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부터 2020년대
90년대의 진한 곡선형 눈썹과 볼륨 있는 입술에서 2000년대의 자연스러운 쌩얼 메이크업, 그리고 2010년대의 물광 피부와 레드 립스틱까지. 한국 메이크업 트렌드의 변화는 그 시대를 대표했던 여성 스타들의 얼굴을 통해 가장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김혜수의 섹시함, 이소라의 시크함, 심은하의 내추럴함, 장진영의 고혹적인 쌩얼, 그리고 수지의 청순함까지. 이들은 단순한 연예인을 넘어 시대의 미적 기준을 형성하고 대중의 취향을 좌우했던 트렌드세터들이었다. 이제 그 얼굴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김혜수는 언제나 가장 앞서 트렌디하게 화장을 해왔다. 따라서 현대 한국 메이크업의 변천사를 공부하고 싶다면 김혜수의 화보를 찾아보면 될 것이다. 80년대 후반 청순함과 성숙함의 두 가지 이미지를 가지고 데뷔한 그녀는 90년대 초반 얇은 곡선형의 눈썹과 두툼하고 진하게 입술 화장으로 많은 여성들의 워너비 시스터로 칭송받았다. 그녀는 한 가지 스타일을 고수하기보다는 다양성을 시도하면서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트렌드세터로 군림하였다. 그렇게 언제나 당당하고 아름답고 섹시했다.
90년대 초반, 슈퍼모델 출신 이소라의 메이크업 스타일도 한국 뷰티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뭔가 엉성한 듯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결점을 완벽하게 감출 줄 알았다. 이소라의 등장은 기존 미녀들을 순식간에 진부하게 만들어 놓았다. 얼굴만 예쁘면 전부이던 시대에서 스타일 아이콘으로 멋짐을 장착하고 나타난 여성이기 때문이다. 키가 무척 크고 독특하며 이국적인 마스크의 이소라에게 남녀 모두 열광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녀의 움푹 들어간 눈매와 다소 엉성한 모양새의 눈썹이었지만 그녀가 하면 모든 게 시크하게 보였다. 완벽한 메이크업에만 열중하던 시대에 전체적인 스타일을 중시하게 해 준 그녀는 진정한 뷰티 아이콘이었다.
90년대 중반,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미지로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김남주는 화장발의 귀재였다. 다소 인위적인 성형을 했어도 완벽한 메이크업에, 일단 어떤 화장을 해도 잘 어울렸다. 게다가 당시 그녀가 홍보하던 라끄베르 화장품 광고 속 메이크업은 완벽 그 자체였다. 김혜수의 볼륨 있고 섹시한 메이크업과 김남주의 도도하고 세련된 메이크업은 당시 여성들의 메이크업 유행을 양분했다. 게다가 김남주 덕분에 성형에 대한 인식조차 좋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실제로 도시에는 김남주처럼 생기고 김남주처럼 화장하고 다닌 이들은 없었는데 그녀는 도회적 이미지를 대표하는 스타로 군림했다.
90년대 후반, 전폭적인 지지보다 의외로 마니아 군단을 많이 만들었던 이승연식 메이크업 스타일도 가히 압도적이었다. 진짜 세련된 도시 미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김혜수나 김남주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이승연은 도시 미인의 표상이었다. 세련된 브라운 계열의 메이크업과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특히 도심의 커리어 우먼들에게 절대적인 찬사를 받았다. 더군다나 그녀의 눈썹 앞머리는 아직도 따라 하고 싶은 사람이 많을 정도로 부러운 요소이다. 세련된 커트머리와 기막히게 자연스럽고 세련된 브라운계열의 메이크업. 90년대 이승연하면 세련미란 수식어가 떠나질 않는다.
90년대 말, 한국 연예계 역사에 길이 남을 배우 심은하의 데뷔 초 화장 스타일은 별 볼 일 없었으나, '8월의 크리스마스' 영화 전후로 내추럴 메이크업의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그녀의 한 듯 안 한 듯한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이 여성들에게 새로운 스타일로 주목받게 되면서 많은 여성들의 귀감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각성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한국 여성들의 얼굴에 색조를 뺀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은 심은하가 터닝포인트를 만들어 주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쟁쟁한 미인들 사이에 김희선의 완벽한 페이스는 황신혜를 이어 90년대를 대표하는 미인상으로 이견 없이 인정을 받았다. 그녀는 진한 메이크업을 해도 화장기가 전혀 없어도 완벽한 미모를 유지했다. 타고나길 워낙 예쁜 미모로 메이크업으로 이미지가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드라마 출연 때마다 나오는 패션 아이콘은 품귀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김희선의 특별한 외모에 비해서 스타일 및 액세서리는 지극히 보편적이었으나 그 보편적 선택이 수많은 여성들이 따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메이크업보다 헤어스타일에 영향을 준 스타라고 보는 편이 적합하다.
2000년대 초반, 전지현의 트레이드마크는 긴 머리와 화장을 안 한 것 같은 쌩얼에 주름기 가득한 자연스러운 입술이었다. 피부는 촉촉하고 볼은 자연스럽게 생기 가득하고 입술은 원래 그런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던 감쪽같은 화장법으로 청순과 섹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00년대 초반은 전지현으로 인해 베네피트의 베네틴트가 동이 날 정도였다. 그녀의 건강한 섹시미는 당시 가장 각광받던 메이크업 스타일이었다.
같은 시기, 쌩얼의 기준은 전지현 스타일과 장진영 스타일 둘로 나뉠 수 있다. 캐주얼하고 톡톡 튀는 상큼 발랄 전지현 메이크업과 차분하고 고혹적인 느낌의 장진영 쌩얼이 그러하다. SK-II 화장품은 장진영이 부흥시킨 브랜드이다. 장진영은 까무잡잡한 피부에 윤기가 좔좔 흘렀고 얼굴에 아무런 색이 없어도 빛이 나게 예뻤다. 김남주식 세련됨에서 이승연의 도시미 그리고 전지현 못지않게 청순한 이미지에 섹시함은 말할 것도 없고 기막히게 스타일리시했던 모습으로 남녀 모두에게 사랑을 받았다.
2000년대 중반, 이효리의 독보적인 캐주얼 스타일을 누가 따라 할 수 있을까? 이효리는 이효리만의 스타일이 있다. 짧은 다리와 완벽하지 않은 외모인데도 그녀만의 독보적인 스타일이 있다. 비록 그녀 스타일이 모방이 절반이었다 해도 그것을 그녀만큼 완벽하게 소화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한마디로 2000년대 강북 섹시의 전형이었다. 이효리는 아무리 명품으로 치장해도 서민적이며 대중적이면서 섹시한 어딘가 만만해 보이는 스타일로 한국을 평정했다. 실물보다 화장발이 더욱 잘 받았고 옅은 메이크업보다 짙고 스모키한 메이크업이 잘 어울렸는데 특히 태닝한 피부에 컬러렌즈 글로시한 입술 연출로 노는 언니 스타일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볼 수 있다.
2000년대 중후반, 재벌집으로 시집갔다는 이유로 아줌마들의 로망이 되었던 고현정. 그래서인지 그녀의 위치는 은퇴 후에도 이혼 후 복귀하고서도 확고했다. 현재는 살이 많이 빠져 흑역사를 잠재웠으나 어찌 되었든 그녀의 후덕한 얼굴과 탐스러운 피부는 명품으로 치장을 해도 다소 촌스러운 그녀의 모든 것을 상쇄시켰다. 멋모르는 서민의 눈에는 촌스럽기 짝이 없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엄청난 가격대의 명품을 걸치고 들치고 나왔으니 유한부인들이 기겁을 하면서 선망했던 이유였으려나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그녀가 걸치는 명품은 그녀를 빛나게 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된 것 같지 않았고 그녀가 가장 자부심 느끼고 그녀의 복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타고난 피부에 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그녀의 타고난 피부결을 모든 여성들이 부러워했다.
2000년대 후반, 서인영은 화려하게 솔로 가수로 데뷔하면서 한국에서 비비드한 핑크 립스틱 열풍을 일으킨 대표 주자다. 이효리의 뒤를 이어 대중적인 체형에 대중적인 마스크로 대중적인 섹시함, 거기에 더해 괴랄할 정도로 당당한 이미지의 주역이 되었는데 어떤 명품이나 신상을 아기처럼 소중히 여기는 특이한 속물근성이 여심을 자극한 것이 흥미롭다. 특히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였던 형광빛 핑크 립스틱과 과감한 콧대 하이라이팅은 당시 20대 여성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그녀가 메이크업 파우치를 공개할 때마다 화장품 품귀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가 구입한 바비브라운의 메이크업 박스조차.
2010년, 스포츠 스타 김연아는 미의 기준을 바꿔 놓았다. 쌍꺼풀 없는 눈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스모키한 화장이 얼마나 근사한지도 김연아를 통해서 알았다. 특히 울어도 번지지 않는 아이라이너와 눈이 크게 보이지 않아도 진하고 시크하게 보이는 스모키한 화장 스타일은 그녀 덕분에 모든 여성들이 따라 하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나이를 먹어서인 것인지 느닷없이 쌍꺼풀 수술을 한 뒤부터인지 모르겠으나 그녀의 미모도 인기도 역사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2010년대 초중반, '국민 첫사랑'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수지는 청순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여성들의 롤모델이 되었다. 수지가 한국 뷰티사에 가장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다면 하얀 피부와 붉은 립스틱에 있다. 수지는 원래부터 입술 모양이 워낙 예쁘고 희고 좋은 피부를 지녀서 빨간 립스틱이 특히 잘 어울렸다. 이 때문에 당시 핑크 계열이 유행하던 메이크업 트렌드가 수지 이후에는 레드 계열로 확실하게 바뀌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 메이크업 스타일은 수지 전후로 나눠도 될 정도로 메이크업 색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2014년, 드라마 '밀회'를 통해 김희애는 중년 여성들 사이에서 뷰티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5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촉촉하고 윤기가 흐르는 피부로 '물광 메이크업'이라는 트렌드를 이끌었다. 특히 건조한 피부를 가진 40-50대 여성들 사이에서 그녀의 메이크업 스타일은 하나의 혁명과도 같았다. 실제로 물광 트렌드는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사그라들던 참인데 김희애가 드라마에서 차용하고 등장하면서 화제가 되었고 개그맨 김영철이 희화화하면서 다소 우스꽝스럽게 대중화된 면이 있다.
2020년대, 장원영은 '물먹 메이크업'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사실 물먹 메이크업의 원조 시연자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장원영이 대중화시킨 것은 확실하다. 눈 밑을 발그레하게 블러셔처럼 활용하고, 매끈하고 윤기 나는 피부에 글로시한 입술로 표현하는 이 메이크업은 마치 물을 머금은 듯한 촉촉함을 강조한다. 비교적 젊거나 젊어 보이고 싶어 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이 트렌드는 자연스러움을 넘어 마치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귀여운 이미지를 연출한다. 장원영의 독특한 마스크와 스타일은 한동안 K-팝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뷰티 트렌드를 선도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