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속의 지우개
중고등학교 다닐 땐 밤새워 시험 준비를 해본 적이 없다. 평소에 배운 거 정리해두고 시험 땐 그것만 주욱 훑어보며 체크하면 시험 준비 끝. 따로 시험공부랄 것도 없었고 평소보다 잠도 일찍 자고. 어. . . 시험공부를 안 해서 성적이 항상 비슷했구나.
대학 생활을 할 땐 시험 범위도 많기도 하고 다른 재밌는 것들이 많다 보니 벼락치기에 맛이 들렸다. 그래서. . . 성적이 그랬구나. 하하.
그래도 단기 기억력은 남부러울 데가 없이 좋아서 벼락치기를 해도 중간 이상은 했고 그 덕에 평소에 즐거이 살았으니 그 또한 되었다.
여기까지 한 이야기는 내 머리가 그닥 나쁘진 않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였다. 나름의 빌드업이랄까.
근데 참 신기한 건 벼락치기 한 내용은 기억이 나는데 왜 금방 읽은 책과 방금 보고 나온 영화의 등장인물 이름은 기억이 안 날까. 어디에 사는 누구와 어디에 다니는 누가 다른 또 누군가랑 무슨 일이 있었다. 이렇게 뭉뚱그려 생각이 날뿐 도통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이름은 센과 치히로, 토토로, 짱구,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제목에 있는 이름이 대부분이다.
아, 전지적 독자 시점과 퇴마록은 하도 많이 읽어서 이름을 기억한다.
그뿐인가.
왓챠피디아에 별점을 누른 영화가 2천 편이 넘는데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 영화가 거의 없다. 정말 재미있게 봤다고 드물게 별 다섯 개를 누른 영화도 결말이 기억이 안 난다.
비가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노래의 제목조차도 늘 잊어서 옆지기에게 그 노래 뭐였지, 그거? 하면 이거? 하며 틀어준다.
이렇다 보니 가족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생긴 것 같다.
뜬금없이
그거 있잖아, 그거. 그거 뭐였지?
그 노래 있잖아. 딴딴따라단 그거 제목이 뭐지?
그거 그 배우 나오던 드라마 제목이 뭐지? (그 배우 이름도 모른다)
이러면 또 어떻게들 알아듣고는 알려준다.
아, 그래서 자꾸 잊는지도 모르겠다.
휴대전화를 쓰고부터 전화번호를 잊은 것처럼
대신 기억해 주는 가족들이 있어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