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영혼이 온 세상이니라. 19.
자기 자신의 자아 속에 있는 근원적인 샘물을 찾아내어야만 하며, 20.
세상은 쓴맛이 났다. 인생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극심한 고통이었다. 싯다르타 앞에는 한 목표, 오직 하나뿐인 목표가 있었으니, 그것은 모든 것을 비우는 일이었다. 29.
윤희의 슬픈 황홀경을 맛본 영혼인 터인지라.... 그는 자기의 감각을 죽였고, 자기의 기억을 죽였다. 31.
우리가 배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알려고 하는 의지와 배움보다 더 사악한 앎의 적은 없다고 말이야. 37.
그의 고요한 얼굴은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아 보였으며, 내면을 향하여 그윽한 미소를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 47.
인생은 번뇌이며, 이 세상은 온통 번뇌로 가득 차 있는데, 그 번뇌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길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부처의 길을 가는 자는 해탈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49.
그대는 그 가르침 안에서 한 틈, 한 결함을 찾아내었고... 덤불처럼 무성한 의견들 속에서 미로에 빠지는 것을 말 때문에 벌어지는 시비 다툼을 경계하시오. 54.
그 가르침의 목적은 다른 데에 있소. 그 목적은 번뇌로부터의 해탈이오. 55.
어느 누구에게도 해탈은 가르침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55.
나는 바로 자아의 의미와 본질을 배우고자 하였던 것이다. 나는 바로 자아로부터 빠져나오려 하였던 것이며, 바로 그 자아를 나는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60.
그러나 이제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워진 그의 눈은 차안의 세계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72.
누구나 서로 주고받는 것, 인생이란 그런 것이지요. 96.
아니다. 이런 유희야말로 윤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린애들의 유희인 것이다. 123.
어떤 소름 끼치는 공허함이 강물의 수면에 비치고 있었다. 그의 영혼 속에서 어떤 섬뜩한 공허함이 거기에 맞장구를 쳐 댔다. 128.
형상의 세계란 무상한 것, 덧없는 것이야. 135.
덧없는 것은 빨리도 바뀌는 법, 136.
강이 당신에게 말을 건넸던 거예요. 152.
그러니까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비밀을 강물로부터 배웠습니까? 155.
싯다르타의 전생들도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었으며, 싯다르타의 죽음이나 범천에로의 회귀도 결코 미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155.
싯다르타는 자기 아들이 옴으로써 자기에게 행복과 평화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고통과 근심 걱정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소년을 사랑하였으며, 그 소년이 없이 평화와 행복을 누리느니 차라리 그 소년 때문에 사랑의 고통을 겪고 사랑에서 비롯된 근심 걱정을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였다. 170.
모두가 스스로의 목표를 향하고 있었고, 모두가 그 목표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모두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194.
지혜는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204.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204.
우리가 시간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네. 시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205.
모두 다 일종의 죽음에의 의지였으며, 덧없음에 대한 심히 고통스러운 고백이었다. 그렇지만 그 어느 것도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 모두는 단지 모습을 바꾸고 있었을 뿐이며,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났으며, 그때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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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를 읽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헤르만 헤세가 1922년 발표한 소설 싯다르타는 수많은 독자에게 동양적 해탈로 향하는 티켓처럼 소비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을 붓다의 전기로 착각하고 읽어서인지 괘씸한 배신감이 들었다.
표면적으로는 구도자의 치열한 투쟁기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을 보면 서구적 개인주의와 실존주의가 동양의 옷을 입고 벌이는 1인극에 가깝다. 지독한 나르시시즘이 빚어낸 영적 판타지다.
소설 초반부, 주인공 싯다르타는 브라만 계급의 태생과 명석한 두뇌를 무기 삼아 역사 속 석가모니의 출가 과정을 답습한다. 그러나 헤세는 중반부에서 역사와 허구를 정면으로 충돌시킨다. 주인공이 이미 깨달음을 얻은 살아있는 부처 고타마를 대면하고도 그에게 귀의하기를 거부하는 장면이다.
그는 "지혜는 가르칠 수 없다"는 그럴듯한 논리로 스승을 떠난다. 언뜻 보면 주체적인 자아의 독립 선언 같지만, 이는 지독한 에고의 발현이다.
헤세가 설계한 구원의 서사에서 가장 역겨운 지점은 고타마를 떠나 속세로 투신해 기녀 카말라와 놀아나고 도박에 빠지는 등 타락의 과정에 있었다. 소설은 이 타락의 과정을 마치 깨달음을 위한 필수적인 통과 의례인 양 포장한다.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이 엮어서 떠올랐는데 관련한 포스팅은 다음 글을 참조.
결국 헤세의 문학은 사춘기 소년들에게 "너는 특별해, 저 무지몽매한 대중과 섞이지 마"라고 속삭이는 카인의 표적과 같다. 데미안부터 싯다르타까지, 그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고독한 천재형 인물로 그려지며 타인에 대한 책임은 소거된 채 오직 '나의 각성'에만 몰두한다. 그러나 성인이 된다는 것은 나의 평범함을 뼈저리게 인정하고, 냄새나고 비루한 타인들과 부대끼며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헤세를 두고 싸구려 신비주의라 혹평한 것이 전적으로 이해가 간다. 사춘기 시절에는 더할 나위 없이 위로가 된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이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나보코프의 소설이 더 마음에 드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