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오랫동안 잠을 잤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공기가 낯설고 분주했다. 동생이 숨을 참은 듯한 표정으로 창문을 열더니 엄마가 다녀갔다고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이 하얀 벽. 덩그러니 침대 하나만 놓인 병실 같은 방구석이었다. 동생은 손님방을 왜 이렇게 꾸며놓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엄마가 다녀갔다고?"
나는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몸을 구겨 넣고 마른 눈곱을 떼어내며 동생을 지켜봤다. 그녀는 청소기를 돌려 집안 곳곳을 들쑤시더니 이어 씻는 소리가 났고, 화장을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짐을 싸고 있었다.
"어디 가려고?" "장진에." "장진까지 간다고? 지금 몇 신데?" "요즘 도자기에 금칠하는 게 유행이거든. 그거 배우려고." "뭘 그렇게 배우고 또 배워? 그거 다 상술이야. 저번에는 옻칠하는 거 배운다 하지 않았어? 곧 있으면 똥칠도 배운다 하겠다."
동생은 평소 내 출입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내 고질적인 부주의함 탓이다. 방문만 하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퍼붓는데,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는지 모르겠다. 동생은 엄마를 쏙 빼닮았다. 반면 나는 아빠를 닮았다고 했다. 아빠는 내가 네 살 때 죽었다. 퇴근길에 자전거로 폭이 좁은 철로를 건너다 추락사했다. 동네 사람들은 한결같이 예견된 사고라고 입을 모았다. 연거푸 같은 장소에서 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처음 추락했을 때는 흙이 잔뜩 덮인 둔덕에 고꾸라져서 운 좋게 살아났다. 그러나 아빠는 사람들의 경고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고, 기어이 같은 장소에서 떨어져 생을 마감했다. 그곳에 떨어져 살아난 사람도, 죽은 사람도 아빠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빠의 부주의함 때문인지 입방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런 성격을 물려받은 것만은 분명하다. 다행인 점은 건강한 신체도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바짝 긴장만 하고 살면 아빠 몫까지 더해 장수를 기대해봄 직하다. 그러니 건강 염려보다는 부주의와 입방정만 안 떨면 되는 거다. 문제는 건강에 자신이 넘쳐서인지, 아니면 부주의함이 도를 넘은 것인지, 내가 걸핏하면 폭음에 골초로 매사 건성으로 산다는 점이다. 어젯밤도 술이 떡이 되어 동생 집 벨을 눌렀나 보다. 누군가의 등에 업혔던 것 같은데 그 와중에도 엄마 집이 아니라 동생 집 주소를 댄 모양이다.
나는 엄마 집에 얹혀산 지 올해로 서른다섯 해째다. 엄마는 이런 나를 몹시 귀찮아한다. 자꾸 시집을 가라고 성화인데, 그건 요컨대 내 눈앞에서 꺼지라는 소리 아닌가. 그래서 할 수 없이 근처 사는 동생 집에서 종종 신세를 진다. 엄마는 그것마저 싫어한다. 갈수록 동생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무래도 동생이 결혼 후 용돈을 두둑이 챙겨줘서 그런 것 같다.
동생은 이 년 전 돈이 아주 많은 남자와 결혼했다. 덕분에 동네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에 산다. 참고로 친정 근처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동네에서 제일 좋은 집이 우연히 친정과 가까울 뿐이다.
엄마 집은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단층 주택이다. 고층 아파트가 득시글한 우리 동네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흉물이다. '어쩌다가 이런 집이 아직도 남아 있지?' 하는 의구심이 절로 드는 곳이다. 누가 보면 보상금을 노린 '알박기'라 오해할 법하지만, 실상은 그저 고집 세고 생뚱맞은 낡은 집일 뿐이다.
"이래 봬도 당시에는 동네에서 제일 처음 생긴 신식 주택이었어. 처음에는 괜찮았지."
엄마는 "두고 봐라, 얼마나 오를지" 하며 이를 갈았지만 웬일인지 엄마 집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빠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어느새 동네에 마천루 같은 빌딩과 아파트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엄마 집은 외관뿐 아니라 내부도 궁색했다. 물이 찔끔찔끔 새는 화장실엔 뚜껑 없는 변기와 욕조 없이 초라한 세면대만 있었다. 타일 사이로는 세월만큼이나 묵은 때가 끼어 있는 데다가 외풍까지 심했다. 겨울에는 입김이 서렸고 여름에는 한증막이 따로 없었다. 에어컨은 있을 턱이 없고 선풍기는 강도를 높일수록 더운 바람만 토해냈다.
언제부터인가 내 친구들은 죄다 잘 살았다. 갑자기 부자가 된 친구, 원래 부자였던 친구, 갈수록 부자가 된 친구. 그리고 동생은 결혼 후 부자가 되었다. 정확하게는 부자 남편을 만났다.
"돈 많은 여자들이 유독 배움질이 많은 걸 보면 그게 다 끼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너는 도자기 공부한다면서 도자기랑 바람난 거 아니냐?"
동생은 내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나를 무시하는 건가. 모르겠다. 동생은 내게 시리얼을 챙겨 주었고 먹자마자 함께 현관을 나섰다. 헐레벌떡 따라나서는 내 꼴이 조금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은주 언니 이 근처로 다시 이사 왔다 하지 않았어?" "응. 그랬다고 했어. 새로 지은 '별라지오' 아파트." "흥. 거기 별로 좋지도 않은데. 비싸기만 하고." "별걸 다 시샘하네. 니 아파트도 훌륭해. 니 나이에 이런 좋은 집에 사는 게 어디 흔한 일인 줄 알아? 그리고 은주는 원래 돈이 많은 집 애잖아."
동생은 나를 흘겨보았다. 동생이 벌써 자신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망각한 것일까.
"니 말대로 은주한테 전화나 해봐야겠다. 온 김에 들렀다 가지 뭐. 근데 지금 몇 시냐?" "오후 네 시 좀 넘었어." "벌써? 온종일 잠을 처자고 있었네. 근데 넌 막차를 타고 가려나 보지? 꽤 늦게 출발하네. 그나저나 학교 선생들은 일찍 퇴근하지?" "은주 언니 은행 다닌다고 하지 않았어?" "영어 교사 하고 있어." "그 언니는 재주도 좋아." "걔가 머리가 좋잖아. 운은 더 좋고. 근데 사실 교사가 뭐 좋은 직업인가?" "편하고 안전하잖아. 그 언니가 뭐 돈 벌려고 학교 나가겠어? 그냥 애 보기 싫으니까 나가는 거겠지." "엄마는 전문대 나오고도 교사했었잖아. 명문대 나온 애가 무슨 교사야?" "세상 물정 모르긴. 그때가 언제 적 일인데. 나 아는 사람은 명문대 박사 학위까지 따고서도 고등학교 기간제 교사밖에 못 하고 있다고." "기간제는 또 뭐야?" "무식해서 대화를 못 하겠네." "기집애. 예술 하는 사람이 그렇지." "예술은 개뿔. 네일 아트가 뭐가 예술이야? 손톱에 매니큐어 칠해주는 게 무슨 예술이냐고." "아트 맞잖아. 네일 아트. 손톱 예술."
그렇게 말해 놓고서 빈정이 상한 쪽은 나였다. 도대체 나의 직업과 정체성은 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 직종인 줄 알고 구인란을 살펴보면 그곳에는 변호사, 의사들만 가득했다. 네일 아티스트는 서비스 업종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왜 아티스트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젠장. 네일 아트는 대체 왜 배운 걸까. 손톱 가는 소리도 질색하면서.
동생과 헤어지고 나는 조금 망설이다 은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주는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물었다. 설마 내가 돈을 꾸어 달라고 할까 봐 그런 걸까. 여하튼 은주와 나는 오후 여섯 시에 별라지오 아파트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일찍 도착해 그녀를 기다렸고, 은주 역시 약속 시간 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고교 시절처럼 요란하게 인사를 나눴다. 오 년 전 은주의 결혼 후 처음 만나는 거였다. 물론 문자는 가끔 주고받았지만, 대면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은주는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고,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은주의 집에 들어갈 생각뿐이었다.
로비 층에서 은주는 누군가와 짧은 인사를 나눴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38층을 눌렀다. 확실히 동생 집보다는 고층이었다. 그러면 조금 더 부자가 맞는 거겠지. 은주가 현관문을 열자마자 나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어야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기도 했다. 학창 시절 교복을 입고 은주네 집에 가면 난 항상 편한 옷으로 갈아입곤 했기 때문이다. 은주는 그 기억이 소거된 사람처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거나 난 불편한 것은 딱 질색이라 옷을 갈아입는 게 시급했다. 은주는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초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실내가 어두컴컴했다. 방으로 향하는 복도는 더 어둑했다. 옷방에 도착했는데도 은주는 방의 불을 켜지 않았다. 은주는 문을 반쯤 열어 놓고 나갔다. 나는 가져온 쇼핑백을 뒤져 헐렁한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그런 사이 은주는 네 살 정도 된 딸을 데리고 왔다.
우리가 못 본 사이 태어나고 자란 은주의 딸이다.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데려온 줄 알았더니 방바닥에 놓인 낡은 텔레비전을 틀어주기 위해서였다. 텔레비전은 옷장 옆 골프 가방과 잡다한 액세서리들 사이에 마치 버려진 짐짝처럼 처박혀 있었다.
"고장 난 텔레비전인데 화면 조정 시간 화면만 나와. 얘는 그것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보고 있더라. 소리를 좋아하는 건지 화면을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면서 은주는 텔레비전을 켰다. '띠잉' 하는 기계음이 뇌를 긁는 듯한 소리와 함께 초록, 파랑, 빨강의 세로줄이 그어진 낯익은 화면이 떴다. 아이는 애초부터 나와 눈을 마주칠 생각도 없었다는 듯 나를 비껴가더니 텔레비전 앞에 넋을 놓고 앉았다.
"웃기지? 바쁠 때는 어쩔 수 없이 이 방법을 써. 그래야 한숨 돌리거든. 이 아이는 틀어주면 하루 종일도 보고 있을 애야.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닌지 모르겠어."
은주네 집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갈증이 나듯 불빛에 목이 말랐다. 그러나 은주는 불을 켜는 법을 잊은 사람 같았다. 게다가 은주 집은 미로처럼 동선이 꼬여 있었다. 넓고 심플한 동생 집과는 사뭇 달랐다. 요즘 아파트 트렌드는 이렇게 바뀌었나. 구불구불한 복도 사이로 굳게 닫힌 문들이 몇 개나 되는지 몰랐다. 저 많은 문 중 하나를 열면 낭떠러지로 추락할 수도 있겠다는 섬뜩한 상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 돌연 나는 은주에게 물었다.
"니 남편은 어딨어?"
하긴 평일인 데다 퇴근하기도 이른 시간인데 남편이 있을 턱이 없지. 그걸 알면서도 나는 왜 물었을까. 아차, 싶었다.
"남편은 자고 있을 거야." "무슨 소리야. 이 시간에 잠을 잔다고?" "알고 물어본 거 아니었어? 하긴 니가 알 리가 없었으려나."
은주는 나를 후미진 거실로 안내했다. 우리는 기다란 복도 끝을 걸었고 마침내 나타난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그녀의 남편을 보았다. 그는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불도 안 켜고 텔레비전만 켜 놓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시청한다기보다 그저 조명 대신 켜 둔 것 같았다. 그는 아침부터 줄곧 그 자세였던 것처럼 소파 깊숙이 파묻혀 있었다. 어스름한 저녁, 브라운관의 푸른빛만이 유령처럼 번지고 있었다. 은주 남편은 영락없는 백수 꼴이었다.
"안녕하셨어요?"
은주 남편은 어둠 속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내게 웃었다. 그러나 자세는 여전히 비스듬히 누운 채였다. 제발 불이라도 켰으면 했지만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은주는 내 뒤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은주 남편을 잘 알고 있었고 그녀 남편 또한 나를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환한 미소는 박제같이 정형화된, 그저 단순히 누군가를 맞이할 때나 짓는 기계적인 미소였다. 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이제 주방으로 갈까?"
나는 은주를 따라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걸어갔다. 은주는 음식을 장만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뭔가 큰일이라도 난 듯 분주한 표정이었다. 설마 나를 위해서? 내심 기대도 했었다. 주방 문을 여니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아서 더 놀랐다. 왜 이 집은 주방만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 둔 걸까. 은주는 냉장고 문을 여닫으며 수선을 떨었다. 그러더니 어디선가 낯선 여자가 나왔다. 은주네 집은 어디서 이렇게 사람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혹시 나한테서 술 냄새나니?" "아니. 왜 낮술 마셨어?" "아니. 모르겠어."
은주는 내 얘기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맞은편 여자를 보며 나를 소개했다.
"내 친구 채은봉. 고교 동창."
여자는 내게 눈인사만 건넸다. 그 모습이 끔찍하게 교양 있어 보였다. 여자는 일종의 견제와 경멸이 섞인 시선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연보라색의 목 늘어진 헐렁한 원피스 차림을 한 나를 보며 누구라도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내 동생도 나의 이 원피스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갑자기 나는 없던 주눅이 들었다. 나도 재빠르게 여자를 탐색했다. 얼굴도 예쁘고 일도 안 하고 부잣집에 시집간 좋은 팔자로 보였다. 억세게 운 좋은 여자 같으니라고.
"갑자기 뭘 준비하지? 큰일이네. 콘셉트가 뭐라고? 그릇이 마땅한 게 없는데. 자기네 집에는 그 콘셉트 그릇 있지?"
듣자 하니 파티를 하려나 보다. 설마 나를 위하여? 그래서 나는 일부러 잠자코 있었다. 마치 연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유령이 된 기분이었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은주의 분주함은 나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 가족과도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적어도 그런 눈치는 있었다.
"나는 그만 가봐야겠어." "어. 그럴래?"
'벌써?'라는 만류를 기대했던 걸까. 내가 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은주는 특유의 귀엽고 조심스러운, 맑은 표정으로 나의 퇴장을 반기고 있었다.
"옷 다시 갈아입고 나올게."
나는 왜 남의 집에 와서는 오자마자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다고 설레발을 쳤던 걸까. 눈부시도록 밝은 주방에서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려니 장님이 따로 없었다. 집안이 왜 이렇게 어두운지 이해가 안 갔다. 방에 도착하니 아이는 여전히 꼼짝도 안 하고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다. 저러다 눈이라도 멀면 어쩌려고 참. 나는 차마 아이에게 말은 못 하고 아이 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원피스를 훌렁 벗고 그것을 개어 쇼핑백에 도로 넣었다. 갑자기 입고 온 줄무늬 상의가 안 보였다.
"어. 내 상의가 어디 갔지?"
나는 상의를 찾으려 옷더미를 뒤적거렸다. 점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좀처럼 방에서 나오지 않는 내가 궁금했는지 은주가 들어왔다.
"뭐 해?" "아니. 내 상의가 암만 찾아도 없네. 분명히 여기 올려 두었는데." "잘 찾아봐."
은주도 불을 켤 경황이 없었나 보다. 나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은주의 옷가지들을 파헤쳤다. 도대체 왜 이 상황에 옷이 없어진 거냐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는 순간 아이를 의심했다. 설마 저 아이가? 하긴 화면 조정 화면에 넋을 잃고 있는 아이가 제정신이겠는가. 분명히 저 아이가 어디다 숨겨 놓은 거다. 나는 옷을 찾는 시늉을 하면서 아이를 쏘아보았다. 아이는 미동도 없이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은주는 문지방에 발을 올리고 팔짱을 낀 채로 서 있었다. 아무래도 아이가 범인인 것 같다고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아. 맞다. 벌써 입고 있었네."
차마 은주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은주가 나를 도둑으로 의심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건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옷을 입고 있으면서 옷을 찾고 있다니. 내 정신이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 나는 도망치듯 은주를 따라 나왔다. 어쩌면 끌려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쫓겨나는 기분과 탈출하는 기분이 뒤섞였다.
"참, 니 신랑한테 간다고 인사는 해야지."
나는 은주의 남편이 누워있는 어둠 속을 쳐다보았다.
"아니, 안 해도 돼."
은주의 말투가 처음으로 차갑고 단호했다. 창밖은 아직도 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현관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신발이 말썽이었다.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현관이 신발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부터 이랬나. 기억이 헝클어졌다. 손님들이 와 있나? 그러나 어디에도 그 많은 손님의 인기척은 없었다. 은주의 집은 여전히 무덤처럼 어둡고 조용했다. 나는 몸을 잔뜩 낮추고 냄새를 맡듯 신발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 갔지? 내 신발이."
은주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잘 찾아봐. 무슨 색상인데?" "파란색. 누가 신고 갔나 봐." "나간 사람이 없는데 누가 신고 갔겠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긴장한 탓인가 보다. 친구 앞에서 긴장할 이유가 뭔지 모르겠지만. 나는 신발이 보이지 않아, 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한다면 은주가 나와 절교를 선언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점점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할 수 없지 뭐. 나 따로 가지고 다니는 신발이 있어. 그거 신고 가면 돼."
나는 가져온 쇼핑백에서 신발을 꺼냈다. 그것을 바닥에 툭 하고 떨어뜨리자 은주는 나를 더욱 기이하게 쳐다봤다. 그것은 내가 찾던 바로 그 파란색 샌들이었다. 나도 무언가 항변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은주는 친절하게도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우리가 타고 온 엘리베이터 맞은편에 통유리로 된 또 하나의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은주는 그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들뜬 말투로 속삭였다.
"이 동네 여자들은 매일 일하고 온 나만 기다렸다가 파티를 벌인다니까. 오늘은 갑자기 우리 집에서 파티를 한다잖아. 내가 알고 있던 건지 갑자기 정한 일인지 경황은 없지만 한두 번이라 말이지. 여기 사람들은 그 재미로 살아."
나는 은주가 도통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슨 파티를 하고 무슨 재미로 산다는 건지. 그런데도 은주는 신이 나서 말을 이어갔다. 기괴했지만, 은주가 신이 나서 말하는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간 착각이 들었다.
"이 아파트 여자들은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몰라서 막 주체가 안 되나 봐. 뭐 일종의 홈 데코 놀이 같은 거야. 중세 시대 귀족 같은 놀이. 옷도 막 갈아입는다니까. 아까 그 여자네 집은 그리스 시대 목욕탕을 그대로 재현해 놨어. 뭐,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지만 얼추 그럴듯해."
나는 실없이 웃기만 하였다. 은주는 학창 시절에도 인기가 많았다. 성격이 좋으니 이웃 여자들이 함께 놀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다.
"나는 도통 이해가 안 가네. 재밌긴 하겠다만." "그런 게 있단다. 엘리베이터 이걸로 타. 이거 고속 하강해서 완전 스릴 있어."
문이 열렸는데 엘리베이터 입구의 벌어진 틈이 일 미터는 족히 되는 것 같았다. 그 사이로 까마득한 바닥이 보였다. 순간 나는 아버지가 떨어졌던 그 절벽 위에 선 기분이 들었다.
"아. 싫어. 건너다 떨어질 것 같아. 난 무서워서 도저히 이건 못 타겠어."
대체 이 끔찍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사람이 있기나 한 걸까. 차라리 자이로 드롭을 타고 말지.
"그럼. 할 수 없지."
나는 황급히 옆에 있는 일반 엘리베이터의 내림 버튼을 눌렀다. 순간 은주를 지나치게 오래 기다리게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들어가 봐. 사람들이 기다리잖아." "그럴까? 그래, 그럼 조심히 가고 또 보자."
나는 손을 흔들며 은주에게 인사했다. 은주의 표정은 밝고 다정해 보였다. 은주는 계속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은주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웃기만 하였다. 그녀가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예전과 똑같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하강하는데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럽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 거의 다 도착했다. 빨리 문이 열렸으면 좋겠다. 귓속에 텔레비전 화면 조정 효과음이 환청처럼 맴돌았다.
띠잉, 띠잉. 소리가 내 머릿속을 긁으며 붉고 푸른 줄무늬를 긋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