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육볶음, 황태국
인생을 살다 보면, 의도하지 않았는데 신기하게 행운이 얻어걸리는 순간들이 있다.
생각해 보면 참 많다.
그날도 그랬다.
도서관에서 요리에 관한 에세이들을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다 제목에 이끌려 우연히 한 책을 꺼내 들었다.
시골 밥상의 소박함이 느껴졌다.
딱 한 페이지만 읽었을 뿐인데,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두 페이지를 넘기고는, 이 책은 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음에 드는 책은 구매해서 읽는 것이 작가와 출판업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절판이란다.
아쉬운 마음에 중고책 사이트를 뒤졌다.
놀랍게도 새 책처럼 멀쩡한 책이 2천 원도 채 되지 않았다.
책을 우연히 발견한 것도, 그걸 그 가격에 구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뜻밖의 행운이었다.
몇 년 전, 아내와 산책을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있는 아내를 보니 뭔가 이상했다.
딱히 말은 안 했지만 축 처져 있었다.
무슨 일 있냐는 물음엔 그냥 그런 날이라는 대답뿐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기운이 빠지는 날, 괜스레 마음이 허한 그런 날이었나 보다.
보통은 "나가서 바람 쐬면 기분 풀릴 거야" 하고 넘기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그 축 처진 기운을 어떻게든 들어 올려주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건, 아내가 사랑하는 초콜릿이었다.
잠깐 산책을 미루고 집 근처 초콜릿 디저트를 잘하는 집을 마구마구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왜 이런 곳을 지금까지 몰랐지?' 싶은 카페를 찾았다.
아내가 좋아하는 빨간 머리 앤으로 꾸며지고, 초코 음료 평점도 높은 카페였다.
우린 곧장 그 카페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아내의 얼굴이 사르르 폈다.
음료가 나오고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이미 뭔가가 충전된 표정이었다.
나는 초콜릿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 마신 초코 음료는 너무나도 맛있었다.
나는 초코 음료라면 반 잔만 마셔도 3개월치 초콜릿 필요량이 충전된다.
그런 내가 한 잔을 금세 다 마시고, 한 잔 더를 고민하게 만드는 맛이었다.
그 뒤로 우린 항상 둘이 가더라도 세 잔을 시킨다.
그 카페는 아내가 주기적으로 찾아가야만 하는, 심지어 우리가 이사를 한 지금도 예전 동네에 들를 이유가 되어주는 귀한 행운으로 남았다.
https://place.map.kakao.com/570532903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게 얻어걸린 행운이 있다.
바로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처음 뵈었을 때다.
아내와 연애 중이던 시절, 아직 결혼은 생각도 안 하고 있던 시기였다.
아내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첫인사를 드리기로 했다.
약속을 앞둔 전날 밤, 긴장이 몰려왔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뭐라고 인사를 드려야 할지, 고개는 몇 도쯤 숙여야 할지, 어떻게 웃으면 좋아 보일지까지 전부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준비해도 뭔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찜찜함을 안고 겨우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도무지 떠오르지 않던 그 '부족함'의 정체가 드러났다.
선물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예의였다.
하지만 그땐 사회 초년생이기도 했고, 그런 자리는 처음이다 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약속까지 두 시간 정도 남은 상황에서 떠오른 게 다행이었다.
부랴부랴 채비를 마치고 집 근처 잡화점으로 향했다.
마침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아 매장에는 빨강과 초록의 반짝이는 소품들이 가득했다.
그중 귀여운 크리스마스 컵 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다 싶어 바로 구매했다.
그런데 문제는 가격이었다.
너무 저렴했다.
가격이 전부는 아니지만, 명색이 대기업 다니는 딸의 남자친구가 준비한 선물이 너무 저렴하면 성의 없어 보일 수도 있으니 걱정이 됐다.
다시 정신을 부여잡고 식당 근처로 이동해 보탤 만한 것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카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선물용 원두를 포장해 팔고 있어 바로 집어 들었다.
컵과 원두.
급조된 조합이었지만, 나름 '성탄절 홈카페 세트'처럼 그럴듯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첫인사 자리에서 잔뜩 긴장한 채 선물을 드렸다.
다행히 반응은 꽤 좋았다.
특히 원두에 대한 반응이 의외였다.
알고 보니 장인어른은 하루에 커피를 서너 잔씩 드시는 커피 마니아셨다.
집에서도 직접 원두를 갈아 내려 드신다고 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당연히 아내가 미리 알려준 줄 아셨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날 아침 허둥지둥 돌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대로 선물을 준비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센스 있는 딸의 남자친구'로 깜짝 등극해 버렸다.
지금까지도 처가에 놀러 가면, 장인어른이 직접 내려주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그날의 행운을 웃으며 이야기 나눈다.
저녁 식사를 각자 해결하기로 한 어느 날이었다.
요리하기도 귀찮은 날이었다.
나는 냉동 닭가슴살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대충 저녁을 해결하고,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저녁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어떤 이들에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할지도 모를, '혼자만의 시간'이라 불리는 그런 시간 말이다.
아내는 퇴근 후 저녁은 샌드위치로 간단히 때우고, 바로 운동을 갔다가 늦게 들어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퇴근을 한 시간쯤 앞둔 아내에게 연락이 왔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 운동은 취소했고, 곧바로 집으로 갈 테니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계획 변경의 알람이 울렸다.
아내는 먹고 싶은 요리를 늘 정확하게 말해주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엔 평소와 다른 특별 주문까지 들어왔다.
위로의 음식이 먹고 싶어.
굉장히 어려운 주문이었다.
위로의 음식이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다.
게다가 재료도 딱히 준비된 게 없었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있는 재료로 간단한 집밥을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힘들 땐 특별한 요리보다 소박한 밥 한 끼가 더 위로가 될 때도 있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기도 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집이니, 밥만 지어도 '집밥'이다.
일단 쌀부터 불린다.
현미, 쌀, 수수를 섞어 잘 씻고 30분 정도 물에 담가둔다.
다 불린 쌀은 솥에 안쳐둔다.
그리고 동시에 국을 끓이기 시작한다.
메뉴는 평소 가장 자주 먹는 황태국이다.
냄비에 들기름을 두르고 먹기 좋은 길이로 자른 황태채를 넣는다.
참기름보다 들기름이 황태를 볶을 때 한층 더 고소하고 깊은 맛을 낸다.
중약불로 타기 직전까지만 볶는다.
황태가 이제 좀 그슬렸다 싶으면 재빨리 황태가 살짝 잠길 정도로만 물을 붓는다.
이제부터는 센 불로 끓인다.
여기에 파와 다진 마늘을 넣고 국물이 졸아들면 다시 물을 붓는다.
이 과정을 세 번 반복한다.
이렇게 적은 물로 여러 번 졸여내야 황태의 깊은 맛이 우러난다.
그냥 황태가 담긴 물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국물이 충분히 우러나면, 물을 넉넉히 추가한다.
그다음 홍게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5분 정도 더 끓이면, 깔끔한 황태국이 완성된다.
황태국에는 보통 무도 넣고, 계란도 풀고, 두부를 넣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재료가 없었다.
그리고 있었어도 안 넣었을 것이다.
나는 황태의 맛이 군더더기 없이 살아 있는 깔끔한 스타일의 황태국을 좋아한다.
거기다 마음이 복잡한 날엔, 이유 많은 맛보다 단순하지만 깊은 국물이 더 잘 어울린다.
메인 반찬은 제육볶음이다.
먼저 제육볶음용 앞다리살을 팬에 올리고, 핏기가 가실 때까지 볶는다.
고기가 익기 시작하면 다진 마늘, 고춧가루, 설탕, 고추장, 된장, 간장을 넣어 양념한다.
이때 팬 바닥이 너무 뜨거우면 고기가 탈 수 있으니, 불을 잠시 줄이고 재빨리 섞는다.
양념이 고루 배면, 양파와 대파, 당근을 넣고 다시 볶는다.
야채에서 물이 나오기 전에 센 불로 빠르게 볶아야 야채의 아삭함이 살아 있는 제육볶음이 완성된다.
접시에 옮겨 담고, 마지막으로 통깨를 솔솔 뿌리면 요리는 끝난다.
완성된 요리를 식탁에 올리고, 함께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아내는 평소보다 말이 적었다.
밥숟갈을 드는 손도 어딘가 무거워 보였다.
다사다난한 하루를 보낸 모양이다.
일도 많았지만, 결정적으로 '큰 사고가 날 뻔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하필이면 같이 일하던 동료들 모두 연차이거나 다른 업무로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막상 혼자 맞닥뜨리니 머릿속이 하얘졌다고 했다.
결국 연차 중이던 동료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고, 도움이 없었더라면 시말서를 써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하루 이틀 다닌 직장도 아닌데, 이런 일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 같아 혼자 꽤나 우울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다정함이 부족한 편이다.
어떤 멘트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괜히 위로한답시고 이상한 말 했다가 더 우울하게 만들까 봐 겁도 난다.
친구였으면 소주라도 한 잔 권했겠지만, 아내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밥상을 차려주고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밥을 몇 숟갈 뜬 아내의 얼굴이 조금씩 환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이렇게 말했다.
오빠가 차려준 집밥을 먹을 수 있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저 밥 한 끼일지 모르지만 그게 위로가 된다는 사실에 괜히 뿌듯하기도 울컥하기도 했다.
나는 그저 평범한 밥상을 차렸을 뿐이다.
별다른 것도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평범함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밥을 그리워하나 보다.
집밥은 마음이 머무는 위로이니까.
나는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오늘 아내에게 꼭 필요한 밥상을 차려낸 작은 행운을 얻었다.
맛있게 식사를 마쳤으면, 이제는 의도하지 않은 행운이 아닌 의도한 행운을 얻어볼 차례다.
내가 1년에 서너 번 정도 하는 행동이 있다.
전날 밤, 이상하게 기분 좋은 꿈을 꿨다.
복이 날아갈까 싶어 꿈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조용히 집을 나와 한 매장으로 들어선다.
종이와 펜을 들고, 숨을 고른 뒤 여섯 개의 숫자 조합을 신중히 다섯 세트 만든다.
그리고 기계 추천 번호 다섯 세트를 더해 총 만 원의 투자를 마친다.
이 작은 의도가 상상 이상의 행운이 되어 돌아온다면 그다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런 행복한 상상을 품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은근슬쩍 '당첨되면 이 연재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안고.
며칠 뒤, 그 결과를 확인한다.
모두의 예상대로, 결과는 뻔하다.
의도한 행운은 오지 않았다.
그 대신 얻은 건, '이런 글을 계속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더는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는 의도하고 싶지 않았던 행운 하나뿐이다.
아내의 후기
제육볶음
★5.0점
회사에서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었던 날이라 신랑에게 위로가 되는 음식을 부탁했어요.
그렇게 나온 신랑표 제육볶음은 정말 맛있었고, 진심으로 감동이었습니다.
메뉴판 없는 식당의 다른 메뉴와 비교하면 제육볶음은 어쩌면 가장 평범한 국민 반찬일지 모르지만, 오늘 저에겐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음식이었습니다.
황태국
★5.0점
평소 신랑이 자주 해주던 익숙한 국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따뜻하게 제 몸과 마음을 채워주었어요.
한 끼 식사였지만 여러모로 깊은 위로와 감동을 받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내의 후기, 그에 대한 나의 후기
맛에는 누구보다 냉정한 아내지만, 오늘의 후기는 맛뿐 아니라 위로 점수까지 함께 반영된 듯하다.
의도치 않게 받은 행운의 5점 만점 폭격이다.
P.S.
남성 직장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음식이 있다면 그건 단연 제육덮밥이다.
남은 제육볶음을 밥 위에 얹고, 김가루와 참기름을 살짝 두른 뒤 계란후라이까지 하나 올려주면 된다.
딱히 위로받을 일도 없지만, 괜히 위로받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