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미드 V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외계인이 지구에 도착해 호의적인 관계인 듯했으나 알고 보니 인간의 탈을 쓴 파충류였고 지구를 지배하려고 인간들과 싸우는 엄청나게 쇼킹한 스토리의 드라마다.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아름다운 여배우들을 보는 재미도 빠질 수 없었다. 악녀 캐릭터로 파충류 외계인을 대표하는 다이애나와 선한 캐릭터로는 인간 여성 줄리엣이 있었다. 줄리엣은 남주 도노반과 연인이었고. 나는 극 중 캐릭터 중 당연히 줄리엣을 더 좋아했다. 아마 대다수 어린이들이 그랬을 거다.
무엇보다 어린 내 눈에 금발의 착한 줄리엣이 너무 예뻐 보였다. 반면 다이애나는 검은 머리에 강한 인상 그리고 쥐를 한입에 삼켜버리는 끔찍한 행동이 섬뜩하게 박혀 도저히 아름다움을 논할 수 없었다. 내 눈에 다이애나는 사악한 악녀 파충류 그 자체였다. 아마도 누군가로부터 다이애나를 닮았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욕을 듣는 것과 같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친구 중 한 명이 드라마 V 얘기를 하다가 자신은 줄리엣보다 다이애나가 훨씬 예쁘다고 말해서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그녀의 말이 줄리엣은 너무 촌스럽다는 거였다. 나는 처음에 이 애가 미쳤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떻게 그렇게 못된 다이애나를 예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
아빠가 코미디언 배연정을 예쁜 얼굴이라고 할 때보다 더 놀랐다. 그리고 훗날 내 안목이 얼마나 볼품없었는지 하면서 좌절 했었다. 친구 말대로 줄리엣보다 다이애나가 더 예뻐 보였고 아빠 말대로 코미디언 배연정도 제법 미인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친구가 줄리엣이 촌스럽다고 했을 때 당시 나는 촌스럽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름다움의 기준을 냉정하게 비율과 매력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닌 선악으로 평가했던 애송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웃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예쁠 수도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웃기는 사람은 예쁘면 안 된다는 생각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친구의 나이답지 않은 세련된 안목은 타고난 것도 작용했겠지만 나는 비로소 나의 감각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관심을 갖는 만큼 주눅이 들었고 나의 태생적 안목에 자신감을 잃어갔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내 안목이 높아진 것인지 내 눈에 줄리엣은 코도 심한 들창코에 그저 평범한 미인에 불과했다. 반면 다이애나는 강렬하고 섹시하고 세련된 미인형이다. 그 친구 말대로 다이애나에 비해서 다소 촌스러워 보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친구의 취향이 세련됨을 기준으로 삼았다면 나는 단지 선악으로 미인을 규정한 유치한 안목을 지녔던 거다.
물론 선함도 미의 기준에 포함되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솔직히 그건 너무 진부한 잣대다.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마치 초등학교 시절에는 공부 잘하는 아이가 얼굴도 예쁘다고 생각하고 인기가 많은 것과 다를 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