되는 일이 하나 있다.

나는 컴퓨터로 무언가 작업을 할 때, 특히 집중을 하기 시작하면 손목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코딩을 시작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던 시간만 따져도, 아마 침대에서 잤던 시간 다음으로 많지 않을까 싶다.

나는 집중하면 키보드를 강하게 치는 편이고, 마우스도 꽤 거칠게 다룬다.

온몸의 집중력이 손목을 타고 흘러 손끝으로 폭발하는 느낌이다.


특히 가장 격렬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던 시기는 고등학교 때였다.

풀리지 않는 알고리즘 문제를 만나면 랩탑을 들고 다니며 밤을 새워서라도 끝장을 봤다.


그렇게 20년 넘게 손목을 혹사했으니, 정상인 게 오히려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주기적으로 몇 달에 한 번씩 손목에 묘한 통증이 찾아온다.

어쩔 땐 숟가락을 드는 것조차 아릴 때가 있다.


개발도, 기획도, 업무 메일도, 글을 쓰는 이 시간조차도 결국 모두 키보드 위에서 완성된다.

익숙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언젠가는 힘이 빠질 줄 알았다.

아직 나는 이 모든 일들의 '고수'는 아닌가 보다.



이런 나를 위해, 아내가 유일하게 직접 관여한 가전이 하나 있다.

우리 집 가전은 모두 내가 골라 구매했다.

아내는 모든 권한을 내게 맡겼고, 내가 알아서 잘 고를 거라며 그저 웃어주었다.

TV를 팔던 동료, 세탁기를 만드는 친구, 1년 먼저 혼수가전을 마련했던 회사 동기까지.

묻고 또 물으며 비교했다.

그렇게 우리는 제법 만족스러운 혼수가전을 갖췄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아내가 단 하나 양보하지 않은 게 있었다.

바로 냉장고 문에 달린 터치 오픈 기능이다.

센서에 손만 대면 '띠링~'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옵션이었다.

오빠 손목 안 좋잖아.
이건 무조건 넣자.

냉장고 문 여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하냐며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아내는 단호했다.

그 마음이 고마워 결국 그 기능이 들어간 모델을 골랐다.


얼마 전에는 장모님께서 선물을 준비하셨다고 했다.

아내는 귀띔했다.

"이번 선물 진짜 오빠 마음에 들 거야."

기대 반, 설렘 반.

그리고 마주한 선물은 전동 그라인더였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소금, 후추, 깨를 손목에 무리 없이 갈아주는 도구였다.


그렇게 메뉴판 없는 식당 주방에는 힘을 빼지 못하는 내 손목을 걱정해 주는 마음이 하나둘 쌓였다.

요리 재료를 꺼내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소금 간을 하며 그라인더 버튼을 누를 때마다 나는 그 마음을 느낀다.


내일은 요리에 힘을 좀 더 줘볼까?

아니면 오늘처럼 가볍게 만들어볼까?

고민은 늘 있지만, 이제는 그런 일상의 고민조차 누군가의 다정한 마음을 받으며 살아간다.


아내의 후기

소보로동
★4.7점
멋과 맛을 모두 잡은 요리였어요!
신랑이 사진 잘 나오는 요리를 만들었다길래, 솔직히 맛은 큰 기대 안 했는데...
웬걸요, 너무 맛있었어요!
특히 계란 노른자에 재료들을 슥슥 비벼 먹으니 부드럽게 꿀떡꿀떡 넘어가더라고요.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P.S.

요즘 들어 다시 손목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앞으로 일주일간은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조금 이른 여름휴가를 다녀오려 한다.

다음 주에 올라갈 두 편의 글을 미리 써두느라 이번 주는 꽤 분주했다.

여행지는 코타키나발루다.

이 글이 업로드될 때면 나는 여행의 마지막 날, 반딧불 투어를 앞두고 있을 것이다.

힘 빼고, 천천히 잘 쉬다 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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