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말은 인간이 착용한 의복 중 가장 오래된 아이템 중 하나이다. 자그마치 신석기시대부터 존재했다. 기원전 5000년, 석기시대에 신던 양말은 동물의 가죽을 발목에 연결하거나 묶어 신발처럼 신던 것이 시초였다. 물론 그때는 신발인지 양말인지 구분도 하기 힘든 시대였을 테고, 당연히 신체 보호를 목적으로 착용했을 것이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기원전 8세기 즈음에는 동물의 털로 만들어 신발 아래 깔창처럼 사용했거나, 발을 투박하게 감싸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는 가죽 조각이나 직물로 발을 감싼 형태로 발전했고, 2세기경에는 천 조각으로 바느질을 하여 발에 맞는 양말을 만들기 시작했다. 동양에서도 양말 문화가 발달했는데, 한국의 버선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만들어 신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우돈(Udones)'이라 불리는, 최초의 양말이 등장했다. 울로 만든 이 양말은 영국의 한 섬에서 발견되었고, 방한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시기에 이집트에서는 최초의 니트 양말이 만들어졌다. 이 양말은 엄지와 나머지 발가락이 분리된 형태로 짜여 샌들과 함께 신도록 제작되었다.
서기 5세기에 유럽 성직자들은 순결을 상징하는 '퍼티(Puttee)'라고 불리는 양말을 신었다. 중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바지 길이는 길어졌고, 양말은 다리 아랫부분을 덮는 밝은 색(특히 흰색)의 꽉 끼는 천이 되었다. 양말에 신축성 있는 밴드가 없었기 때문에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양말 윗부분에 가터를 얹었다.
1000년 경이되자 니트로 짠 양말은 귀족의 복장이 되었다. 이 양말은 흡사 발레리노 의상처럼 레깅스와 비슷한 형태였고, 12세기가 되어서는 레깅스에 발가락을 가릴 수 있게 되었다.
12세기말, 유럽의 노동자들은 거칠고 딱딱한 모직물의 양말을 짜고 있었지만, 귀족들은 고급 품질로 섬세하게 만든 양말을 착용했다. 15세기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 귀족들은 손으로 짠 실크 스타킹으로 부와 명예를 과시했다.
이러한 니트 실크 스타킹은, 이웃 나라 영국 상류층 사이에서도 유행이 되었고, 1490년경에는 하나의 옷으로 만들어져 훗날 '타이즈'란 이름으로 탄생된다. 점차 양말은 소재의 다양화로 비단, 양모, 벨벳 소재로 만들어졌고, 각 나라마다 다른 색과 개성을 뽐내며 유행하였다.
16세기에 이러한 양말류는 엄격한 법을 통해 규제되었다. 1566년 런던시는 '잘못된 형태'의 양말을 신지 못하도록 감시와 제재를 가했고, 경찰들이 수시로 시민들의 다리를 검사했다. 당시로서는 의복이 계급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었기에 이런 특이한 규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589년 영국의 목사 윌리엄 리에 의해 최초의 뜨개질 기계가 발명되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검은 스타킹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선물했지만, 여왕은 발명에 대한 특허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계가 만든 스타킹이 왕족의 발목에 비해 너무 거칠다고 불평했고, 무엇보다 기계가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왕 앙리 4세는 윌리엄의 발명품이 왕실 재정에 부를 가져올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윌리엄은 프랑스로 이주해 스타킹 공장을 지었다. 얼마 후 프랑스인들은 이 발명품에 열광했다. 하층민들을 위해 만들어진 양말은 양모를 사용했고, 귀족들을 위해선 색실로 만들어졌다. 그렇게 양말은 상류층과 하층민 모두에게 환영받는 의류로 발전했다.
17세기 후반에 면 소재는 옷뿐만 아니라 양말의 소재로도 활용되었다. 바지가 길어지고 양말 길이가 짧아지면서 '스타킹'은 '양말'이란 말로 대체되었다. 즉, 스타킹과 양말이 별개의 의복으로 분리되었다.
양말의 진정한 혁명은 1938년 나일론의 발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면과 나일론을 혼방하여 만든 양말은 강도와 탄력이 이전의 그 어떤 제품보다 탁월했다. 이러한 방직 기술은 현재까지도 양말 제조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양말은 단순한 의복을 넘어 시대의 문화와 계급, 기술의 발전을 담아 온 인류 역사의 작은 증인이었다. 발을 보호하는 기능적인 용도에서 시작해 신분의 상징이 되었다가, 다시 모든 사람이 일상에서 편하게 신는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신는 이 작은 천 조각에 수천 년의 역사가 담겨 있다니 새삼 경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