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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토픽션

우리가 사랑했던 영숙

by 무체

아주 오래전, 내가 알던 한국 여자 중 한 명의 이름은 김영숙이었다. 그 시절의 영숙이는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모든 한국 여자의 이름이었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우리가 아는 영숙이는 생김새도 비슷했다.


"너도 영숙이 만났었어? 검고 긴 머리에 눈이 쫙 찢어지고 눈 밑에 아이라인 문신을 했었지?" "내가 만났던 영숙이도 그랬어. 윗입술이 얇고 앞니가 유독 툭 튀어나왔지." "목이 길었던가? 내가 만난 영숙이는 뒷목에 한자가 새겨져 있었어." "그래? 그게 한자였어? 난 새 그림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 날개였던가." "작고 갸름하고 좀처럼 늙지 않는 신기한 여자였지."


녀석들 말 중에는 거짓이 태반이었을 것이다. 여자 문제에 관해서라면 특히 과장이 심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한국에서 온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들 중 이름이 영주였을지도 모르고 영신이었을 수도 있다. 명숙이나 정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귀에는 '영숙'이란 이름이 가장 익숙하게 들렸다. 물론 아주 오래전에 있던 일이다. 우리가 비교적 젊다고 자부하며 다니던 시절, 쾌락도 하나의 멋으로 간주하던 그 시절의 이야기 말이다.


그때의 영숙이는 다들 어디로 갔을까. 하긴 요즘 케이티나 에이미, 클라라란 이름으로 불리는 한국 여자라 해도 그때의 영숙이와 달라 보이는 건 아니다. 내 눈에 비친 동양 여성, 특히 한국 여성은 모두가 영숙이처럼 보였다. 그런데 '영'은 그동안 알던 영숙이와는 조금 달랐다. 그녀의 외모, 몸짓,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어디에도 주눅 드는 법 없이 당당하고 성격도 유달리 밝았다. 영은 그냥 영이었다. 우리의 영숙이와는 다른 영.


내 이름은 코헨이다. 풀 네임은 코헨 툴버럼 프란체스코지만 간략하게 코헨으로 불린다. 내 이름 스토리에 관해 특별히 물어오는 이도 없고 나도 굳이 설명해 주고 싶지 않다. 게다가 내 발음은 시원찮아서 더 말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이 뻔하다. 젊을 때도 비음이 섞여 발음이 불분명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더 어눌해지고 있는가 보다.


나는 뉴욕에서 태어나 철도 기관사로 오랫동안 일하다 3년 전에 퇴직하였다. 이탈리아 이민자인 아버지는 로리타에서 나를 낳았고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자유의 여신상을 스쳐가는 올드 타운으로 이사한 건 은퇴할 무렵이었다. 그것도 나름의 사연이 있다. 아들 톰이 집을 알아보는 동안 담당 부동산 중개인이던 수잔나에게 반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를 더 자주 보고 싶어 덜컥 이사까지 했지만, 이사 후엔 수잔나를 볼 일이 없었다. 지금도 그 일 때문에 와이프에게 잡혀 사는 걸 생각하면 아찔하다. 나는 아직도 로맨스를 꿈꾸는 철없는 남자다.


옆집에는 나와 같은 처지가 된 이웃이 살았다. 그의 이름은 헨리다. 풀 네임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다. 퇴직 후 틈만 나면 집 앞 그네에 앉아 코를 골며 자는 게 일과인 뚱뚱한 남자다. 저러다 죽겠구나 싶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외출이 잦아졌다. 그와 사생활을 물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지만, 주로 잔소리 많은 와이프 흉을 볼 때 우리는 통하는 게 많았다. 헨리의 외출은 월수금으로 규칙적이었다. 일이라도 나가느냐 물었더니, 대뜸 나더러 자원봉사 할 생각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수국이 작년보다 이르게 핀 것 같네. 아주 잘 가꾸었어." 헨리는 뜬금없이 내 정원 칭찬을 하더니 본론을 꺼냈다. 28번가에 있는 뉴욕 인터내셔널 센터에서 영어 자원봉사를 시작했다고 했다. 그 일이 치매 예방도 된다며 신이 난 어투였다. "돈은 전혀 받지 않고?" "이 사람아, 우리 같은 처지에 돈타령인가. 자네 와이프 잔소리 피하고 싶지 않나?" 그 말에 솔깃했다. 돈을 벌지 않아도 와이프의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렇게 나는 헨리의 꼬임에 넘어가 센터에 등록했다. 센터 관계자는 "그냥 외국인들이 서툴게 하는 말을 잘 들어주고 친절하게 대화만 하면 된다"고 했다. 헨리를 따라 도착한 센터는 흡사 불법 체류자 집합소 같았다.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중국 해변가처럼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한쪽 교실에서는 미국 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불법 체류자를 쫓아내면서 한쪽에서는 미국 시민을 만들려고 애쓰는 꼴이라니. 내가 맡게 될 회원은 이전 파트너에게 컴플레인을 걸었다고 했다. 파트너가 인도 출신의 의사였음에도 발음이 시원찮다며 바꿨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아시안들이 인종 차별이 더 심하다. 나는 내심 초조했다. 이번에는 나를 어눌한 발음과 냄새나는 노인이라고 거절하면 어쩌나 싶어서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채 기다렸다.


그때, 은은한 들꽃 향기가 내 코앞에 멈췄다. "코헨 툴버...?" "예스. 싯 플리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긴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맙소사, 여자였다니. 그녀는 내가 알던 '영숙이들'처럼 뒷목에 문신이 있거나 촌스럽지 않았다. 단화를 신었는데도 키가 컸고, 이목구비는 서양인처럼 시원시원했다. 그녀의 존재만으로 센터 안에 활기가 돌았다. 나는 입고 온 추레한 크림색 점퍼를 당장 휴지통에 처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영어를 잘 못하면서도 당당했다. 이름은 '영'이라고 했다. "쏘리, 아이 디든 노... 디스 룸..." "잇츠 오케이. 돈 워리." 나는 최대한 여유롭고 노련한 할아버지처럼 보이려 애썼다. 그녀는 인도인 의사의 발음을 흉보며 열심히 떠들었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중간중간 "굿", "엑설런트"를 연발하며 경청했다.


집에 가는 길, 헨리는 내가 '영'의 파트너라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소문은 빨랐다. 자원봉사자 룸의 늙은이들은 나를 볼 때마다 영에 대해 캐물었다. "섹시하고 매력적이야. 포카혼타스가 살아 돌아온 줄 알았다니까." "그 친구는 옷도 아주 화끈하게 입더군." "코헨, 자네 진도는 좀 나갔나?" 프랭코는 물론이고 바람둥이 스티븐마저 영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나는 애써 점잖은 척하며 "그냥 순진한 구석이 많은 여자야"라고 대꾸했지만, 속으론 으쓱했다. 혈액순환에는 운동보다 젊은 여자를 만나는 게 도움이 된다는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진리였다.


영은 이제 영어가 조금 입에 붙은 모양이었다. 제법 내게 이런저런 얘기를 쏟아냈다. 여전히 무슨 소린지는 이해를 못 했지만, 그녀가 신이 나서 말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나는 그녀에게 내 지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다. 마침 배심원으로 선정되어 재판에 참여했던 경험을 꺼냈다. 미국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사법 정의에 대해 멋지게 설명할 참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번에 배심원(Jury)으로 갔는데..." 그녀는 전자사전을 두드리더니 그게 뭐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그녀는 내 말을 뚝 자르고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애니웨이(Anyway), 미스터 코헨. 두 유 빌리브 UFO?" 맥이 탁 풀렸다. 지금 법과 정의를 논하는데 웬 UFO? 나는 UFO는 증명되지 않았다고 점잖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아이 빌리브! 아이 쏘우 잇!" (난 믿어요! 진짜로 봤다니까요!) 유태인인 내 앞에서 외계인의 존재를 열변하는 그녀라니.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는지. 나는 대충 그녀의 황당한 얘기에 장단을 맞춰주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늘 엇갈렸다. 나는 현실을 말하고 그녀는 공상을 말했다. 그래도 좋았다. 그런데 그녀가 폭탄선언을 했다. "투 윅스 레이터. 고 홈." 이주 후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오줌이 찔끔 나올 뻔했다. 불법 체류자가 줄어든다고 좋아해야 하나? 아니, 내 로맨스가 이렇게 끝나는 게 너무나 서운하고 억울했다. 그녀는 내 마음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다음 주가 마지막 수업이 될 거라고 힘차게 말했다.


"코헨은 결국 고백도 못 했군." "늙은이가 주책이지." 자원봉사자 룸에서 늙은이들이 킬킬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나는 그녀에게 줄 마지막 선물을 고르느라 며칠을 고민했다. 향수? 티셔츠? 결국 그녀가 평소 즐겨 쓰는 스타일인 핑크색 'I Love NY' 모자를 샀다. 마지막 날, 나는 떨리는 손으로 선물을 건넸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길쭉한 나무 막대기. 끝이 손가락 모양으로 굽어 있는 그것. 효자손이었다.


"디스 이즈... 코리안 프레젠트."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마이 네임 이즈 김영숙. 마이 그랜드파더... 라이크 디스. 유... 룩 라이크 그랜드파더." (제 이름은 김영숙이에요. 우리 할아버지가 이걸 좋아했어요. 당신을 보면 우리 할아버지가 생각나요.)


나는 멍하니 효자손을 받아 들었다. 자원봉사자 룸의 늙은이들이 알면 배를 잡고 구를 일이다. 사랑 고백을 하려던 내게 등이나 긁으라니. 결국 영도 그냥 영이 아니라 '영숙'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알던 '영숙이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나를 남자가 아닌, 자신의 할아버지처럼 존중해 준 고유한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떠난 거리에서 나는 쓸쓸하게 효자손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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