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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대신 우리 집

애플망고빙수, 파인애플빙수, 프렌치토스트

by 퉁퉁코딩

아내와 함께 마트에 가면 꼭 둘러보는 구역들이 있다.

먼저 라면 코너다.

사야 해서 가는 건 아니다.

그냥 본능적으로 가야 할 것 같다.

사람마다 고요히 마음이 동하는 구석이 있다면, 내겐 그곳이 라면 진열대 앞이다.

전시회 관람하듯 신제품들을 유심히 살핀다.

요즘 어떤 회사가 어떤 라면을 밀고 있는지 눈여겨본다.

라면계 트렌드를 주시하는 큐레이터로서의 책임감으로 말이다.


라면을 좋아하다 보니 그 애정이 학문적 깊이로 번졌던 적도 있다.

대학교 마케팅 수업에서 자유 주제 기말 과제가 주어졌을 때, 나는 주저 없이 라면을 택했다.

그 당시는 불닭볶음면이 막 세상에 등장했을 무렵이었다.

그 불같은 매운맛이 사람들의 입과 마음을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사로잡고 있던 때였다.

당시 나는 불닭볶음면을 짜장라면과 섞어 끓이기도 했고, 치즈라면과의 궁합도 실험해 봤다.

물론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라면 애호가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미 수많은 불닭 조합 레시피들이 공유되고 있었다.


그 흐름 속에서, 소비자(consumer)이면서 동시에 생산자(producer)인 프로슈머(prosumer)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나는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불닭볶음면의 파생 레시피는 이제 하나의 소비자 문화다.

기업은 이 흐름을 읽고, 짜장불닭, 치즈불닭, 마요불닭 등 파생 상품을 확장 출시해야 한다."

보고서는 만점을 받았고 여러 후배들에게 족보처럼 전해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짜장불닭이 나왔다.

치즈불닭도 나왔다.

까르보불닭, 핵불닭까지 줄줄이 쏟아졌다.

지금은 불닭소스만 따로 팔리고 그 소스로 또 다른 레시피들이 줄줄이 탄생하고 있다.


나는 라면 코너를 거닐며 왜 보고서만 쓰고 삼양 주식은 한주도 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삼양의 주가는 끝을 모른 채 계속 오르고 있다.

참고로 내 전공은 마케팅이 아닌 금융공학이다.



꼭 둘러보는 또 하나의 코너는 과일 코너다.

이곳은 오로지, 아내를 위한 순례지다.

아내는 과일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사랑에 더 가깝다.

과일 코너에 들어서기만 해도 아내의 눈빛이 반짝인다.

잘 씻은 샤인머스캣보다 더 반짝인다.

수박, 참외, 멜론, 키위, 복숭아, 무화과!!

수분 많고 달콤한 과일은 무조건 합격이다.


아내는 과일향을 맡으면 설렌다고 한다.

반면 나는 그 옆에서 슬쩍 코를 킁킁대며, '이거... 파리 안 꼬이려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아내는 말한다.

"상큼하고 달달한 과일을 먹어줘야 힘이 나."

"몸에 생기와 활력이 돈다니까?"

"비타민도 챙기고, 기분도 상쾌해지고!"

아내에게 과일은 활력이고, 생기고, 힐링이고, 기분전환이고, 간식이고, 심지어 식사다.

아내는 밥 대신 과일로 한 끼를 완벽히 즐길 수 있다.

가끔 보면 하루 세끼 과일로도 충분히 행복해할 것 같다.


하지만 그 사랑에도 가끔 벽은 있다.

아내가 손에 들고 있던 과일을 조용히 내려놓을 때, 나는 옆에서 묻는다.

"왜? 지금 비싼 거야?"

나는 야채, 고기, 계란 가격에는 예민하지만 과일 시세에 대해서는 문외한 수준이다.

내 머릿속에는 과일의 적정가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나마저도 절로 이건 너무 비싸다고 중얼거리게 되는 과일이 있다.

바로, 애플망고다.

최상품 애플망고는 하나에 만 원이 넘는다.

얼마 전 말레이시아 여행 중 노점에서 샀던 애플망고 두 개 가격이 4천 원도 안 됐다.

나는 먹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내의 말에 따르면 맛도 훌륭했다고 한다.

그걸 생각하면 우리나라에서 파는 애플망고는 도대체 무슨 일을 겪고 온 건지 궁금하다.


아내가 애플망고에 빠진 건 작년이었다.

대학 동기가 생일 선물로 최상품 애플망고를 보내주었다.

그걸 한입 베어 문 아내의 눈빛은 요동치고 있었다.

물론 그 후로도 몇 번 더 사 먹긴 했지만 좋아하는 만큼 자주 먹기엔 가격이 너무 강하다.

달콤한 만큼 아찔한 과일이다.



이런 애플망고가 더욱 신분이 상승하는 곳이 있다.

바로 고급 호텔이다.

마트에서는 좀 비싸다 싶었던 수준의 애플망고가 호텔 빙수 위에 올라가는 순간 귀족 과일이 된다.

몇 해 전부터 고급 호텔들에서 애플망고빙수가 은근히 이상한 가격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6~7만 원 정도였다.

호텔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비싼 건 15만 원대까지 올라갔다.

물론, 최상품 애플망고에 프리미엄 우유 얼음, 셰프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더해져 만들어진 빙수다.

시그니처 플레이트에 담겨 그 공간에서 누리는 분위기와 서비스까지 포함된 가격일 것이다.

이해해 보려 애써보지만, 그래도... 이게 정말 적절한 가격인지는 잘 모르겠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그런 가격이 붙는 건지 궁금하긴 하다.

빙수를 한입 떠먹자마자 입 안에서 여름이 춤추고, 마음 깊은 곳에서 지금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차오르는 그런 마법 같은 맛일까?

그렇다고 해도 과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선 직접 가서 먹어보는 게 좀 부담스럽다.

그래서 메뉴판 없는 우리 집 식당에서, 정확한 과일 입맛의 단골손님을 위해 직접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다.

고급 호텔에 비해 분위기와 서비스는 부족할지 몰라도 정성은 더 담을 수 있다.



우리 부부의 취향을 담아 아내를 위한 애플망고빙수, 나를 위한 파인애플빙수를 준비해 본다.

요리는 전날 저녁부터 시작된다.

먼저 우유에 연유를 섞고 약간의 물을 더한다.

그리고 연유가 잘 풀리도록 충분히 저어준다.

물은 꼭 넣지 않아도 되지만 넣으면 얼음을 만들었을 때 조금 덜 녹는다.

이 걸 지퍼백에 담고, 공기를 최대한 빼낸 뒤 세지 않도록 잘 닫는다.

그리고 얇게 펴서 냉동실에 넣어 10시간 이상 얼린다.


전날 준비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크림이다.

크림을 만들 땐 비싼 생 애플망고 대신 냉동 애플망고를 활용한다.

냉동 망고에 코코넛 밀크를 넣고 천천히 끓인다.

코코넛 향이 집 안 가득 퍼지면, 아내가 괜히 한 번 주방을 슬쩍 들여다본다.

망고가 말랑해지면 주걱으로 부숴가며 조금 걸쭉해질 때까지 저어준다.

맛을 봤는데 뭔가 아쉽다면 그건 설탕이 부족한 것이다.

입맛에 따라 설탕을 살짝 더해도 좋다.

이 애플망고크림은 에이드나 라떼 같은 음료에 넣어도 좋고, 그냥 잼처럼 빵에 발라 먹어도 된다.

그 말인즉슨 많이 만들어도 전혀 문제없다는 뜻이다.


같은 방식으로 파인애플크림도 만든다.

애플망고에 비해 파인애플은 조금 더 단단하고 으깨기 어렵기 때문에 여유를 가지고 만들어야 한다.

완성된 두 크림은 각각 예쁘게 담아 냉장고에 넣고 차갑게 보관한다.



이제 빙수를 먹을 준비를 시작한다.

바로 차가운 걸 먹었다간 복부가 놀라 항의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먼저 따뜻한 차와 프렌치토스트로 속을 다독이기로 한다.

먼저 식빵을 먹기 좋게 썰어 3층으로 쌓는다.

계란과 우유를 섞어 식빵에 흠뻑 적셔준다.

바로 굽지 않고 냉장고에 1시간쯤 넣어두면 계란물이 빵 속까지 잘 스며들어 더 촉촉한 식감을 만들 수 있다.

이제 팬에 올려 약불에서 조심스럽게 굽는다.

기호에 따라 계란물에 소금을 약간 넣거나, 완성된 토스트에 설탕이나 시나몬 가루를 뿌려도 좋다.

따뜻한 홍차를 곁들이면 빙수를 맞이할 준비는 완벽하다.


이제 메인 디쉬, 빙수를 만들기 시작한다.

생 애플망고와 파인애플은 미리 얇게 썰어둔다.

애플민트도 준비한다.

플레이팅용 목적이 더 크기 때문에 없어도 상관없지만 얹는 순간 고급스러운 척이 가능하다.

전날 얼려두었던 우유 얼음은 조금만 상온에 두면 손으로 부술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진다.

너무 단단하면 칼로 다져도 된다.


빙수 그릇에 전날 끓여둔 크림을 살짝 깔아준다.

그 위에 우유 얼음을 수북하게 담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 크림을 뿌린다.

그 위에 얇게 썰어둔 과일들을 보기 좋게 올린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진 않다.

망고는 미끄러지고, 파인애플은 자꾸 방향을 틀어댄다.

그래도 꿋꿋하게 한 조각 한 조각 정성껏 올려나간다.

마지막으로 얼음 한 스푼을 동그랗게 뭉쳐 위에 올리고 애플민트로 살짝 눌러 마무리한다.

드디어, 우리 집 버전 애플망고빙수와 파인애플빙수가 완성되었다.



요즘같이 더운 날씨에 에어컨 바람 빵빵한 식탁에서 빙수 한 그릇 들고 앉아 있으니 여기가 바로 낙원이다.

여름의 풍경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러다 아내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낸다.

"어릴 땐 집에 얼음 가는 기계 있었서 그걸로 자주 빙수 해 먹었어."

그때는 지금처럼 과일 빙수가 유행하기 전이어서 곱게 간 얼음에 떡, 젤리, 팥을 잔뜩 얹었다고 한다.


음식은 결국 추억의 스위치다.

맛보다 강한 건, 그 맛을 둘러싼 이야기다.

빙수 한 그릇에 어린 시절의 여름이 떠오르니 이것이 요리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말도 많이 하고, 먹기도 많이 했는데도 양이 은근히 많았는지 반 이상이 남았다.

남은 빙수는 반찬통에 옮겨 담아 냉동실로 직행한다.

다시 꺼내봤을 때 그 빙수는 없었다.

예쁘게 쌓았던 얼음도, 정성껏 얹었던 과일도, 모두 하나로 뭉쳐 얼음 덩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뭐 다시 먹어도 여전히 맛있다.

비주얼은 사라졌지만 정성은 그대로 얼어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아내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살짝 입꼬리를 내린다.

"탈락했어..."

오디션도 아니고, 무슨 일이냐고 묻자 회사 복지제도로 신청한 호텔 숙박 추첨에 떨어졌단다.

최근 몇 년 신청을 안 해서 이번엔 순번이 좀 올라 내심 기대했는데, 신청자가 많아 경쟁률이 높았다고 한다.

아내의 표정에는 진한 아쉬움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근데 오늘 이 정도면... 솔직히 호텔 안 부럽지 않아?"

내가 웃으며 묻자, 아내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어떤 호텔보다 시원했고, 달콤했고, 무엇보다 추첨 없이 바로 입장 가능한 바로 우리 집 식탁이었다.


아쉽게 놓친 호텔의 여운은 조만간 또 빙수 만들어준다는 약속으로 덮어두었다.

우리는 그렇게 살짝 아쉬운 여름밤을 천천히 흘려보냈다.


아내의 후기

애플망고빙수
★5.0점
비주얼부터 호텔 빙수를 뺨치는 신랑표 애플망고빙수!
맛도 정말 훌륭했어요.
코코넛 향이 듬뿍 나는 수제망고크림에, 부드럽고 연유맛이 진하게 배인 눈꽃 얼음.
그리고 함께 구매한 후숙이 잘된 애플망고까지.
그 모든 조합이 완벽했습니다.
무엇보다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봐서일까요?
한 숟갈 한 숟갈에 더 감동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파인애플빙수
★4.5점
파인애플빙수는 신랑이 특히 좋아했던 메뉴였죠.
저는 한 입만 맛봤지만 진한 파인애플 향이 살아있는,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맛의 빙수였습니다.
취향은 다르지만 완성도는 높았어요!

프렌치토스트
★4.0점
정말 부드럽고 포근한 프렌치토스트였습니다.
신기하게도 빵이 촉촉하면서도 쫄깃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는 그 맛.
따뜻한 홍차와 함께하니 더없이 만족스러운 시작이었습니다.


P.S.

빙수 그릇과 스푼은 혼수로 들어온 식기다.
벌써 2년 반 넘게 우리 집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동안은 딱히 쓸 일이 없어 과일을 먹을 때 한두 번 꺼내본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번 여름, 문득 '빙수 그릇이 있으니까 빙수를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없었으면 떠오르지도 않았을 생각이었다.

가끔은 요리 아이디어가 재료가 아니라 식기에서 시작될 때도 있다.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
아마도 이번 여름부터는 이 빙수 그릇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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