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설 모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체 May 31. 2024

한국에서 온 영숙이


아주 오래전에 알던 한국 여자의 본명은 김영숙이다. 그 시절의 영숙이는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모든 한국 여자의 이름이었을 수도. 더군다나 우리가 아는 영숙이는 생김새도 비슷했다.


"너도 영숙이 만났었어? 검고 긴 머리에 눈이 쫙 찢어지고 눈 밑에 아이라인 문신을 했었지?" "내가 만났던 영숙이도 그랬어. 윗입술이 조금 얇았지만 툭 튀어나왔고 앞니가 유독 두드러졌어." "목이 길었던가? 내가 만났던 영숙이는 목이 유난히 길었던 걸로 기억해." "내가 만난 영숙이도 그랬어. 머리를 묶으면 뒷목에 한자가 새겨져 있었어." "그래? 그게 한자였어? 난 새 그림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 그냥 날개였던가." “작고 갸름하고 좀처럼 늙지 않는 신기한 여자였지.”


녀석들 말 중에는 거짓인 경우가 태반이었을 것이다. 여자 문제에 관해서라면 특히 과장이 심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한국에서 온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들 중 이름이 영주이었을지도 모르고 영신이었을 수도 있다. 명숙이나 정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귀에는 영숙이란 이름이 익숙하게 들렸다. 물론 아주 오래전에 있던 일이다. 우리가 비교적 젊다고 자부하며 다니던 시절, 쾌락도 하나의 멋으로 간주하던 그 시절의 이야기 말이다. 그때의 영숙이는 다들 어디로 갔을까. 하긴 케이티 혹은 에이미나 클라라란 이름으로 불리는 한국 여자라 해도 그때의 영숙이와 달라 보이는 건 아니다. 내 눈에 비친 동양 여성, 특히 한국 여성은 모두가 영숙이처럼 보였다. 그런데 영은 그동안 알던 영숙이와는 조금 달랐다. 그녀의 외모 그리고 몸짓이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어디에도 주눅이 드는 법 없이 당당하고 성격도 유달리 밝았다. 영은 그냥 영이었다. 우리의 영숙이와는 다른 영.


내 이름은 코헨이다. 풀 네임은 코헨 툴버럼 프란체스코 이지만 간략하게 코헨으로 불린다. 내 이름 스토리에 관해 특별히 물어오는 이도 없고 나도 굳이 덧붙여 설명을 해주고 싶지 않다. 더군다나 내 발음은 시원찮아서 더 물어봤자 못 알아들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젊을 때도 비음이 많이 섞여서 발음이 분명하지 않은 편인데 나이를 먹을수록 억양 및 발음이 더 어눌해지고 있는가 보다. 나는 뉴욕에서 태어나 철도 기관사로 오랫동안 일하다 삼 년 전에 퇴직하였다. 이탈리안 출신 이민자인 아버지는 로리타에서 나를 낳았고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자유의 여신상을 스쳐가는 올드 타운으로 이사한 건 은퇴를 할 무렵이었다. 그것도 나름의 사연이 있긴 하다. 지금도 그 일 때문에 와이프에게 잡혀 사는 일만 생각하면 아찔하다. 옆집에는 나와 같은 처지가 된 이웃이 살았다. 그의 이름은 헨리다. 풀 네임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다. 이름에 깃든 족보를 따져서 무엇하리. 그는 퇴직 후 틈만 나면 집 앞 그네에 앉아 코를 골며 자곤 했다. 그네는 육중한 몸을 잘도 지탱해 줬다. 헨리는 저렇게 졸다가 죽겠구나 싶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외출이 잦아졌다. 그와 사생활을 물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지만 시큰둥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의 친근함은 있었다. 주로 잔소리 많은 와이프 흉을 볼 때 우리는 통하는 게 많았다. 게다가 여자들끼리 친하지 않은 게 우리로선 도움이 되기도 했다. 헨리가 외출하는 횟수를 보니 월수금으로 규칙적이었다. 나는 관심 없는 표정으로 그에게 일이라도 나가느냐며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나더러 자원봉사 할 생각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잡풀 뽑는데 집중했다. 습기가 많은 땅이라 그런지 자고 나면 새 풀이 자랐다.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헨리는 내 곁으로 걸어오더니 뜬금없이 수국 칭찬을 하였다.


"수국이 작년보다 이르게 핀 것 같네. 빽빽하니 빈틈없이 잘 자랐어. 아주 잘 가꾸었네."


나는 그 말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물었다.


“대체 무슨 자원봉사를 한다는 거지?”


그는 28번가에 있는 뉴욕 인터내셔널 센터에 영어 자원봉사를 시작했다고 하였다. 자신도 소개로 알게 된 일이라고 했다. 그 일이 치매 예방도 되는 것 같다고 신이 난 어투로 말해줬다.


“벌써 무슨 치매 걱정은.”


나는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심심하지도 않고 그럭저럭 재밌네. 자네도 신청해 보게. 꼭 되란 법은 없으니."


“돈은 전혀 받지 않고?”


헨리는 내게 돈타령을 한다고 타박을 주었다. 나는 헨리의 일이 시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돈을 벌지 않아도 와이프의 잔소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는 나의 의중을 눈치챘는지 나를 살살 꼬드겼다.


"어때? 솔깃한가? “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잡풀만 재빠르게 뜯어 나갔다.


“내가 가는 길에 자네 이름으로 자원 봉사자 신청해 둠세. 센터에서 연락 오면 약간의 교육만 받고 시간 정해서 나가면 된다네. 딱히 어려운 건 없어. 외국인과 대화 상대만 해주면 돼. 자네 시간에 맞출 수도 있으니까. 한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뭐, 시간 핑계 될 일이 있겠나."


헨리가 나가자 나도 곧장 일어나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인터내셔널 센터 홈페이지를 검색하여 들어갔다. 그럼 그렇지. 요즘 세상에 홈페이지가 없을 리가 없다. 게다가 국가에서 운영하는 기관인데 구축이 잘 되어 있겠지. 구태여 직접 가서 신청할 필요가 있겠나.


생각보다 빨리 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센터에서는 나의 신원 조회를 한 후 가벼운 지침을 일러 주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


"그냥, 얘기만 하면 되는 거죠?"


"네. 상대방이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친절하게 대화만 하면 돼요. 그래도 가급적이면 천천히 또박또박 쉬운 얘기를 하는 게 좋겠죠? 가르칠 필요도 없고 연설을 할 필요도 없답니다. 외국인들이 서툴게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되물을 필요도 없고요. 그냥 잘 들어주고, 잘 따라 하게 끔. 그 정도면 돼요."


헨리는 마치 자신이 주도해서 일을 한 것처럼 내 앞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뭐라 그랬나. 같이 다니니 심심하지 않아서 좋구먼.”


헨리를 따라 센터에 도착한 순간 처음에는 잘못 온 게 아닌가 싶었다. 배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한 시간이 넘어 걸리는 거리는 그렇다 치고 돈 한 푼 받지 않고 이런 자원봉사를 한다는 게 나에게는 무의미한 일 같았다. 나는 한창 꽃밭도 가꾸고 있었고 가지치기며 잔디 깎는 일 등 소소한 일거리도 많았는데. 그것들을 다 팽개쳐두고 외국인의 서툰 영어나 들어주고 있으라니. 게다가 절반 이상은 불법 체류자들인데 그들을 위해서 봉사를 한다는 것이 어쩐지 달갑지 않았다. 괜한 신청을 했다 싶었다. 내가 아무래도 노망이 난 게지.


정부는, 몰려드는 체류자들의 사회적 문제를 교육으로 해결할 방침이 엿보였다. 한쪽 교실에는 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저런 것도 가르치나?”


“한쪽에서는 불법 체류자 쫓는 데 혈안이 되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미국 시민 만들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니 어째 좀 그렇긴 하지. 그런데 어쩌겠나 교화라도 시켜야지."


"교화? “


헨리는 아무렴 어떠냐는 표정을 지었다. 헨리는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만 고무되어 있었다. 헨리는 이제 파트너와 대화하는 자원봉사는 하지 않고 독해반을 개설했다고 하였다. 교사 경력을 인정받은 탓인지 소정의 인센티브도 받으며 개인 강의실을 배정받았다고 자랑처럼 얘기했다.


"헤리 포터의 마법사를 읽어 준다고. 흥미롭지 않은가. 나는 회원들에게 돌아가며 읽게 하고 발음을 고쳐 줄 생각이네. 물론 그들의 서툰 발음을 듣고 있는 것이 고역이긴 하겠지만 말이야."


수업 준비를 해야 한다는 헨리의 열성 때문에 나는 한 시간이나 일찍 오는 수고를 하였다. 외국인과 대화를 하는 장소는 불법 체류자 면회소처럼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모여 떠들고 있었다. 파라솔만 비치해 두면 영락없는 중국 해변가 같았을 라운지가 보였다. 내 나라 말을 배우고 있는 그들의 목적이 궁금했다. 그들끼리만 통하는 영어를 나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왼쪽 벽면에 열 평 남짓한 공간은 일대일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회원 가입 후 별도의 비용을 지불하고 신청하면 나 같은 영어 파트너와 대화를 하는 시스템이다. 미국에 십 년을 넘게 살아도 영어가 좀처럼 늘지 않는 이민자부터 장단기 어학 연수생까지 어려움 없이 돈만 내면 가능하였다. 심지어 불법체류자도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었다. 내가 맡게 될 회원은 이전 파트너의 영어 발음이 시원찮다는 이유로 컴플레인을 걸었다고 센터 관계자가 말해주었다. 그가 인도 출신의 의사였음에도 다른 사람을 요청했다고 하니 나의 부담감이 더했다.


“어찌 보면 아시안들이 인종 차별이 더 심한 것 같아요.”


센터 관계자는 어찌 들으면 위험할 수 있는 발언을 내게 푸념하듯 말했다. 그도 아차 싶었던지 전화를 빨리 끊으려 하였다. 그런 탓인지 나는 그에게 파트너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은 할 겨를이 없었다. 대체 얼마나 잘난 외국인이기에...


나는 입구 쪽에 등을 보인 채 구부정하게 앉았다. 어차피 내가 먼저 상대방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으니 대화 파트너가 알아서 나를 찾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가판대에서 사 온 신문을 펼쳐 들었다. 대화 파트너가 뉴욕의 사건 사고에 관심이 많을 수도 있을 테니까. 나는 이참에 미국 사회가 결코 녹록지 않은 곳임을 말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니 불법 체류 따위는 엄두도 내지 말고, 더욱이 이민은 꿈도 꾸지 말라고 얘기할 것이다. 그가 누구든 말이다. 당신이 사는 곳이 힘들었다면 이곳 역시 만만치 않을 거라우. 그러면서도 나는 내심 초조했다. 이번에는 나를 어눌한 발음과 냄새나는 노인이라고 거절하면 어쩌나 싶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신문을 읽었다. 시간이 가까워 오자 조금씩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고대하던 사람을 만나는 모양새로 지나치게 반색을 하거나, 뭐랄까 들뜬 어조로 인사말을 나누고 있었다. 나처럼 처음 만나는 이들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겉으로는 태연하거나 귀찮음에 가까운 표정으로 파트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절 반 이상 사람이 찼을 무렵 은은한 들꽃 향수 냄새가 내 바로 앞에 멈췄다.


"코헨툴버....?"

"예스. 싯 플리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일어나지 못한 게 옳다) 긴장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앞에 앉으라고 말했다. 맙소사 여자였다니. 왜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센터 관계자가 말한 중에 알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벅적스럽게 온갖 억양이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어도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센터에 영어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의 외형에 관해서, 그것도 여성인지 남성인지에 관해 궁금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 내가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성기능이 왕성한 편은 아니지만 어쩌다 한 번씩 아름다운 여성을 생각하며 자위하는 걸 즐기지 않았던 가. 날이 갈수록 쭈글쭈글해지는 와이프를 보면서도 이따금 성욕을 느끼기도 하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른 아침 불끈 발기가 되었을 때는 세상 그보다 더 기쁠 수 없는 환희에 차 있던 적도 있었으면서. 몇 년 전 잠시 사랑에 빠졌던, 아들 톰의 부동산 중개인이던 수잔나를 여전히 잊지 못하며 그리워했던 나인데. 빌어먹을 수잔나. 톰이 결혼하여 집을 알아보는 동안 나는 수잔나의 밝고 화려한 용모에 반해서 그만 올드 타운으로 이사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이사 후 수잔나를 볼 일이 없긴 했지만 나는 아직도 로맨스를 꿈꾸는 남자였다.


  내 앞에 앉아 신선한 향을 풍기는 그녀는 라운지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흥분시킬 만큼 매혹적이었다. 맙소사 그동안 헨리가 들떠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바로 그녀 때문이었다. 이래서 멋진 여자는 아무 일도 안 해도 추앙받을 수 있는 거다. 그녀의 존재만으로 센터 안에 이토록 활기가 돌다니. 설령 그녀가 불법 체류자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리. 나는 일순 입고 온, 추레하고 가뜩이나 더 늙어 보이는 크림색의 점퍼를 당장 휴지통에 처박고 싶은 기분이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후회의 한숨을 뱉었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심호흡처럼 보였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나는 상기된 표정보다는 친절하고 노련한 할아비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침착하게,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쏘리, 아이 디든노...음...디스...룸....음....아이 디딘 파인드. 디스...룸...."


"잇츠 오케이. 돈 워리. 유 디딘 레이트."


그녀는 내가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시계를 가리키며 이제 겨우 5분을 넘겼을 뿐이라는 걸 인식시켰다. 그럼에도 그녀가 쩔쩔매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 아마 내가 진작부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녀도 일찍 왔으나 차마 파트너가 나 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이것을 일종의 실망이라고 해야 할지 민망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번에도 내가 거절을 당하는 것인가 하고 불안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녀에게 거절을 당해도 나는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필시 나보다는 훨씬 괜찮은 파트너를 만날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녀는 순수한 앵글로 섹슨 혈통의 젊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는지도 모르잖은가. 그렇다면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그녀는 단화를 신고 왔는데도 키가 무척 커 보였다. 내가 기존에 알던 영숙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목 뒤는 물론 엉덩이에도 천박한 문신은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보통의 서양인보다 얼굴이 작았고 이목구비도 무척 또렷하였다. 그렇다고 우리네 서양인처럼 보였던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욱 멋져 보인 것 같다. 광대뼈도 넓지 않고 높고 위엄 있게 솟아 있었고 하관이 돌출되지도 않았다. 동양인은 분명한데, 체형은 서양인 같아 보였다. 구태여 나 같은 노인과 대화를 하지 않아도 클럽 몇 번만 돌아다니면 누구든 사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왜 고리타분한 인터내셔널 센터에 등록을 해서 영어를 배우려는 것일까. 그 점이 궁금했다. 어찌 되었든 정말로 그녀가 영어를 배우기 위함이든 미국 남자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든 내게 임무가 주어진 이상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한 데에는 그녀가 나를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그녀의 남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인터내셔널 센터에 오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 그녀도 영어가 무척 서툴렀다. 그렇다고 내가 오래전 알던 영숙이보다 못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둘의 차이점이 있다면 오래 전의 영숙이는 자신이 영어를 잘 안다고 생각한 것이고 영은 잘 못한다고 생각하는 점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 소개를 했다. 코헨이라고 부르면 된다고. 아마도 그것만을 유일하게 알아들은 것 같다. 그녀는 내가 어디에 살며 무슨 일을 했었는지 등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지난번 인도인 의사를 내친 것을 내심 미안하게 생각했던지 열심히 그에 대한 얘기를 하였다. 그녀는 그의 직업이 의사인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하는 말은 즉슨, 그는 매우 친절했지만 그의 발음이 너무 어려워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주 살짝 피식 웃었다. 나는 그녀의 얘기를 열심히 흥미롭게 경청했다. 중간에 굿. 굿. 그레이트. 엑설런트를 곁들이면서 말이다. 사실. 그녀가 뭔 말을 하는지 소리를 통해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와는 다음 주 수요일 두 시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우리가 대화한 시간은 고작 한 시간이었다. 우리에게 오직 한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별도로 만남을 갖기도 한다지만. 내가 무슨 수로 그녀를 따로 불러낸단 말인가.

집에 가는 길에 헨리는 나에게 어땠느냐고 물었다.

“뭐. 그냥. 그랬지 뭐.”

“파트너는 어땠어? 영어를 잘 알아듣던가?”

나는 문득 그녀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쉬즈 영이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헨리는 나를 다그치며 물었다. 젊은 여자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법도 한데 헨리는 대뜸 영의 얘기를 꺼냈다.

“자네가 영의 파트너라고?”

헨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수요일 이후 나는 한 달 가까이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망할 놈의 배심원으로 선정되어 참관했기 때문이다. 벌금을 물어서라도 미룰까 싶었지만, 그런 턱도 없는 무모한 짓은 올드 타운으로 집을 이사한 일 하나로 족했다. 그래도 영을 만나기 전까지는 바라던 일이기도 했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참가해 영에게 이 경험을 얘기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영을 기다렸다. 라운지를 기웃거리다가 영이 안보이자 자원 봉사자들이 모여 있는 룸으로 들어갔다. 영은 헨리의 독해 수업도 듣고 있었다. 그밖에 미국 문화 수업 등 센터에 있는 프로그램은 전부 다 섭렵할 태세로 거의 매일 나오는 것 같았다. 꼭 그녀 때문은 아니지만, 수업이 없는 월요일에도 나와 같은 은퇴자 출신 자원 봉사자들은 센터를 자주 방문했다. 그들은 지나가다 들르기도 하고 잠시 시간을 때우거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곳을 찾곤 했다.

“센터에 아주 예쁜 동양 여자가 들어왔다네. 헨리의 수업도 듣는 모양이야."

그곳에서 나는 다른 지인들을 사귀기도 했다. 그들과 가끔 술을 마시기도 했고 회원들 이야기를 하는 재미로 살았다. 외국인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젊은 여자들에 관해 얘기하는 것은 언제나 흐뭇했다. 근래엔 온통 영의 얘기뿐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내가 들어갈 때마다 격앙된 어조로 그녀에 관해 묻곤 하였다.

“섹시하고 매력적이야. 포카 혼타스가 살아 돌아온 줄 알았다니까.”

미처 알지 못했던 다른 늙은이도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물었다.

“코헨, 맙소사 자네와 대화 파트너라고? 헨리를 부러워할 게 아니었군.”

나는 애써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괜스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내가 죽은 지 오래된 프랭코는 물론이고 젊은 시절부터 줄창 바람을 피웠다는 스티븐마저도 영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이미 동양 여자를 사귀고 있는 마이클도 마찬가지였다. 젊거나 늙거나 다들 영에게 반해있었다.

“어떻게 어학원에 가지 않고 이곳에 왔을까.”

“조그만 동양 남자와 같이 온 것 같던데. 동생 같더구먼.”

“그 친구는 영어를 제법 하던데.”

“어학원보다 인터내셔널 센터가 저렴하고 영어 배우기가 더 낫다고 추천을 했다네.”

“그녀가 영악한 데가 있군.”

“그런데 실제는 영악한 것 같지가 않아. 말을 잘 못해.”

“몇 살이나 됐을까.”

“생각보다는 많은 것 같던데 절대 그렇게 보이지가 않아. 동양 여자들은 신기하지 그래. 나이를 먹지 않는다니깐.”

“동양 여자라고 다 예쁜 건 아닌데.”

“그녀는 언제나 가슴을 반쯤 드러내고 초미니 스커트를 입고 다니지. 그런 여자들이 흔한 도시지만, 그래도 그녀는 뭔가 남다르게 화끈해 보이지 않나. “

“헨리가 그러는데 읽는 발음은 아주 괜찮대. 뜻은 몰라도 발음은 훌륭하다고 하는 군.”

“그러면 아주 멍청하거나 교육 수준이 낮은 것만은 아닌 것 같군.”

“그녀는 언제 돌아간다지?”

“그건 알 수가 없지.”

“코헨 오면 더 물어보자고.”

“코헨은 너무 점잖은 척하는 게 흠이라니깐.”

“속으론 코헨도 좋아하고 있을 거야.”

나는 그쯤에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늙은이들은 호들갑을 떨며 마침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는 둥, 무안함을 드러냈다.

“오늘도 젊음에 관한 이야기로군.”

다들 한바탕 웃었고.

“그런데 우리가 꼬시면 그 동양 여자가 넘어올까.”

“센터에선 그런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어. 저번에 마법사 놀이하던 샘 못 봤나. 동양 여자들한테 치근덕거리다 쫓겨나지 않았나.”

“동양여자들이 너무 덤비는 것도 없지 않아 있지.”

“마이클 있잖나. 여자 친구가 한국인이라지. 한때 한국에서 제법 잘 나가는 연예인이었다는데 자꾸 결혼해 달라고 성화라네.”

“마이클 부인이랑 별거 중 아닌가.”

“이혼은 한 걸로 아는데.”

“마이클은 여자를 너무 밝히는 게 흠이지.”

내 흉을 보던 찰스란 작자는 나를 점잖은 게 흠이라더니 마이클은 밝히는 게 흠이라고 하고 있었다. 나는 찰스의 말대로 점잖은 척을 하면서 주변 얘기를 귀담아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질문에 마지못해 한마디 했다.

“순진한 구석이 많은 여자야.”

다들 키득키득 거리며 웃었다. 그들은 마치 나를 순진한 애송이 취급을 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이제 그녀를 만나러 가야겠네.”

나는 힘이 들어간 몸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영을 만나 배심원을 하면서 겪은 얘기를 해 줄 생각에 심장이 뛰었다. 혈액순환에는 운동보다 젊은 여자를 만나는 게 도움이 된다는 뉴욕 타임지를 무시할 게 못 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영은 이제 조금 영어가 입에 붙은 모양이다. 제법 내게 이런저런 얘기를 쏟아내는 데 여전히 무슨 소린지는 이해를 못 했다. 그래도 그녀가 신이 나서 말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추임새를 잊지 않으며 그녀가 하는 말을 참고 들어주었다. 이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꺼내야 하는 데 그녀는 정말이지 회화의 기본자세가 안 되어 있었다. 그동안 잘 지냈냐는 인사는 왜 빼먹고 갑자기 뜬금없이 UFO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UFO는 증명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녀는 UFO를 믿는다고 하였다. 그것은 그녀가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존재와 믿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그녀는 어디서 무슨 일을 겪은 것인지 느닷없이 UFO를 믿는다며 유태인인 내 앞에서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내게 그런 시련을 주는지. 아무튼, 나는 대충 그녀의 얘기를 듣고 이해하는 척하였고. 이제는 정말로 내 얘기가 하고 싶었다. 배심원이란 단어를 꺼내자, 드디어 그녀가 되물었다. 그녀는 사전으로 단어를 찾고 나더니 그게 뭐, 어째서? 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배심원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녀는 마지못해 어떤 사건이었냐고 물었다. 나는 신이 나서 사건에 대한 설명을 했다. 역시, 그녀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고. 그녀는 애니웨이,라고 말하며 화제를 전환하려 했다. 할 수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도 전달되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에는 지루함만 가득했다. 그리고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다다음주에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녀가 불법체류자가 되지 않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내가 안도를 해야 하는 게 옳았을까. 범죄율을 다소 낮추고 내 나라를 보호하는 데 다소 일조를 했다고 좋아해야 하는 건가. 나는 그녀가 태연한 표정으로 이 주 후면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는 말이 왜 그렇게 서운하게 여겨지던지. 오줌이 찔끔 나올 정도로 다리에 힘이 쭉 빠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이런 내 마음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다음 주가 마지막 수업이 될 거라고 힘 있는 어조로 얘기했다. 다음 주가 마지막이라니.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를 다시는 못 보게 되다니.

“영이 곧 돌아간다고 하네.”

“코헨은 고백을 못했다네.”

“동양 여자가 효자손을 건넸다네.”

“이제 겨우 육십 조금 넘은 그에게 효자손이라니.”

“코헨은 씁쓸하게 받아 들었다고 하던데. “

“아이고 우스워라. 효자손이라니.”

“동양 여자는 코헨을 완전 꼬부랑 늙은이로 본 게로 군.”

자원봉사자 룸 안에서 나를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효자손을 받아 들고 쓸쓸하게 거리를 걸었다. 영에게 마지막 선물을 하기 위해서 지난 한 주 동안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며 고민하던 순간이 물거품처럼 허망했다. 선물 코너에서 아이러브 뉴욕이란 쓰인 티셔츠를 줄까, 향수를 선물할까 숱하게 고민하다 핑크색의 아이러브 뉴욕이 박힌 모자를 선물했다. 그녀가 가끔 그런 모자를 즐겨 쓰는 것 같아서였다. 대체 그녀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영은 한국에 돌아가면 내게 메일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이름은 김영숙이라고 했다. 외할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이라고 했다. 나를 보면 그런 외할아버지가 생각난다고. 할아버지가 효자손을 자주 찾았었다고. 대체 마이클은 어떻게 한국 여자를 꼬실 수 있었단 말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외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