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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체 May 22. 2024

먼지의 생각

인형 뽑기 기계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다. 그 사람은 꽃무늬 바지를 입고 손톱은 초록색으로 빛났다. 펌이 거의 풀린 푸석해 보이는 갈색의 긴 머리에 야구 모자를 쓰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165센티미터 남짓의 이 사람은 어딘가 부실해 보이는 모습이다. 부실함에는 애정과 영양이 포함된다.

 나는 빨래방에서 건조가 다 되길 기다리는 중이다. 얼마 전부터 빨래방을 이용하고 있다. 드럼 세탁기를 제대로 청소하지 않으면 폭발 위험이 있다는 친구의 문자를 받은 이후부터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청소대행업체의 연락처도 알려 주었다. 세탁기를 청소하는 데 십만 원에서 이십만 원 안팎의 비용이 든다고 하였다. 일상에서 세탁기가 폭발할 확률은 몇 프로일까 생각해 봤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이십만 원 안팎의 비용을 지불해 가며 유난을 떨 필요가 있을까. 하긴 재수 없기라면 나를 따를 자가 없었다. 게다가 세탁기가 터져서 죽었다는 뉴스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세탁기 청소가 내키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그 말을 전해 준 친구를 원망했다. 몰랐으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알았기 때문에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게 싫고 두려웠다. 그것이 빨래방을 이용하게 된 계기다. 세탁기 폭발에 관한 불안감에서 벗어나거나 청소대행업체를 부르지 않는 한 당분간은 빨래방을 계속 이용할 작정이다.

  유리벽으로 된 빨래방에 앉아 있으면 동네 사람들을 관찰하는 cctv가 된 기분이다. 워낙 특색 있는 동네라 사람 구경하는 것이 꽤나 재밌다. 맞은편에 있는 편의점에선 육중한 몸집의 화장기 없는 사람이 인상을 쓰면서 나오고 있었다. 마주 비치는 햇살에 얼굴이 찌푸려졌는지 본래 인상이 그러한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대체로 사람들이 화장을 안 할 땐 인상을 잘 쓰고 있는 편이니까. 혹은 인상을 쓴 것처럼 보이는 것 일수도 있겠다. 그 사람은 캔 커피 하나를 들고 천 원짜리 몇 장을 세고 있었다. 거스름돈을 확인하는 차원이 아닌 수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를 계산하는 모양새다. 그리고는 좀 전의 꽃무늬 바지를 입은 사람에게 돈을 건네주었다. 돈을 건네준 사람은 한눈에 봐도 꽃무늬 바지를 입은 사람보다 예닐곱 살은 많아 보였고 꽃무늬 바지를 입은 사람은 능력이 없는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고 화장을 하지 않은 여자가 돈이 많아 보이는 것도 아니다. 똘이와 나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듯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그들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밖에서도 우리의 모습이 보였을 테지만 그들은 주변 것들에는 도통 관심 없는 사람들처럼 초점이 희미했다. 꽃무늬 바지를 입은 사람은 화장하지 않은 여자가 준 돈으로 인형을 뽑기 시작했다. 잘 나거나 못나거나 인형을 뽑고 있는 사람들은 조금 한심해 보인다. 유흥가 근처도 아니고 동네 어느 귀퉁이에 설치된 곳에서는 더욱 그렇게 보인다. 단순하게 취미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형 뽑기조차 절박함이 묻어난다.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딱 두 판. 둘은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돌아갔다. 장난처럼 웃는다거나 몹시 아쉬워한다거나 하는 따위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습관처럼 길에 서서 담배를 한 대 물듯 인형이 뽑히지 않는 게 당연하다는 그러한 무심함이었고 그 모습은 몹시도 익숙해 보였다.

 두 사람 이외도 물론 엑스트라처럼 등장하는 몇몇의 사람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파지를 줍고 있는 늙은 사람과 유모차를 끌고 우울증 일보 직전의 표정으로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젊은 사람, 그리고 요구르트를 파는 사람이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저 세상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의 미약한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 거니까 크게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똘이는 느닷없이 지나가는 어떤 사람을 향해 마구 짖었다.

 "똘이! 아빠 아니라니까."

 그러나 똘이는 좀처럼 믿지 않는 눈치이다. 똘이가 발버둥을 치며 난동을 부리는 사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리모컨을 건드렸나 보다. 벽면에 설치된 텔레비전이 켜졌다. 텔레비전에는 오래 전의 토크 쇼가 나왔다.

  “내가 가출을 왜 해? 집에 부모가 없는데"

 어이없게 웃다가 일순 멈췄다. 부재가 나의 일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없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의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다. 눈앞에 보이지 않고 마음에서 느껴지지 않으면 그것도 죽은 것으로 간주하면 되는 것 아닐까. 그렇게 따지면 죽음은 두려운 것보다 공허한 것으로 생각하면 그만이다. 비어졌으니 조금 홀가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이 슬퍼하고 괴로워해야 할 일만은 아닌 거다. 더군다나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어 있다.

 죽음이란 그냥 사라지는 것. 그냥 사라지는 것뿐인데.

 죽으면 죽는 거지. 갑자기 별 일이다 싶게 찾아온 허무함이 발동하여 죽는 일이 별개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용기가 생겼다. 물론 세상은 나를 충동적인 자살자로 몰고 갈 테지만 어차피 삶이란 숱한 충동의 연속과 반복으로 살아가는 거 아닌가. 왠지 이렇게 순간적으로 찾아온 죽음을 회피하고 싶지 않다. 그러자 가슴이 무척 뛰었다. 나는 건조대에서 막 꺼낸 아직 뜨겁게 온기가 남은 옷가지와 똘이를 함께 집 안에 던져놓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가슴이 미칠 듯이 뛰고 그것은 젊은 날의 열정이 되살아난 듯이 새로운 기분이었다. 게다가 기막히게 좋은 날씨. 자살하기에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십 미터 이상 층 수 이면 살아날 가망은 희박하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옥상이 폐쇄되어 있다. 개방되어 있다 해도 살던 집에서 뛰어내리고 싶지는 않다. 아무래도 집에서는 충동이 기를 못 펴기 때문이다. 나는 눈대중으로 그만한 높이의 건물을 찾아보았다. 갑자기 건너편 다세대 주택 옥상이 떠올랐다. 창문 밖을 내려보면 그곳의 일상이 한눈에 보이곤 했다. 세입자들이 수시로 옥상을 드나들며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빨래를 널기도 하고 여름에는 아이들이 대야에서 물놀이를 하는 모습도 보았다. 어떤 날은 모여서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고 고스톱을 치기도 했다. 언젠가 한 번은 남편이 집어던진 핸드폰이 철창 사이를 뚫고 그리로 날아가 주우러 간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핸드폰은 열린 간장독에 빠졌고 몇 번이나 손을 넣어 꺼내보려 시도했으나 무슨 소리인가 싶어 올라온 노인의 의심하는 눈초리 때문에 머뭇거리다 돌아왔었다. 결국 간장독에 빠진 핸드폰은 꺼내지 못했다.  누군가 그곳에서 간장을 담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누군가는 핸드폰이 빠진 간장을 먹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집에서 직접 담근 간장이라며 여러 사람에게 나눠 주었을지도 모른다. 간장독을 비울 때 즈음이면 핸드폰은 삭아빠지고 없겠지. 반드시 그래야 할 텐데. 남편은 그 모습을 보며 좋아라 하며 히죽거렸다.

  나는 옥상으로 부리나케 올라갔다. 그리고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뛰어내렸다. 조금만 머뭇거렸어도 곧바로 떨어질 엄두는 못 내었을 거다. 나는 워낙 겁이 많은 사람이니까.

얼굴로 바람이 훅 끼치며 들어왔고 막힌 곳이 뚫린 듯 난생처음 가져 본 홀가분함에 잠시 웃었던가 보다. 순간 가족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빠는 얼굴도 모르고 엄마는 몇 년 전 치매로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남동생은 내게 이천만 원을 빌린 후 종적을 감추었다. 남편은 보름 째 전화도 없고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 내 앞으로 보험이나 적금조차 들어둔 게 없다. 물론 모아둔 현금이나 금덩어리도 없다. 여러모로 남편에겐 상당히 귀찮은 죽음이 될 것이다. 순간 옆집에 사는 사람이 떠올랐다. 초췌한 몰골의 옆집 사람은 암투병 중이다. 십 년 전에 걸린 암이 재발했다고 한다. 첫 번째 암에 걸렸을 때 완치가 된 후 건강을 자신하며 술을 물처럼 마시며 살았다. 재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술을 끊었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낙관적이었다. 낫는다 해도, 그렇지 않다 해도 좀처럼 죽어지지 않는 게 사람 목숨이라고 했다. 오래 전의 어떤 배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배우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며 온갖 매체를 장식했었다. 자식들을 미리 유학 보내며 이별 여행을 시켰고 자신도 곧 죽을 것임을 세상에 알리며 이별을 고했었다. 그러나 이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 배우는 여전히 살아있다. 수술을 해서 나았고 건강하게 회복된 것이다. 당시에는 의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죽는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그런 기사는 여성지 맨 뒤 칸에 아주 조그맣게 몇 자로 실렸을 뿐이다. 그 사람은 다시 무명 배우로 전락하였다. 병에 걸려서 죽는 일보다 사람들에게 잊히는 일이 그 배우에게는 더 쓸쓸했을 것이다. 어쨌든, 죽음이란 무턱대고 준비한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닌 거다. 엄마는 치매에 걸리기 전 병약한 몸을 탓하며 빨리 죽어야지 했지만,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찾아다니면서 먹곤 했다.

  애초부터 나는 실타래로 뒤섞인 섬유 공장 구석에서 남몰래 탄생했던 때처럼 죽음도 그렇게 별 볼일 없이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수백 번도 더 확신했었다. 대단한 탄생이 아니었기에 죽음 역시 아침에 똥을 싸다 욕조 구석에서 기어 나오는 바퀴벌레를 슬리퍼로 내리쳐서 죽였던 것처럼, 그런 신세의 바퀴벌레처럼 난데없고 쓸쓸하고 조용하게 죽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었다. 모든 걸 체념하니 이토록 자유로운 걸, 이라는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땅에 고꾸라져 두개골이 박살 났다. 너무 아파 아픈 줄도 모를 정도의 고통을 안고 쿵 소리와 함께 수박처럼 깨져 버렸다. 철퍼덕한 이 기분은 뭐지? 그럼에도 아직 심장은 뛰고 있고 머리는 여전히 생각을 하고 있다. 박살 난 얼굴의 입가는 나도 모르게 경련이 일어났다. 의식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또 지난 일들이 생각난다.

엄마.

요양원에 있는 엄마는 이제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만나는 간병인마다 남편을 찾아주면 1억을 주겠다며 떠들고 다녔다. 더는 감상에 빠지기 싫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엄마의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눈물이 나온다. 입안에 점점 무언가가 가득하게 차오른다. 하지만 벌어진 입은 다물 수가 없다. 비릿한 무언가가 내 얼굴을 덮고 있다. 등에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신경 세포도 몇 개 살아있어 묘한 통증이 별나다 싶다.


  몇 시쯤 되었을까. 아마도 오후 세 시를 넘긴 시각일 게다. 맞은편 건물에 다리를 저는 세탁소 주인이 떨어진 물체를 보러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게 보인다. 전에도 고양이가 차에 치어 이 자리에 나동그라진 적이 있는데 그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여기고 있는 듯하다. 세탁소 주인의 표정에는 귀찮은 죽음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연극의 2막 1장 같은 기묘한, 좀 전에 보았던 커플이 등장했다. 그들은 왜 여태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어슬렁거리고 있는 걸까. 그 와중에도 궁금하고 짜증이 났다. 꽃무늬 바지를 입은 사람은 내 곁으로 황급히 뛰어오며 나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그렇게 조용하던 동네가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달팽이 같은 집 속에 갇혀서 모든 걸 훔쳐보며 응큼하게 숨어 살던 사람들. 나는 나조차도 알아듣지 못할 말 몇 마디를 웅얼거렸다. 그게 내 입에서 나온 마지막 유언이지만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거란 것도 알고 있다. 비로소 하찮은 고양이의 죽음이 아닌 사람의 죽음임을 알게 된 세탁소 아저씨는 손을 덜덜 떨면서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이미 꽃무늬 바지를 입은 사람이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중에 세탁소 주인은 자신의 느린 걸음을 원망하게 될 날이 올까. 혹은 자신의 불손했던 심보를 반성하러 교회에 나가게 될까. 쓸데없이 그런 것마저 궁금해진다. 세탁소 주인의 안색이 무척이나 안 좋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큰지 아는 눈빛이다. 절름발이가 된 다리는 선천성이 아닌 과거의 언젠가 누군가에게 잘렸던 모양이다.

  꽃무늬 바지를 입은 사람의 목소리는 예상했던 대로 투박하고 촌스럽다. 이젠 정말 사라지려는지 점점 심장이 시큰해져 온다. 속도가 멎는 소리가 들린다. 나의 머리는 아직도 이렇게 잡념 가득하며 멀쩡한데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는다니 그것도 죽음에 대한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소위, 나는 죽은 것이다. 꽃무늬 바지를 입은 사람이 나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다.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서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께름칙하다.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웃음을 꾹 참고 있다. 실제 나는 이토록 멀쩡한데 왜 다들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호들갑을 떠는지 멋쩍기만 하다. 꽃무늬 바지를 입은 사람은 나를 한 번 더 흔들어 본다. 그럴수록 나는 더 웃음이 나온다. 나는 어쩌면 죽은 척하고 있는 건지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내가 들 것에 실려 가는 것 같고 어디선가 나를 아는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고 지나고 있는지 도통 가늠하기 어렵다. 막연하게 지루한 것 같기도 하고 지나치게 빨리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내 부릅뜬 눈을 감겼으나 나에겐 여전히 사물들이 보인다. 그러나 이내 세상은 하얗게 막이 쳐진 것처럼 예쁘고 뿌옇게 보였다. 누군가 나에게 흰 천을 덮어두었기 때문이다. 영원히 이런 상태로 세상을 보게 되는 걸까. 조금 답답하다. 조금 있으려니 흰 천이 걷히고 나를 내려 보는 남편이 눈에 들어온다. 젠장. 내 얼굴은 반쪽이 깨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으니 슬프다기보다 끔찍하다 앞섰을 것이다. 남편의 표정에서 공포가 읽힌다. 남편은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절규하는 모습이다. 나도 일순 가슴이 아팠고 눈물이 나오는 것 같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며 나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눈치다. 그가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우리가 한 때 미친 듯이 사랑했을 때 했던 터무니없는 약속을 말이다. 우리는 같은 날 죽기로 했었다. 그러나 무언가 우는 형색이 점차 이성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눈물을 훔치는 그의 손톱이 투명하게 반짝거린다. 나의 무모한 죽음에 그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해도 해도 안 되는 사업에 더는 도와주지 못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순간, 그가 이미 늪처럼 빠져버린 그 일에서 선뜻 손을 뗄 거라 기대했던 걸까. 그는 돈을 벌 능력은 부족해도 돈을 뜯어내는 재주하나는 타고났다. 어느 틈엔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의탁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선물했다며 잔뜩 칡즙을 이고 올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주제에 그러겠나 싶은... 방심을 하고 말았다. 남편이 만나는 사람은 화장기 없는 푸석푸석한 얼굴항시 부어 있었고 곱실거리는 펌 헤어는 부스스함이 지나쳐 보였다. 그런 사람에게도 성욕이 있긴 한지. 그는 그런 사람에게 부쩍 공을 들였고 나는 찜찜함을 참지 못하여, 참다 참다 겨우 물어보았다. 혹시. 너... 그는 내게 단지 조력자일 뿐이라고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투자금을 받을 수 있다며 믿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래, 그 말이 사실이겠지. 그래도 그렇지.  그에게서 벗어나거나 죽거나 죽이거나... 극단적인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죽음과는 상관이 없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내 모습은 그가 만든 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죽을 만큼 대단한 사랑은 아니었다고. 나는 조금 답답해서 그 자리에서 당장 일어나 눈이라도 뜨고 싶은 심정이지만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으니.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절대로 말을 아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거다. 듣는 일은 죽고 난 뒤에도 실컷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람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평생토록 말을 아끼지 않고 쉴 새 없이 떠드는 일 것이다. 그렇다고 영혼이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죽는다는 것은 영원한 정체를 의미했다. 나는 오직 생각만 할 뿐이다.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으면서 생각 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죽음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정도이니.

  이어서 소란한 방문의 연속이다. 급하게 장례를 치르느라 다들 슬픔보다는 경황이 없어 보인다. 피투성이가 된 나의 몸은 누군가 정갈하게 다듬으며 닦고 있다. 아무 느낌이 없으니 그것조차 좋다 싫다, 로 표현도 못 하겠다. 그저 다음 순간이 기다려질 뿐이다. 그리고 난 어딘가에 안치되었다. 장례식장 병풍 뒤에 누워 있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정작 지인들의 방문도 소란스러운 곡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는다. 내 옆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누워있다. 우리는 서로 말을 할 수도 생각을 들을 수도 없다. 그냥 존재만 할 뿐이다. 죽은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은 침묵의 세계다. 죽음이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여서 사람들이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했던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이런 것을 끝이라고 해야 할지 난감하다. 나는 점점 더 몽상만 가득해질 뿐이다.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예상했던 대로 화장터로 가고 있다. 흙에 묻혀도 바다에 뿌려져도 아무런 겁이 나질 않았다. 낯선 목소리가 들리고 남편의 흐느끼는 소리 그리고 지인들의 미세한 곡소리가 들렸다. 순간 벌떡 일어나고 싶었다. 답답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다고 말하고 싶은 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처음으로 후회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가루가 되었다. 잠잠하다 무언가 툭 터지는 소리가 났고 여하튼 불길 속의 미묘한 소리는 난생처음 들어 본 신비로운 소리임이 분명하다. 불에 타 죽는 기분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리의 느낌이 좋았다.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가루가 되어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내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어디엘 가도 이런 적막함은 지속될 거다. 내가 아는 이들의 목소리는 점차 들리지 않았다. 나는 줄곧 생각만 하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지도 모르겠고 누가 날 찾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이쯤이면 하늘에서든 지하에서든 누군가 나를 데리러 와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사후 세계란 인간이 만들어 놓은 허무맹랑한 얘기일 뿐이었다. 비누거품처럼 몽실몽실 공중에 붕 뜬 기분이 들긴 하지만 어딘가로 향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바닥에 안착할 것 같지도 않다. 그냥 나는 먼지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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